17.5도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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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정훈(31세 男) 회사원
은영(31세 女) 작가 지망생
무대
무대 중앙에 빌라 현관문이 덩그러니 서 있다.
현관문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은영의 집 거실이, 왼쪽에는 빌라 복도가 보인다.
1막, 늦은 밤
방금 세수를 마쳤는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타난 은영, 편한 파자마 차림으로 노트북 앞에 앉았다.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빌라 복도에 불이 켜지며 술에 잔뜩 취한 정훈 등장.
- 은영
- (노트북으로 타이핑하며 읊조리듯) 그녀에게는 밤마다 찾아오는 남자가 있다.
(미스터리한 분위기로) 매일 밤, 술에 취해 그녀의 문을 두드리는 정체불명의 남자....... - 정훈
- (술 취해 침 흘리며) 수정아, 왜 전화 안 받고 그래? 네가 자꾸 그러면 내 마음이 어떻겠니?
(울먹이며) 제발, 한 번만 나와서 얼굴 보여줘. 수정아, 이제 네 얼굴 기억이 안 나.
(현관문 손잡이 잡고 미끄러지듯 무릎 꿇고) 내가 다 잘못했어. 이렇게 빌게, 수정아! - 은영
- (노트북으로 타이핑하며 읊조리듯) 정체불명의 남자.......정체불명의 시끄러운 남자.......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이 집에 이사 오고 나서 벌써 일주일째,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정체불명의 이 시끄러운 남자........ - 은영
- (노트북 덮으며) 아이, 정말!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못 쓰겠네. 이게 대체 몇 번째야.
(현관문 너머로 소리치며) 이봐요, 취하셨으면 조용히 집에 가서 이 닦고 주무세요!
지금 몇 시인 줄 알아요? - 정훈
- 수정아! 집에 있었구나!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없었어. 제발 한 번만 나와 봐. 응? 수정아!
- 은영
- 아, 대체, 수정이는 누가 수정이라고 그래요? 그런 사람, 여기 안 산다고 몇 번을 말씀드려요!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라고요. 저는 여기 일주일 전에 이사 온 사람이라고요! - 정훈
- 수정아! 모두 다 내 잘못이야. (자기 가슴을 움켜잡으며) 나 이제 더 이상 심장이 뛰질 않아.
숨이 막혀서, 정말, (취해서 꼬인 발음으로)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야.
수정아, 네가 나를 버린 거니? 아니면 내가 버려진 거니? - 은영
- 염병, 아주 삼류 소설을 쓰고 앉았네. 어디, 경찰 부르기 전에 작가님 얼굴이나 한번 봅시다!
- 정훈
- 수정.......아.......
- 은영
- 어머, 이 사람 머리에서 피나잖아. 이보세요! 여기 정신 차려 보세요.
- 은영
- (노트북으로 타이핑하며 읊조리듯) 밤마다 그녀를 찾아와 괴롭히던 남자,
어쩐 일인지 남자의 방문이 멈추었다. 벌써 며칠째 소식이 뜸하다.
남자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타이핑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빠진 듯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 은영
-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고개만 돌려 목청 높여) 누구세요?
- 정훈
- 저, 그동안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다시는 앞으로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은영
- 됐어요. 그런데 오늘은 목소리가 멀쩡하시네요?
- 정훈
- (어쩔 줄 몰라) 아, 네. 정말 죄송합니다.
- 은영
- 저기요, 그런데 이마는 괜찮으세요?
- 정훈
- (이마에 붙은 반창고를 만지며)아, 네. 그날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 은영
- 치료는요, 무슨, 겨우 반창고 하나 붙여드린 것 밖에 없는데.
- 은영
- 그러면 혹시 이 집이....... 그 수정 씨라는 분.......
- 정훈
- (사이) 네, 전에 여자 친구가 이 집에 꽤 오래 살았었어요.
저도 전에는 여기 제집처럼 드나들고는 했었는데, 제가 취하기만 하면 그게 버릇이 돼서,
정말 정신 나가서 헤어진 것도, 이사 간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정말 죄송합니다. - 은영
- 그래서 수정 씨는 만나셨어요?
- 정훈
- 아, (사이) 그제가 수정이 결혼식이었는데, 가긴 했는데 얼굴은 안 보고 그냥 왔습니다. 이제 저도 새로운 마음으로 잘살아 보려고요. 술도 끊고. 그럼 이만 진짜 가보겠습니다.
- 은영
- 저기 (사이) 그러면, 혹시 요 앞에서 저랑 술 한 잔 하실래요? 괜찮은 집 있는데.
- 정훈
- (손사래 치며) 아닙니다.
- 은영
- 왜요? 저도 지금 막 답답해서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이제 술 끊으신다면서요? 마지막으로 요 앞에서 같이 한 잔해요. - 정훈
- 아휴, 정말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 은영
- (사이) 죄송하다면서요? 그러면 저한테 오늘 술 사주시면 되겠네.
- 정훈
- 아니,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다가) 혹시 저 또 실수하면 정말 큰일입니다.
- 은영
- 에이, 적당히 순한 거로 마시면 되죠.
- 정훈
- (어색한 미소 보이며) 같이 가시죠.
정훈이 비틀거리며 현관 초인종을 계속 누르려 하지만, 너무 취해서 손가락이 자꾸 빗나간다. 정훈이 넥타이를 한 뼘 풀며 소리친다.
흐느끼며 현관문 두드리기 시작하는 정훈.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커지자, 은영이 신경질을 내며 자기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짜증이 오를 대로 오른 은영이 거침없이 문을 여는데, 정훈이 열리는 문에 머리를 부딪혀 그대로 고꾸라져 기절한다.
암전.
2막, 며칠 지난 저녁
은영이 거실에서 컵라면을 먹다 말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다.
은영, 생각이 많아 글이 잘 안 써지는지 머리를 긁적이다가 노트북을 덮고, 기지개를 켠다. 그때 현관문 바깥에서는 말끔한 모습의 정훈이 큼지막한 과일 바구니를 들고 등장해 초인종을 누른다.
정훈이 과일 바구니를 문 앞에 놓고, 문 쪽에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뒤돌아 가려 한다. 은영이 빼꼼히 문을 열어 과일 바구니를 확인한 후, 정훈을 불러 세운다.
정훈, 돌아서서 은영에게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한다.
정훈이 90도로 허리 숙여 은영에게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은영이 문을 반쯤 조금 더 열고 다시 정훈을 불러 세운다.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려는 정훈, 다시 정훈을 불러 세우는 은영.
정훈, 어색한 표정으로 뜸들이다가 은영에게 인사하고 급하게 돌아서려는데,
은영,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정훈을 빤히 쳐다본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환하게 미소 짓는 은영.
- 호들갑 작가소개
- 영화감독 방재호입니다.
평소에는 인형처럼 가만히 잘 지내다가 가끔은 시를 쓰거나 영화를 찍습니다.
내가 만드는 이야기들을 통해 당신의 마음속을 유영하는 물고기가 되고 싶어요.
옮겨 적을 수 있는 작은 물 한 모금만 있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