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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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여자
여중생
장소
어느 포장마차의 구석진 테이블
시간
늦은 밤
여자가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다. 여자의 맞은 편 자리에 빈 소주잔이 놓여 있고, 테이블 위에 안주로 시킨 해물파전과 소주병 두 개가 보인다. 이미 여자는 취했고, 작은 사진을 보고 있다.
여자가 소주잔을 들이키면, 여중생이 등장한다. 여자가 그런 여중생을 발견한다. 사진을 주머니에 넣는다.
- 여자
- 왔네. 어. 교복, 교복 입었구나.
- 여자
- 예쁘다. 여기 앉아.
- 여중생
- 벌써 많이 마셨네.
- 여자
- 이 정도 가지고.
- 여중생
- 엄마는 볼 때마다 술만 마셔.
- 여자
- 너도 한잔 할래?
- 여자
- 이제 교복 입을 나이구나. 그래. 14살이면 중학교 갓 입학할 나이.
- 여중생
- 그렇지.
- 여자
- 학교는 재밌니?
- 여중생
- 재미없어. 아무것도 안 느껴져.
- 여자
- 그렇구나.
- 여자
- 작년에는 여기서 김치전 시켰잖아 우리. 그건 되게 맛없었는데. 해물파전은 좀 괜찮다. 작년에도 이걸로 먹을걸. (여중생의 입에 파전을 넣어주며) 어때, 괜찮지?
- 여중생
- 난 잘 모르겠는데.
- 여자
- 아냐. 이게 더 맛있어. 먹어.
- 여중생
- 파가 왜 이렇게 많아.
- 여자
- 파전이니까, 기지배야. 골라내지 말고 좀 먹어.
- 여중생
- 왜 이렇게 많이 마셔.
- 여자
- 이런 날 아니면, 언제 마셔. 오늘이니까 마시는 거지. 너 만나니까.
- 여중생
- 딸 앞에서 참.
- 여자
- 미안해. 오늘 아니고서는 이렇게 술 마실 날이 많이 없어. 엄마가 술 마시면 너무 걱정하거든.
- 여중생
- 누가. 새 아빠가?
- 여자
- 다. 네 새 아빠도, 엄마네 엄마도.
- 여중생
- 치. 나만 빼고 가족이지.
- 여자
- ….
- 여자
- 네 아빠는 지금 뭐할까.
- 여중생
- 그러게.
- 여자
- 그 사람, 징역 4년이었어. 10년 전부터 이미 떳떳하게 잘 살고 있을 거란 말이지. 그 자식 나를 기억도 못하고 살지도 몰라.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를 거야.
- 여중생
- 불공평해. 억울하잖아.
- 여자
- 너는 앞으로도 매년 이 날짜에 나를 찾아오겠지? 3년 뒤에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모습으로, 또 나중에는 20살이 돼서 나랑 소주도 같이 먹겠지? 이렇게 우리의 추억이 쌓이는 동안 그 자식은 뭐하려나.
- 여중생
- 그, 생물학적 아버지는 우리 모임에 한 번도 안 나타날까?
- 여자
- 아버지면 아버지지, 생물학적 아버지일건 뭐야.
- 여중생
- 아빠는 나를 지켜주고, 사랑해줘야 할 사람이잖아. 그 사람은 아니고.
- 여자
- 그럼 나도 생물학적 어머니니?
- 여중생
- ….
- 여자
- 그 사람은 나타나면 안 되지. 내 눈에 띄면 죽여버릴 거야. 그 새끼 죽이고 나도 감옥 갈 거야.
- 여중생
- 그렇게 미워?
- 여자
- 그럼, 얼마나 아팠는데. 엄청 무섭고. 나 그때 고작 대학생이었고 그게 첫 경험이었거든? 하필 대머리 아저씨일게 뭐야? 그 사람, 심지어 나만한 딸도 있었어.
- 여중생
- 나쁜 놈.
- 여자
- 어때?
- 여중생
- …음. 잘 모르겠는데. 아무 맛도 안나.
- 여자
- 네가 느껴본 건 뭐야?
- 여중생
- 나도 엄청 아픈 거. 엄청 무섭고.
- 여자
- …많이 아팠어? 많이 무서웠어?
- 여중생
- 따뜻하고 편안한 것도 느껴봤어. 어렴풋이. 그런데 갑자기 뭐가 불쑥 들어와서 나를 잡아당기고 끌어내렸어. 엄청 아프고 엄청 무섭게.
- 여자
- 그 다음에는? 춥진 않았니?
- 여중생
- 그건 모르겠는데.
- 여자
- 의사들이 너를 꺼내서 종이에 싸가지고 냉장고에 넣었어.
- 여중생
- 몰랐네.
- 여자
- 나한테 좋은 일이 생기면 좋겠어. 네가 느껴야 했던 좋은 일들을 내가 뺏어버렸으니까, 나라도 대신 느꼈으면 좋겠어. 네가 못 먹어본 맛있는 음식도 내가 많이 먹고, 좋은 경험, 즐거운 일. 나한테 그런 게 생기면 좋겠어. 이걸 모성애라고 해야 할까, 이기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핑계라고 해야 할까.
- 여중생
- 글쎄. 나는 모르겠어.
- 여자
- 파전 많이 먹어. 시간 얼마 안 남았다. (여중생 입에 파전을 넣어주며) 내년에 또 먹으러 올꺼지?
- 여중생
- 응.
- 여자
- (메뉴판을 보며)우리 다음에는 뭐 시킬까? 감자전? 해물파전 한 번 더 먹을까? 아예 모둠 전을 시킬까.
여자의 말에 여중생이 교복을 자랑하듯 한 바퀴 빙그르 돌아 보인다.
여자가 소주잔이 놓인 맞은편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여중생이 앉는다.
여중생이 교복 블라우스를 잡아 여자 쪽으로 보여준다. 여자가 어깨를 으쓱한다.
여자가 다시 잔을 비운다. 그리고 해물파전을 젓가락으로 찢기 시작한다.
여자가 소주를 한 잔 더 마신다.
여자가 말없이 여중생을 바라보면, 여중생이 머쓱해 여자의 잔에 술을 따라준다.
여자가 여중생의 잔에 소주를 따른다.
여중생이 앞의 소주잔을 들고 벌컥 마신다. 여자가 소주를 삼킨 여중생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여자가 소주를 마신다.
여중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퇴장한다. 여자가 한동안 말없이 메뉴판을 보다가 메뉴판을 내려놓는다. 맞은편의 빈자리를 바라보다 주머니에서 사진을 다시 꺼내 본다. 태아사진이다.
여자가 사진을 여중생이 앉던 맞은편 테이블에 올린다.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소주잔과 자신의 잔에 소주를 따른다. 자기 잔과 여중생의 잔을 순서대로 마신다.
암전.
- 호들갑 작가소개
- 잘할 수 있을지 고민만 많았지만, 조금씩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꾸준하고 즐겁게 이야기하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