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진팀
이선연
96호
201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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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들이 얽혀있는 지하벙커 안 벽면이 온통 기판으로 되어 있어 컴퓨터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조심스레 벙커 안으로 들어오는 두 인간 우주복을 입은 듯 단단히 무장한 그들 답답한지 오공이일 얼굴을 다 가린 두툼한 마스크를 벗는다
등장인물
오공이일(늙은청년)
삼공이일(아주머니)
기계들이 얽혀있는 지하벙커 안
벽면이 온통 기판으로 되어 있어
컴퓨터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조심스레 벙커 안으로 들어오는 두 인간
우주복을 입은 듯 단단히 무장한 그들
답답한지 오공이일 얼굴을 다 가린 두툼한 마스크를 벗는다
- 삼공이일
- (눈짓으로) ‘야 미쳤어?’
- 오공이일
- 숨 막혀 죽겠어요.
- 삼공이일
- (마스크 벗으며) 그렇다고 함부로 마스크를 벗어?
- 오공이일
- 어디길래 이렇게 숨이 막히는 거죠?
- 삼공이일
- 야 오공이일. 지금 선배 말 무시하는 거야?
- 오공이일
- 아주머니, 아니 선배님. 암튼 여길 청소하는 거잖아요. 근데 이게 말이 되요?
- 삼공이일
- 뭐가 문젠데.
- 오공이일
- 아니, (미니 빗자루와 미니 손전등처럼 생긴 청소 흡입기를 보여주며) 이걸로 어떻게 여길 치우란 거죠?
- 삼공이일
- 보면 몰라? 먼지를 제거하는 거니까 우린 먼지를 잘 치우고 가면 돼.
- 오공이일
- 여기 이 건물 컴퓨터실인 거죠?
- 삼공이일
- 그래. 우리나라 최고기업 최고건물 머리통 닦아주는 거다. 영광으로 알아.
- 오공이일
- 암요. 대기업 슈퍼컴퓨터 청소인데 최고네요.
- 삼공이일
- 그래야 이런 건물 안으로 들어와 보기라도 하는 거지. 얌마. 나는 저기 청와대도 들어가 본 사람이야. 알아?
- 오공이일
- 예예. 제 주제에 이런 대기업에 어떻게 발을 붙이겠습니까. 그나마 청소업체에라도 취직 되어서 황송하게 들어와 봤네요.
- 삼공이일
- 그만 닥치고 저기부터 먼지를 제거해. 얼른.
- 오공이일
- (청소하며) 제가 그래도요. 공부는 잘했거든요? 대학도 잘나왔는데 순수과학 전공이라서요. 열심히 배워서 남은 게 대출이자밖에 없네요.
- 삼공이일
- 훌륭하네.
- 오공이일
- 청소일 자체를 무시하는 건 아니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냥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어서...
- 삼공이일
- 야. 너 땜에 더 숨차거든? 그만 좀 떠들어. 들어올 때부터 계속 중얼중얼 쫑알쫑알... 불알달린 놈이 거참 디게 시끄럽네.
- 오공이일
- 여긴 왜 이렇게 산소가 부족한 거지?
- 삼공이일
- 산소가 어쩌구 저쩌구 뭐 그렇게 아는 척이야?
- 오공이일
- 아는 척이 아니라 아니까 질문하는 거죠. 아는 만큼 궁금하게 되고 궁금한 만큼 알게 되고 또 그 아는 만큼의 질문을 하는 거예요. 살아가는 건 끝없는 질문의 연속이니까요.
- 삼공이일
- 내가 제철에 애를 낳았으면 너만한 자식이 있었을 텐데. 너처럼 취직 못해 헛소리나 지껄이는 애들을 보면 자식 안 낳은 게 다행이지.
- 오공이일
- 좋으시겠네요. 자식도 없으니 남편분이랑 알콩달콩 사시겠네요.
- 삼공이일
- 없어. 애 못낳아 소박맞았거든.
- 오공이일
- 예에?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요.
- 삼공이일
- 나 살던 시절엔 그랬어.
- 오공이일
- 지금은 안 사나요 뭐... 저희 아버지도 혼자신데 잘 지내세요. 저 열 살 때 어머니 돌아가시고 저 하나만 보고 키우셨거든요. 그런 아들인데... 지금 여기서 컴퓨터 머리통 먼지를 떼고 있다니.
- 삼공이일
- 야. 오공일.
- 오공이일
- 예. 선배님.
- 삼공이일
- 너 내가 누구야.
- 오공이일
- 삼공일 선배님이시죠.
- 삼공이일
- 정확히는 내가 삼공이일이고 너는 오공이일이거든? 너랑 나 사이에 천의 자리 숫자가 무려 3이랑 5야. 신세한탄만 하다가 먼지처럼 사라지는 너 같은 놈이 한 둘이었게? 정신 똑바로 차려. 여기 예민한 곳이니까 일이나 똑바로 하라고.
- 오공이일
- 조심할 게 뭐 있나요. 기껏 이 먼지들을 떼고 있잖아요.
- 삼공이일
- 너처럼 주둥이만 나불대는 녀석들이 꼭 사고 치더라.
- 오공이일
- 맞아요. 저는 입만 살았어요. 아버지 말대로 공부 말고 기술을 익혔어야 했는데. 아버지 몰래 진 빚이 너무 많거든요. 죽기 전에 다 갚을 수 있을까요. 차라리 세상에 전쟁이 나버리거나 대출받은 대박은행이 폭발해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
- 삼공이일
- 야. 죽을래? 내가 그 은행에 저축해놓은 돈이 얼만데.
- 오공이일
- 저희 아버지가 종로에서 시계수리공이시거든요. 거의 50년 가까이 하셔서 예전에 티비에 명품장인에도 나왔었어요. (손목시계 보이며) 이게 저 대학 입학 했을 때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거거든요? 부품들 하나하나, 이거 줄까지 스위스제 최고만 모아서 만들어주신 거예요. 장난 아니죠?
- 삼공이일
- 그래. 예쁘네. 이제 일 좀 하자 배짱아.
- 오공이일
- 이게 또 강화유리거든요. 지금 십년도 훨씬 넘게 찼는데 기스도 거의 없어요. 보실래요?
- 삼공이일
- 야 오공일!
- 삼공이일
- 뭐야. 오공일, 너 뭐한 거야.
- 오공이일
- 대박.... 세상에...!
- 삼공이일
- 너, 이 새끼.
- 오공이일
- 봤어요. 선배님? 봤어요?
- 삼공이일
- 됐고, 호출 떴다. 괜히 여기 더 있으면 우리가 뒤집어쓰니까 빨리 나가야 돼. 얼른!
- 오공이일
- 지금 일어난 이 현상이 뭔 줄 아세요? 적은 산소지만 제 몸에서 일어난 작은 바람과 이 시계의 작은 충돌적 점화가 작용해서 번개가 일어난 거예요. 이 공중에 있는 작은 먼지들이 불꽃을 옮기고 옮겨서 저 컴퓨터들을 해롱거리게 만든 거라구요!
- 삼공이일
- 밖에서도 그렇게 떠들어대라. 아버지 앞에서 쇠고랑 차고 싶어?
- 오공이일
- 아뇨! 절대! 제가 여기서 컴퓨터를 박살내고 나가도 우리는 법적 책임이 없을 걸요? 청소부가 왜? 뭘 했다고? 흐흐흐!
- 삼공이일
- 미친놈. 정신 나갔냐?
- 오공이일
- 재밌지 않아요? 세상의 미세먼지들! 계속 쌓여가는 먼지들이 번개를 만들어 내는 거예요. 비누폭탄이 아니라 먼지폭탄의 시대라니! 내가 먼지폭탄을 만든 거야. 내가!
- 삼공이일
- 빨리 나가자.
- 오공이일
- 잠깐만요. 이 기업이 노조도 없고 이번에 정치 스캔들 일으킨 그 대단한 기업 아닌가요? 저희도 여기서 사고 한 번 치고 나가요 네?
- 삼공이일
-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알아? 아무리 지랄을 해도 하늘이 정하는 게 있어. 세상에 먼지가 쌓이면 반드시 비가 내리기 마련이라고.
- 오공이일
- 왜... 왜 계속...
- 삼공이일
- 난 이제 몰라. 나오든 말든 이젠 니가 선택해.
- 오공이일
- 작은 먼지들이 모이고 바람이 불면 언젠가... 번개가 내린다.
오공이일이 장난치듯 청소등으로 시계를 내리치자
번쩍, 스파크가 튄다
반응하는 기계들
곧 삼공이일에게 무전이 온다
무전을 받고 난감해하는 삼공이일
오공이일 이상한 동작을 행하면서 쌓여있는 먼지를 일으킨다
왈츠음악에 맞춰 흔들거리는 듯
오공이일 다시 점화를 일으키려 하는데
움직이는 오공이일의 몸에 커다란 분무기를 뿌리는 삼공이일
분무기 뚜껑을 열어 아예 물을 오공이일 몸에 쏟아버린다
퇴장하는 삼공이일
컴퓨터의 엔진음 속에 갇힌 오공이일
번개처럼 번쩍
꺼지는 컴퓨터들
암전.
- 호들갑 작가소개
- 안녕하세요.
저를 소개하는 이 빈종이에 대한 막막함까지 더하여, 늘 어떤 것에 대한 막막함을 두고 글짓기를 시작한 이선연입니다. 앞으로 이런 저런 구경을 하면서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에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