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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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거실. 최소한의 불빛만이 남은 거실.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거실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뭔가 불편한 듯 경직된 남자. 약간 상기 된 듯하지만,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다가 어떤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남자는 조금 슬퍼 보이고, 억울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곧 옷매무새도 고치고 오롯이 기다린다. 문을 잠시 바라본다. 나가버릴까 고민하는 것도 같다. 남자가 결심이 선 듯, 일어나자 남자 또래 정도로 보이는 연령대의 여자가 들어온다.
- 여자
- 오래 기다리셨죠?
- 남자
- (수줍어하며) 아닙니다...
- 여자
- (여자는 곳곳에 설치된 조명의 조도를 더 어둡게 조절한다) 어떻게 오셨어요?
- 남자
- 전화.... 저.... 부르셨잖아요...
- 여자
- 네?
- 남자
- 전화... 그 쪽이 전화 주신 게...아닌가요...? 저... 여기... 오라고....
- 여자
- 아! (웃음) 그래요. 전화. 제가 전화를 드렸죠. 이곳으로 와 달라구요. 맞아요. 그러니까 저는... 여기까지 오시기 힘드셨을 텐데, 차가 닿지 않으니까. 워낙 외진 곳이라...
- 남자
- 아....네.... 저, 걸어 왔습니다.
- 여자
- (여자 놀라서 하던 행동을 멈추고) 걸었어요? 그 먼 거리를? 터미널에서부터?
- 남자
- 아니에요. 걸을 만 했어요.
- 여자
- (여자, 남자를 자세히 관찰하며) 대단해요.
- 남자
- (수줍어하며 눈길을 피한다) 아니에여... 아녜여.
- 여자
- 놀라실 거예요.
- 남자
- 네?
- 여자
- 많이 변하셨거든요.
- 남자
- (숨을 몰아쉬며, 심장 쪽에 손을 얹는다) 아... 네... 기대...하고 있습니다.
- 여자
- 기대? (그 말이 우습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다)
- 남자
- 아... 아니, 저...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저는... 뵌지 오래되었고, 시간이... 흘렀으니까... 그러니까.... (수줍어 어쩔 줄을 모른다)
- 여자
- 귀엽네....
- 남자
- 네...? (붉어지는 얼굴에 어쩔줄을 모른다)
- 여자
-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라서, (손으로 빨개지는 볼을 가리키며) 볼...
- 남자
- 그냥 병이죠. 얼굴이 쉽게 빨개져요. 신경 쓰지 마세요.
- 여자
-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할머니가 꼭 당신을 찾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정말 찾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수소문도 하고, 흥신소 같은데 부탁해서 알아도 보고, 그래도 도무지 행적을 알 길이 없어서 저는 죽으신 줄 알았어요. 아, 죄송해요. 그 정도로 행방이 묘연 하셨다구요... 마치 사라진 사람처럼, 주변 사람들을 수소문해도 연락이 끊긴지 오래라는 말만 되풀이 되어 와서요. 그래도 이렇게 오실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물론, 돈을 많이 쓰긴 했지만,,,
- 남자
- 절... 왜 그렇게 찾으셨는지 모르겠어요. 선생님께선.... 절... 만나고 싶어 하실 리가 없는데...
- 여자
- 무슨 소리세요. 할머니는 오직 당신만을 만나길 원하셨어요. 대단한 제자이신가 봐요.
- 남자
- (수줍어 하면서) 아니에요... 그럴리가요....
- 여자
- (남자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이상하죠. 지금 할머니는 모든 만남을 거부하고 계세요. 저는 여기가 관 같아요. 이렇게 모든 창을 가리고, 모든 빛을 가리고 차도 닿지 않는 외진 곳에서 할머니는 대체 무엇을 기다리고 계신 걸까요? 처음엔 할머니가 시한부 선고라도 받은 줄 알았어요. 이곳에서 죽음을 기다리면서 잊혀지기를, 그렇게 사라지기를 선택하신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할머닌 당신을 찾기 시작하셨죠. 꼭.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야 한다고 했어요.
- 남자
- 이 어둠,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의 차단.... 선생님을 위한 것... 이었나요? 믿어지지 않아요.... 이 어둠.... 저는... 믿을 수가 없어요.
- 여자
- 정말 이상해요. 저는 이것이 할머니가 선택한 은퇴방식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그러기엔... 할머니는 아직도 글을 쓰세요.
- 남자
- 글을요?(수줍어하며) 하지만... 전... 최근 어디서도 선생님의 글을... 본 적은 없어요...
- 여자
- 공개하지 않는 글을 쓰고 계세요. 저에게도 보여주지 않으세요. 전 할머니의 은퇴는 누구보다 화려할 거라 생각해 왔어요. 화려한 은퇴식에서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그동안 썼던 희곡들을 모아 회고집도 만들고, 유작이 될 만한 공연도 멋들어지게 한 편 올린 뒤, 모두에게 ‘내가 은퇴를 하는 것’을 보여 주실 거라 생각했거든요. 공적인 자리에 참석하는 것도 좋아하셨고, 방송 출연도 좋아하셨잖아요. 즐기셨죠. 사람들의 관심, 그리고 사람들 앞에 서는 걸. 제자들은 또 얼마나 많아요. 아직도 사람들은 할머니를 찾고 있어요. 그런데 할머니는 오직 한 사람만 찾아왔어요. 그리고, 오늘... 그 분이 이렇게 드디어 오셨네요...
- 남자
- (얼굴을 붉힌다) 믿을 수 없어요... 선생님은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분이셨죠.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하고, 소통하고 싶어 하셨어요. 그런데... 이건.... 얼마나 되신 거죠...? 이렇게 지내신거... 언제부터... 인가요...?
- 여자
- 어느 날.
- 남자
- 어느 날?
- 여자
- 어느 날, 갑자기... 모시고 나올게요. 그리고.... 놀라지 마세요.
- 남자
- 선생님...?
- 여자
- 많이 변하셨다고 했잖아요.
- 남자
- 선생님, 이건 정말.... (울먹이며) 선생님 꼴이... 대체 왜 이러신 거예요? 네? 선생님!
- 여자
- 계속 옷을 더 입으시고, 담요로 가리시고, 온 몸을 가리시기 바빴어요. 그 어느 날 부터.... 그런데, 도통...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 남자
-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선생님... 얼굴을 보여주세요. 얼굴... 보고... 싶어요.
- 남자
- 선생님.... (남자는 노파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대체... 무슨 일이...
- 노파
- 부끄러웠다.
- 여자
- 부끄럽다고요? 할머니? 할머니, 지금 제자 앞에서 이런 모습을 부끄러워 하셔야 하는 거예요. (뭔가 깨달았다는 듯) 아! 제가 잘못 생각 했나 봐요. 할머니는 정신과 의사가 필요했던 거예요. 어쩌면 치매의 증상중 하나 일수도 있었던 건데... 아... 할머니 죄송해요. 제가 미련했어요... 왜 이제야,.. 이런 생각이...
- 노파
- (단호하게) 부끄럽다. 나는. 어느 날, 문득 아침에 일어나 떠오른 첫 대사. ‘나는 모든 게 너무도 부끄럽다’ 그 한 마디를 떠올리자 내 안에 있던 모든 수치심들, 죄책감, 후회, 회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수한 감정들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어. 부끄러웠다.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비로소 부끄러움을 알아 버린 거야. 그 뿐이야.
- 여자
- 할머니, 할머니의 삶은 최고예요. 그런데 대체 뭐가 부끄럽다는 거예요? 할머니의 그 훌륭한 작품들을 생각해 보세요.
- 노파
- 부끄럽다. 그 모든 게. 너는... 넌... 알거야. 내 부끄러움을. 그래서 나는 널 찾았어.
- 남자
- 그거... 였어요...? 선생님? 저를 찾으신 이유가... 절 이렇게 만나신 이유가...
- 여자
- (남자에게) 무슨... 소리예요... 할머니의 부끄러움을 이 남자가 안다구요?
- 노파
- 부끄러움을 알아챈 순간, 나는 그 전처럼 살아갈 수가 없었어. 알겠니? 난 이제 부끄럽지 않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어. 그래서 내 모든 부끄러움을 고백해야만 하는 거야. 여기, 내 모든 부끄러움이 있다. 난 너에게 이것을 주고 싶어. 여기엔, 부끄러움을 아는 내가 있을 거야. (남자에게 원고를 내민다)
- 여자
- 할머니의 손주이자 매니저는 저예요. 마지막 유작 같은 거라면, 저한테 주셔야죠.
- 노파
- 이 원고는 저 아이 거야.
- 여자
- 할머니, 저한텐 보여주지도 않으신 원고잖아요. 거기에 대체 뭐가 적혀있는 거예요? 혹시라도...... 지금까지 할머니가 쌓아온 명성에 조금의 불명예를 남길 수 있는 내용이 적혀 있다면, 제가 허락 못해요. 원고를 제가 먼저 봐야겠어요!
- 노파
- 내 모든 굴복, 그리고 타협, 배신, 계략, 욕망, 욕심, 모든 사기. 도둑질, 부정과 거짓, 뻔뻔함, 위선. 내 팔십 평생의 모든 수치심과 죄책감. 그리고... 부끄러움.
- 여자
- 말도 안 돼...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훌륭하고, 존경받는 삶을 살아오셨어요.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어요.
- 노파
- 난 너무 부끄럽구나. 난 훌륭하지도, 대단하지도, 존경 받을 삶도 살지 못했어. 모든 게 부끄러워. 난 부끄러운 삶을 살았어. 부끄러운 존재야.
- 여자
- 믿을 수 없어요. 왜 할머니가 부끄러워요. 할머니의 삶은 그 자체로... 본보기였고....
- 노파
- 난 저 아이와 잤다.
- 노파
- 내 나이 육십 줄에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저 아이와 난 부정을 저질렀다. 고백하건데, 난 널 갖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어. 네가 원하는 것, 네가 갖지 못한 것. 네가 무엇에 약한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단다. 난 아이의 진심을 이용하고, 부정을 저질렀어. 나의 부끄러움 중 일부에 불과해.
- 여자
- 하지만... (충격을 애써 잠재우며) 할머니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할머니가... 남긴... 그 수많은... 작품들...그것은...
- 노파
- 그것이 가장 부끄러운 짓이지. 내가 쓴 수많은 작품들. 그 작품들의 성공 속에는 수많은 계략들, 거짓말, 동료를 무너뜨리고, 헐뜯는 온갖 술수가 묻어 있겠지. 그리고 누구 것인지도 모른 채, 훔치고 도둑질한 아이디어와 글귀들로 무성할 거야. 가장 부끄러운 건, 그동안 나는 수많은 작품들에서 인간 본연, 그 심연을 찾아 보여주겠다고 떠들어댔어. 하지만, 그 작품들 자체가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쓰레기들이야. 그때의 난 ‘부끄러움을 모르는 작가였으니까.
- 여자
- 그러니까... 그 모든 내용이.... 여기... 적혀 있다는 거죠? (노파와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이 남자랑 잤다는 것 까지?
- 노파
- (남자에게) 네가 정말 날 사랑하게 되리라고 생각 못했다는 건 거짓말일 거야. 난 다 알고 있었어. 난 너의 시절을 이미 오래전에 거쳐 온 어른이었으니까. 하지만, 네 진심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지. 내가 너의 진심과 너의 사랑을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란 걸 그 어느 날 깨달았어. 어쩌면, 그 날 이후, 네가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모든 이들과 연락을 끊고 달아나 버릴 것도 난 이미 알았을지 몰라. 하지만, 그냥 아예 신경 쓰지 않았다. 어른이었으면서.... 널 사랑했다고 할 순 없어. 난 이용한 거야. 너의 젊음, 그리고 너의 순수한 무지, 감정....
- 남자
- 이걸... 왜... 저한테 주시는 거죠? 제가 선생님을... 사랑했기 때문에요?
- 노파
- 너는 부끄러움을 아는 아이이니까.
- 남자
- 이걸 어떻게 하라구요? 선생님의 굴복, 수치, 부정, 굴욕의 고백을 부끄러움을 안다는 부끄러운 그 고백을 저한테 고발하라는 겁니까...?
- 노파
- 넌 자격이 있어. 내 부끄러움을 알릴 자격이, 네 이름으로 모든 걸 고발해줘.
- 여자
- 안 돼요! 허락할 수 없어요! 할머니 인생엔 저도 있어요. 매니저, 그리고. 내가 얼마나 할머니를 존경했고... 얼마만큼...
- 노파
- 얘야, 네가 날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 지 안다. 나에겐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마지막으로 너에게 가르쳐 주고 싶구나. 넌 이제 ‘부끄러움을 아는 법’을 알아야 해. 그리고, 나처럼 부끄럽게 살지 말아야 해. 우린 모두 부끄러움을 느끼며 살아야 한단다.
- 남자
- (노파의 말에 비웃기 시작하더니, 웃음소리가 점점 커진다) 제발 부끄러운 줄 아세요! 선생님! 선생님이 부끄러움을 아신다구요? 저한테 그 부끄러움을 고발해 달라구요? 저한테 부끄러움은 병이에요. 고쳐야 할 병이라구요. 선생님에 대한 저의 사랑을 부끄럽게 만드셨던 날, 그 날 이후로 전 나의 부끄러움을 기억하는 것과 일절 결별했어요. 왜 다시 절 찾아내서, 이렇게 부끄러움을 다시 만나게 하시는 거죠? 전 극복할거예요. 무조건, 부끄러운 순간들과 이별하고, 끊어내면서, 부끄러움을 극복할 거예요. 선생님이 바라시는 건, 부끄러움을 아는 지식인으로써 사람들의 기억에 남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절 뻔뻔하게 또 이용하시려고 하시다니.... 이젠, 이용당하지 않아요. 전 오늘 이후로 다시 사라집니다. 안녕히 계세요. 이 어둠 속에서... 충분히....
- 남자
- 선생님께서 모르시는 게 있어요. 제가 ‘부끄러울 수’ 있는 이유는, 저는 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모른 채 다른 사람을 의식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다른 표현이 있어요... 수치심? 죄책감...?
- 여자
- 할머니, 난 이 원고가 부끄러워요.
- 노파
- (혼자 중얼거린다) 이곳은 부끄러움의 무덤. 이렇게 결국... 부끄러움은 묻히고... 우리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여자, 수줍어하는 남자를 잠시 놀리듯 바라본다. 그러다가 이내 차갑게 말한다.
여자는 남자가 볼을 감추자 그 모습이 귀여워 웃는다,
여자 퇴장한다. 남자는 문을 한 번 더 바라본다. 그리고 나갈지 말지 고민해 본다. 남자가 나가려고 하는 순간. 여자가 휠체어를 밀고 들어온다. 휠체어에 노파가 앉아있는데 형상을 알아보기 힘들다. 담요와 온갖 것들로 전신을 드러내지 않고 가리고 있다. 남자는 노파와 여자가 등장하자, 다시 어쩔 줄 모르고 수줍어 하다가 노파의 모습을 보고 놀란다.
남자는 천천히 노파의 얼굴에 덮여있던 천을 벗겨낸다.
(사이)
노파의 대답에 남자가 주저앉는다. 여자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당황한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원고를 빼앗으려 하자, 노파가 단호하게 말한다.
남자 심장을 움켜쥐고, 수치심에 어쩔 줄을 모른다. 여자는 충격에 남자와 노파를 번갈아 바라본다.
남자, 심장을 움켜쥐고, 얼굴이 달아올라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그의 부끄러움은 극에 달한다.
남자는 원고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밟고 지나간다. 노파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으로 얼굴을 다시 덮어준다. 그리고 나가려다가 뒤 돌아 조심스럽게 한 마디 던진다.
남자 고개를 한번 갸우뚱하고 자리를 떠난다. 여자는 남자가 나가는 모습을 눈으로 쫓는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원고를 집어 든다.
여자 원고를 집어 들고 갈기갈기 찢는다
끝.
- 호들갑 작가소개
- 적어도 진심은 언제나 따뜻하다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