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제 올리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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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간난, 90세를 넘긴.
세월이 묻어나는 부엌.
간난, 제사상에 올릴 음식을 장만하고 있다.
- 간난
- 어지간히 좀 지범 대슈. 정신 사나워 살 수가 있나? (버럭 화를 내며) 상에 올릴 게 몇 개나 된다고, 부치는 족족 입으로 들어가는 겨? 낼 모레면 나도 제사상 받는다고. 나 아니면 누가 혀? 애미가 있어, 아름이가 있어? (뒤집개로 손등을 찰싹 때리며) 녹두전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내 뼈 갈거든 녹두에 부쳐 드슈.
누군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간난, 정종을 한 잔 따라 마신다.
밴댕이 소갈딱지. ……아름이냐?
일어나서 손녀를 반긴다.
손을 매만지고, 얼굴을 쓰다듬고, 얼싸 안는다.
침침한 눈을 비벼 손녀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먼 길 오느라 고단하지? 니가 안 와도 할미가 가 보려고 했어. 여태 머리도 안 말리고 다니는 겨?
수건을 꺼내온다.
몸을 닦아 준다.
머리를 말려준다.
빗으로 머리를 빗겨준다.
아랫목 이불을 끌어다가 손녀에게 덮어준다.
이불 속 다리를 주물러 준다.
물 먹은 솜이불 마냥…… 무겁구나.
솥에서 쇠고기 국을 퍼 온다.
숟가락을 꽂아 건넨다.
뜨뜻한 게 들어가야 속이 풀리지. ……할미는 진즉 먹었다니께.
간난, 입 안 가득 제사 음식을 구겨 넣는다.
의지와 상관없이 먹여주는 걸 받아먹듯 꾸역꾸역 넣는다.
손녀에게 술병을 내밀려다 스스로 따라 마신다.
(넘치는 술을 입으로 핥아 먹으며) 이 게 효자지. 요놈 없었으면 어찌 버텼나 몰라.
손녀에게도 따라준다.
지랄도 해야 는다잖여. 할미 술 많이 늘었다. 매일 같이 진탕 마셔대도 내일이면 눈이 번쩍 뜨이니, 이게 천벌이 아니고 뭐냐?
술병이 비었다.
술병은 금세 비는디, 하루해는 더디 지고, 질긴 목숨은 쉬 끊어지지 않으니, 할미가 한 잔 더 해야 쓰겄지?
싱크대를 열어 상자에 담긴 정종을 꺼내고 싱크대 문을 닫는다.
뭔가 생각하는 듯, 싱크대 문을 잡고 한참을 있다가, 다시 싱크대 문을 열어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었던 정종 병을 조심스럽게 꺼낸다.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 거린다.
요놈 가까이서 보니께 반갑네. 이게 뭐라고 그렇게 꺼내기 힘들었댜? 우리 아름이 왔으니께 이놈도 마셔보고, 요놈도 마셔보자.
상자를 뜯어 정종을 꺼내 마신다.
싱거운 거. 이 맛대가리 없는 걸 뭔 맛으로 마셨댜.
정종 뚜껑을 닫아, 다시 상자에 넣어둔다.
이건 놔두고 갈 테니께 이따 와서 드슈.
다른 정종 병을 앞으로 끌어온다.
바라본다.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는다.
지지리도 못난 것. 요걸 못 열고 지랄발광을 떨었으니. 아름이가 따라줄래? 옳지 옳지. 콸콸 따러라. 목이 타면 얼매나 타겄냐.
여태 물속에서 갇혀 있는 너도 있는디. 조상님네 인자 제삿밥 못 얻어 잡순다고 원망 말어유. 나도 할 만큼 했잖아유.
간난, 벌떡 일어나더니 휘청거리며 누군가를 따지듯 쫓아간다.
나는 할 만큼 했는디 왜 모르는 척 하는 거유. 가슴에서 천불이 나유. 살려만 달라고 빌고 또 빌었는디, 모진 사람들, 못된 사람들.
에라, 급살을 맞아 뒈질 놈들아. 그 많던 조상님네는 어디로 가고, 저 불쌍한 거 하나 건져 주지 못하는 겨? 아름아, 할미랑 가자. 할미가 데려다 주마.
정종 병에 담긴 걸 단숨에 마신다.
쓰러진다.
눈물이 주루룩 흐른다.
흐미, 뜨뜻한 거…… 그려, 그려야지. 눈이 지절로 감겨야지…… 이제 좀 사는 거 같네. 아름아, 할미 손 꼭 붙들고 있는 겨?……
봄 날, 게으른 송아지가…… 어미 소 품에서…… 코, 잠 들 적에……
- 호들갑 작가소개
- 그대, 늦었다고 툴툴대면서도 여전히 입으로 글 쓰고 있는가.
저 여인을 보아라.
까만 건 글씨요 하얀 건 종이로세, 라던 그녀가 반 년 만에 세종대왕 보시기에 참 좋은 백성이 되었다.
새벽이슬 맞으며, 쓰기 좋게 자른 농사달력 뒷면을 글자로 빼곡히 채운다.
나, 그녀의 손녀로 살아 온 지 마흔 두해.
아뿔싸, 그녀는 여태 노을을 등지고 한글 삼매경에 빠져 있구나.
나도 뒤질세라,
헤어 나오지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