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먹고 갈게요
Ctrl + V, 붙여넣기해서 사용하세요
시간
4월의 어느 불타는 금요일, 저녁
장소
대학가 근처 호진과 두섭의 자취방
등장인물
정호진(20세/남/동숭대 문예창작과/두섭의 룸메이트)
양두섭(24세/남/동숭대 실용음악과/호진의 룸메이트)
황여진(27세/여)
김안젤라(24세/여)
무대
남자 둘의 지저분한 자취방. 특히나 더 지저분한 매트리스가 놓여 있고, 그와 대조적으로 깨끗이 정돈된 요가 깔려 있다. 매트리스를 기준으로 뒤편엔 베란다, 오른편엔 주방 있다. 앞쪽에는 네 명 정도 둘러앉을 수 있는 앉은뱅이 상 있다.
4월의 어느 불금, 대학가 근처 호진과 두섭의 자취방. 도어락 번호를 누르고 문이 열리는 소리 난다.
조명 In, 앉은뱅이 상 앞에 앉아 있던 여진은 벌떡 일어나 문 바라보고, 호진은 방에 들어오며 서로 당황한다.
- 호진
- (놀라 경계하며) 누구세요?
- 두섭
- (호진 못 본 채) 아, 라면이 없네. 술도... (호진 발견하고 당황) 웬일로 들어왔냐? 아, 인사해. 이쪽은 여진이라고. 이쁘지? (여진을 안심시키며 다정하게) 왜, 나랑 같이 사는 애. 별로 신경 안 써도 돼.
- 호진
- (한숨) 아, 씨. 이건 또 뭐야.
- 두섭
- (능글맞게) 어디 산다고 했지? 오빠는 원래 부천 살아. 부천 오면 연락해, 오빠가 부천 꽉 잡고 있지, 또.
- 여진
- (과도한 리액션) 와! 정말요? 저도 부천 자주 가는데!
- 두섭
- 크.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나.
- 여진
- 저희 아버지께서 부천에 배움터를 운영하시거든요. 복지관도 있구요.
- 두섭
- (영혼 없이, 빨리 다른 이야기 하고 싶은) 어~ 아버지? 멋있으시네.
- 여진
- (혼자 신난) 그쵸? 아버지 사진 보여드릴까요?
- 두섭
- (관심 없는) 아, 사진까지?
- 두섭
- (사진과 여진 번갈아 보며) 아버지야? (갸우뚱) 너는... 어머니를 닮았나보네.
- 여진
- 아... 물론 피가 섞인 사이는 아니지만, 정말 큰 사랑을 주시는 분이에요.
- 두섭
- (당황) 아, 내가 괜한 말을 했나?
- 여진
- 아니에요. 제가 작년에 힘든 일이 있었는데, 아버지 덕분에 다시 힘을 냈거든요.
- 두섭
- 그거 참 다행이네. (헛기침, 급 화제전환) 아, 부천에 내가 드럼 치던 라이브카페 하나 있는데, 언제 시간되면 같이 가자.
- 여진
- (과도한 리액션, 호진 눈치도 살피며) 드럼이요? 드럼 치는 남자 정말 멋있던데!
- 두섭
- 내가 얘기 안 했나? (주섬주섬 드럼스틱을 찾아 침대에 대고 치는 시늉)
- 호진
- (챙긴 짐을 들고 나가며 혼잣말) 병신. 지랄도 가지가지 한다.
- 여진
- (일어나 호진 잡으며) 가시는 거예요? 같이 차 한 잔해요.
- 호진
- 아, 아뇨.
- 여진
- 그러지 말고 앉아요. 이게 ‘모링가’라는 차인데요, 저희가 직접 재배한...
- 호진
- (가식웃음) 예, 예, 예, 예. (정색하며 두섭 본다) 형, (여진 눈치) 담배 한 대 필래요?
- 두섭
- (손가락질하며 놀리듯 웃음)어, 어허허. 담배? 독실한 크리스천께서 웬일이실까~?
- 호진
- (분노 차오르는데)
- 여진
- 잠시만요. (전화 받으며 베란다로 나가는)
- 두섭
- (기다렸다는 듯 호진에게) 야, 쟤 괜찮지? 얼굴은 좀 빠져도 몸매 죽이지 않냐.
- 호진
- (간신히 화를 누르며 정색) 형. 지금 뭐하는 거예요?
- 두섭
- (어이없다는 듯) 몰라서 물어? 야. 오늘 형이 길거리 헌팅을 당했어. 같이 있자고 했더니 쟤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
- 두섭
- (자랑하듯 호탕하게) 어허허허허. 이게 형이야.
- 호진
- 아니, 형은! 씨...
- 두섭
- (중얼거리듯) 아 근데, 술 말고 차를 마시재, 자꾸. 에피타이저야 뭐야.
- 여진
- (부산스럽게) 어쩌죠. 친구가 ‘벌써’ 도착했다는데... (여지 주며 말꼬리 흐리는)
- 두섭
- (망연자실한 표정) 뭐? 친구? 벌써? (좋은 생각이 난 듯) 그럼 친구도 들어오라고 해!
- 호진
- (머리끝까지 화가 차올라) 형! 좀!!!
- 여진
- 어머, 그래도 될까요? 그럼 저 금방 다녀올게요. (호진과 두섭의 팔 잡으며 미소)
- 호진
- (기다렸단 듯 분노 폭발) 형, 언제까지 그딴 식으로 살 거예요? 저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요?
- 두섭
- 미쳤냐? 이 새끼 빠져가지고. 내가, 어? 널 위해서 말이야, 어? 한 명 더 불렀잖아. (선심쓰듯) 걘 네가 알아서 잘 해봐. (천천히 담배 꺼내 입에 물고 불붙이려 한다)
- 호진
- 지금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맨날 상의도 없이 친구들 데려와서 술 마시고, 밤새 꽥꽥 소리 지르고, 아무데서나 담배피우고. 같이 사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어. 치우는 건 바라지도 않아, 더럽히지나 말아야지.
- 두섭
- (귀에 담배 꽂으며 일어서서, 겁먹었지만 허세)어? 듣자듣자 하니까 말이 짧다? 너 형님한테 그러는 거 아니야. 나니까 봐주지, 어디 군대 가서 그랬다간 호온~나.
- 호진
- 제가 언제 이런 말 한 적 있어요? 하다하다 이제 여자까지 데려와...! (뒤돌며 소심하게) 형 대접 받고 싶으면 나잇값을 하던지.
- 여진
- 저 나간 김에 라면도 사 왔어요!
- 두섭
- (라면박스 바라보며 당황) 아, 라면... 그 라면. 배가 많이 고프셨나 보네.
- 여진
- (호진에게) 어디 가시려는 건 아니죠?
- 안젤라
- (호진 살포시 잡아끌며) 그래요. 라면 많이 사왔는데, 같이 먹어요.
- 두섭
- (안젤라 반갑게 보며) 어, 안녕하세요.
- 안젤라
- (차분히) 네. 안녕하세요. 안젤라라고 해요.
- 두섭
- 아, 성이 안 씨고 이름이 젤라예요? 이름 젤라 독특하다.
- 안젤라
- (흔들리지 않는 온화한 미소) 아뇨. 김 안젤라예요.
- 여진
- (두섭에게, 박스에서 라면 꺼내며) 오빠, 주방은 어디예요? 라면 먹고 싶은데.
- 두섭
- 오빠가 또 라면 하나는 기가 막히게 끓이지. 줘봐!
- 여진
- 안녕하세요. 저는 황여진이라고 해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 호진
- 예... 저는 정호진입니다.
- 여진
- (안젤라 가리키며) 그리고 이쪽은...
- 호진
- (여진의 말 자르고) 안젤라.
- 안젤라
- 어머, 기억하시네요.
- 호진
- (부끄러움을 감추며) 그럼요.
- 여진
- 동숭대생이신 거죠? 무슨 과 다니세요?
- 호진
- 문예창작과요. (시선은 안젤라에게 고정)
- 여진
- 우와, 멋지다. 저희는 신학과 다녀요. 아! 마침 프로젝트로 대학생 종교실태조사를 하고 있는데, 한 번 도와주시겠어요? 아까 크리스천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 호진
- 아... 근데 저는 그런 걸 잘 안 해서.
- 안젤라
- 잠깐이면 돼요. 그냥 가볍게, 지금 다니시는 교회가 어떤지, 성경 공부는 얼마나 하는지. 이런 거 답해주시면 되는 거예요.
- 여진
- (간절히) 맞아요. 어디 유출되는 것도 아니고, 저희 한 번 도와주시는 셈 치고...
- 호진
- 네 그럼,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 두섭
- 뭐야, 뭐야~? 뭐 하는데? (슥 훑어보더니) 으, 난 글자 많은 건 딱 질색이야.
- 여진
- (호진 설문지 흘끔거리며) 어~ 그 교회는 그래요? 홍보? 헌금 종류도 많네요. 어머.
- 안젤라
- 하긴, 요즘 교회들 중에 상업적으로 변해가다 보니 진실성과 순수함을 잃는 곳도 있죠. 참 안타까워요.
- 호진
- 음...저는 뭐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않았는데.
- 안젤라
- 아, 나쁜 뜻은 아니에요. 하지만 의심할 틈도 없이 녹아 있는 생각이란 게, 참 무서운 것이죠.
- 여진
- (호진 설문지 자세히 들여다보며) 활동하시는 건 많은데, 성경공부는 거의 안 하시나 봐요.
- 호진
- 아, 예. 더 해야 되는데.
- 안젤라
- 도와드릴까요? 저희 교회는 성경이 중심이거든요. 같이 올바른 해석을 공부하고, 곧 다가올 미래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준비하죠.
- 호진
- 다가올 미래요?
- 안젤라
- 종말이요. 그 전에 더 많은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두 번째 예수가 이 땅에 오셨거든요! 그것도 바로 한국에요.
- 호진
- (과장되게) 아, 정말요? 저 그 얘기 관심있어요. 더 해주세요.
- 안젤라
- 이건 하나님의 피와 살이에요. 이걸 드시면 누구나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죠.
- 여진
- 바로 그 두 번째 예수가 저희 아버지세요!
- 안젤라
- 지금 마침 금요 기도회가 열리고 있는데 이걸 드시고 같이 가요.
- 호진
- 더 많은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간증해 주시면 믿고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웃음 참으며 밀당하듯) 아직은... 좀 고민이 되는데요.
- 여진
- 네, 지금 새로이 구원받을 분께서 더 많은 간증과 설득을 필요로... 네. 네. 형제님 다섯 분 정도요?
네, 감사합니다! - 호진
- (안젤라에게, 과장되게) 자매님, 제 주위에 참된 성경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많거든요. 형제님들이 여기로 오실 동안 저도 친구들을 데려올게요.
- 안젤라
- (환한 웃음) 아버지께서 정말 기뻐하실 거예요.
- 호진
- 형, 아깐 제가 너무 심했죠?
- 두섭
- 이 새끼, 갑자기 또 왜 이래? (능글맞게 )여자랑 놀더니... 쯧.
- 호진
- 맞아요. 누나들 완전 화끈해요. 또 이런 분위기엔 술이 빠질 수 없잖아요?
- 두섭
- (의외인 듯) 호오... 새끼! (속삭임) 그럼 넌, 먹고 나서 젤라랑 대학로 나들이나 좀 가. 가서 오지 마!
- 두섭
- (갑자기 뒤 돌며) 야, 빨간 걸로 사 와라.
- 두섭
- 내가 신라면은 또 처음 끓여 봐서, 아, 라면이 많이 불었네. (관객에게 불은 라면 보여주는)
(느끼하게) 근데 뭐, 식탁에서 먹는 라면이 중요헌가. 뭣이 중헌디, 지금. - 여진
- (전화 받으며) 여보세요? 네, 잠시만요. (안젤라에게 휴대폰 넘겨주는)
- 안젤라
- 응. 아, 그래? 응. 기다려 봐. (잠시 침묵 후 천천히, 뱀의 말처럼 )여기, 주소가 어떻게 되죠?
- 두섭
- (어리둥절) 주소? 왜, 벌써 야식 시키게? (음흉하게) 으유~ 먼저 ‘라면’부터 좀 먹어야지. 음... 여기가, 혜화역 4번 출구로 나와서 쭉 걸어오면 로터리가 나오거든. 거기서 왼쪽 골목 두 번째...
여진, 함께 당황하며 일어서고. 약간 경계하며 인사한다. 두섭, 주방에서 걸어 나온다.
호진, 화난 표정으로 한숨을 쉬고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구석에서 짐을 주섬주섬 챙긴다.
자기 요에 널브러진 두섭의 양말과 휴지를 짜증스럽게 치운다.
여진, 지갑 꺼내 두섭에게 사진 보여준다.
여진 벨소리 울린다.(차분한 오르간 소리)
두섭의 판타지 속 여진 등장 (무대 뒷벽에 프레임 활용 등 연출), 섹시한 포즈를 취한다.
음향(여진 목소리 녹음) In, “그럼 마침 약속 시간이 떠서, 저 라면 먹고 갈게요.”
호진, 화내려는 순간 여진이 전화 마치고 방 안으로 들어온다.
여진, 현관문으로 퇴장
호진, 성큼성큼 걸어 현관문으로 향한다. 문을 열자 여진이 커다란 라면박스 들고 서 있다.
잠시 서로 당황하지만, 여진 해맑게 라면박스를 밀며 집 안으로 들어오고, 호진 뒷걸음친다.
호진, 여진 뒤에 들어오던 안젤라와 눈 마주치는데 두근거린다. 설렌 나머지 가방 떨어뜨린다.
두섭, 라면 끓이러 주방으로 가고, 여진, 안젤라 앉은뱅이 상 주변에 앉는다.
호진, 안젤라에게 이끌려 못이기는 척 함께 앉는다.
안젤라, 너무 적극적인 여진을 호진 모르게 툭 쳐 자제시키고는 호진 향해 사랑스런 미소.
호진, 설문지를 받아 작성한다. 항목이 이상한 듯 갸웃거릴 때가 있다.
두섭, 라면 물 올린 후, 붙어있는 호진-여진 질투하며 설문지에 관심 보인다.
두섭, 베란다로 나가 담배 피운다. 두섭에게 권하려 설문지 꺼내던 여진, 머쓱해한다.
호진, 이들의 목적을 눈치 채고 충격에 빠지지만, 주방의 두섭을 보곤 이내 좋은 생각이 난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여진, 라면박스를 다시 열고 그 안에서 성경책 몇 권과 포도주스, 빵을 꺼낸다.
안젤라, 여진을 쳐다보며 눈빛 신호. 여진, 고개 끄덕 하더니 전화를 건다.
두섭, 베란다에서 들어오다 라면 끓는 소리 듣고. 급히 주방으로 가 불 줄이고 마무리한다. 호진, 주방으로 가 두섭 옆을 기웃거린다.
호진, 두섭의 비위 맞춰 주는 척하다 돌아서 씩 웃으며, 몰래 아까 떨어뜨렸던 가방 줍는다.
호진, 깜짝 놀라 가방 숨기며 끄덕인다. 두섭이 돌아서자 통쾌한 미소 짓고는 가방 들고 나가버린다.
두섭, 다 끓인 라면 들고 방으로 들어온다. 방에는 여진, 안젤라 나란히 앉아 있다.
두섭, 상에 라면 내려놓고 침대 위에서 능글맞은 포즈 취한다.
엔딩곡 Dim In. 이후 두섭 대사는 작게 깔린다.
서서히 스산한 조명 내려앉고. 여진, 안젤라 사악한 미소 짓고 있다. 암전.
- 호들갑 작가소개
- 작은 점들이 모여 큰 그림이 된다고 믿는다. 나는 말하고 싶은 것이 참 많다. 요리로, 글로, 그림으로, 풍물로, 여행으로, 탈춤으로, 공연으로 나를 담아내려 끊임없이 도전해 왔다. 나는 사람을 끝없이 사랑하지만 끝없이 미워하기도 한다.
나는 지금 서울예술대학교에서 연극을 공부하고 있으며, 미운 사람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어 이 작품을 쓰게 됐다. 또 같이 공연을 올렸던 팀원들과 작품의 대사 작업을 함께하였으니 그들도 숨은 작가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