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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김현정
99호 2016.09.01
흰색 저고리, 까만 치마 차림으로 덩그러니 앉아 있는 소녀, 소녀의 조금 멀리 앞에 국화 한 다발이 놓여 있고 그보다 가까이 반쯤 빈 소주병과 잔 하나가 놓여 있다. 잔을 채운 후, 술잔을 내민다.

흰색 저고리, 까만 치마 차림으로 덩그러니 앉아 있는 소녀, 소녀의 조금 멀리 앞에 국화 한 다발이 놓여 있고 그보다 가까이 반쯤 빈 소주병과 잔 하나가 놓여 있다.

잔을 채운 후, 술잔을 내민다.

소녀
인자 내 차례인가? 나가 이렇게 깜빡 깜빡 한다니께. 이게 다 울 엄니 때문이여. 풀뿌리 안 뽑았다고 쥐어박아, 동생들 안 챙긴다고 쥐어박아, 허구 헌 날 쥐어 박으니께 머리가 안나빠지고 베겨. 글씨, 기집이 노래한다고도 쥐어박았다니께. 나가 원래 꿈이 가수였어. 함 들어볼란가? 내 기똥차게 불러 보꾸마이.

소주병을 마이크 삼아 노래를 시작한다.

“고사리 대사리 꺽자. 나무 대사리 꺽자. 유자 꽁꽁 재미나 난다. 아장장장 벌이여.
꺽자 꺽자 고사리 대사리 꺽자. 고사리 꺽어 바구니 담고 아 산이나 넘자.
고사리 대사리 꺽자. 나무 대사리 꺽자. 유자 꽁꽁 재미나 난다. 아장장장 벌이여.
꺽자 꺽자 고사리 대사리 꺽자. 수양산 고사리 꺽어다가 우리 아배 반찬하세.“

소녀
어뗘? 나가 요로코롬 노래를 부르면 이불집 큰아들도 이쁘다 이쁘다며 껌뻑 죽었다니께. 그 오라버니가 나한테 참 잘했지. 그 오빠와의 야그도 함 들려줄까?
그란디 자네 이 야그 듣다가 심장 콩닥콩닥 거려서 다시 깨어나거나 그러지 말어. 연약한 나가 그 꼴 보면 심장 쪼그라들어 바로 황천길 갈지도 모르니께.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겄네 그려.
들어는 봤는가? 백아 마을의 땅꽁 신, 김덕봉! 모르제? 울 아부이여. 울 아부이는 요 막대기 깍는 것부터가 달랐어. 나가 걸음마를 땔 때부터 아부이가 산에서 구해온 실한 간지때기를 가지고 어찌 깍으면 되는지 알려주시는겨. 그라믄 나가 고 재주를 전수 받아 아부이 옆에서 밤새 막대기를 가는 겨. 요래 요래, 요래 요래. 요 막대기를 가지고 나타나면 동네 아덜이 벌벌벌벌 떨어. 요것을 요래 놓고 탁 쳐불면 고거이 옆 동네까지 날아갔다니께. 아따, 허벌나요.
나가 요 자치기로 태평성대를 이루는 나날 속에서 하루는 옆에 옆 동네까정 평정하고 의기양양해서 집에 돌아갔는디, 엄니가 동생들 밥 안 챙겼다고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시는 겨. 그래, 냅다 뛰어 도망을 갔지. 한참을 뛰다 보니께, 엄니가 안 보이더라고. 헐떡거리는 숨을 고르고 있는디, 갑자기 분하고 서러운겨. 그때는 아부이 돌아가시고 언니들도 없었거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개울가에서 엉엉 울고 있는디, 그 위에 사는 이불집 큰아들이 마중 나와 달래주는겨. 따뜻한 감자하나 손에 꼭 쥐어주며. 그래 나가 그 오라버니를 말똥말똥 쳐다보니께, 그 오라버니도 눈을 말똥말똥 뜨고 개울가를 봐야. 오메, 황구가 호박만한 똥을 싸지르고 있어야. 아따, 뭐 그런 걸 본데요? 나는 비위가 약혀. 그래 언능 뒤돌아 요 감자를 먹었지. 살면서 가장 맛난 감자였다니께.
그란디 그 다음 날 부터인가, 이 오라버니가 그렇게 돌을 주어 오는 겨. 그래 나가 이쁘지도 않은 거 뭐하러 자꾸 가져 온데요 하니께, 내일은 더 이쁜 거 골라다 주겠다는 겨. 오메, 환장 하겠네, 나가 암만 꾸사리를 줘도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다가만 가. 그란디 어느 날부터 안 와, 뭐가 섭섭했는지.
나가 그 돌맹이 뒤뜰에 고이 쌓은거 보여주려고 해질 녘 쯤 동네 어귀를 한참을 내다보고 있으니께, 어느새 기다리는 오라버니는 안 오고 엄니가 눈앞에서 꿀밤을.
“이 가이내가 동생들 안보고 뭐하냐, 시방”
아따, 나가 이집안 부엌대기여. 왜 언니들은 죄다 시집보내고 나만 이리 부려먹는데.
울 엄니가 날 그렇게 구박하고 먹을 것 좀 생기면 죄다 동생들만 줘서 참말로 미웠는데도 밤다마 끙끙 앓는 소리를 들으면 그렇게 마음이 아파. 그래 갈고 있던 막대기를 내던지고 안방으로 가서 엄니 팔을 주물렀지. 그믄 엄니가 내손을 툭툭 쓸며 ‘아이고, 시원타’ 하시는 겨.

사이

소녀
그러코롬 종일 남의 밭에 가서 허리 한 번 못 펴고 일해도 먹을 거라고는 풀뿌리 밖에 없었어. 그란디 이장님이 와서는 돈 많이 벌 수 있게 해준데. 일본 순사 따라가면 식구들 배불리 먹일 수 있다고. 그래서 갔지. 어던지도 모르고.
8년을 짐승만도 못한 취급 받으며 가족도 고향도 잃고. 내 나이 열네 살에 청춘을 송두리째 빼앗길지도 몰랐지. 나가 장교님, 장교님 엄니가 보고 싶어요. 집에 가고 싶어라 하며 몇 날 며칠을 울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어. 매질만 더 했지. 이대로 확 죽어버리자 싶다가도, 안되지 안 되야 울 엄니 얼굴 꼭 다시 봐야지. 그 지옥에서 살아남으려 수천 번을 되 내였어. 나는 짐승이다, 사람이 아니다, 나는 달구새끼고 개 고양이다, 나는 흙이고 돌맹이고 나뭇가지다. 암만 그리 해도 아침이면 숨이 턱턱 막히고 이 몸뚱이를 죄 쥐어뜯고 싶어. 그래도 버텼어. 하루가 어찌 가는지도 모르는 곳에서 아득바득 견디고 목숨 줄 수백 번 부여잡으며 엄니한테 돌아갔는데 아무도 없었어. 그래, 반겨주는 이 하나 없었어.

소주 한 잔을 비운다.

소녀
쉬려는 사람한테 내가 괜한 말 했네 그려. 거긴 춥진 않은가? 잠은 편히 자는 겨? 여선 오밤중에 벌떡벌떡 일어나서 한참을 사시나무 떨 듯 그랬잖아. 지나는 군인만 봐도 헛구역질을 해대고... 조국은 해방 된지 70년이 지났는데 우리는 여전히 그 시절 그 고통에서 못 벗어나네. 아니, 나는 날이 갈수록 더욱 생생해지는 것 같아. 잊어야지. 잊어야 나가 살지 싶은데 그라믄 참말로 세상이 우리를 잊을 거 같아. 그래, 나는 더 또렷이 기억해야지.
자네는 그만 잊어. 자네 몸에 있던 수많은 상처도 한 줌 재 되어 사라졌으니께, 다 잊고 훨훨 날아다니며 자유롭게 지내. 나도 자네 따라 가고 싶은데 아직은 때가 아닌 가봐.
난 사실 아직도 누가 내 이야기 같다가 수근 될까봐 무서워. 그래도 어쩌겠어. 다시는 이런 몹쓸 일 생기지 않게 아무도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어? 내 명 다하는 그날 까지 더 꼿꼿이 버티다 갈 테니까, 자네 몫까지 싸울 테니까 아무 걱정 말게

마지막 한 잔을 마신 후, 느린 몸짓으로 소주병과 잔을 정리한다.

소녀
날이 많이 풀렸어. 지천에 개나리, 진달래도 피고.
바람 살랑살랑 부네. 마음 간지럽게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운다. 어느 새 허리가 구부러진 할머니의 모습으로 앞의 어딘가, 누군가를 향해 어여 들어가라는 손짓을 한 후 천천히 뒤돌아 걷는다.

호들갑 작가소개
10년 동안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연극판에 기웃거리는 사람.
빠르고 복잡하게 흘러가는 세상을 내 시선으로 열심히 훑어가며 쉬이 쓸 줄 모르는 글과 연기로 꾸역꾸역 풀어내는, 있는 힘껏 연극판에 붙어 있고 싶은 사람.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