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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생엔

이동경
108호 2017.01.19
등장인물엄마: 30대, 특징 없어 보이는 여성. 딸: 퍼펫 인형. 말을 하는 등 움직일 때는 엄마의 손에 끼워 움직인다. 엄마가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엄마와는 다른 목소리를 낸다. 어린 여자의 목소리이다. 벽면이 검은색, 혹은 녹색 테이프로 테이핑 된 부엌. 냉장고와 가스레인지, 간이 식탁이 있다. 식탁에는 엄마와 ...

등장인물
엄마: 30대, 특징 없어 보이는 여성.
딸: 퍼펫 인형. 말을 하는 등 움직일 때는 엄마의 손에 끼워 움직인다. 엄마가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엄마와는 다른 목소리를 낸다. 어린 여자의 목소리이다.


벽면이 검은색, 혹은 녹색 테이프로 테이핑 된 부엌. 냉장고와 가스레인지, 간이 식탁이 있다. 식탁에는 엄마와 딸(인형)이 축 늘어져 앉아있다. 멍하다. 문득, 엄마가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연다.

엄마
소시지 먹을래, 계란 후라이 먹을래?
딸
(심사숙고 한 끝에 말한다) 소시지.
엄마
(심사숙고 한다) 계란 먹자. (계란을 꺼낸다)
딸
계란은 비려요. 소시지가 맛있어요.
엄마
계란이 더 좋은 음식이야.
딸
난 지금 기다란 소시지에 케찹을 잔뜩 찍어 아작아작 깨물어 먹고 싶단 말예요.
엄마
이왕이면 건강해야지.
딸
다음 생에는 꼭 소시지를 잔뜩 먹고 말거야.
엄마
(계란을 꺼내와 요리한다.) 다 너를 위해서야.
딸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버리는 것 같다니까.
엄마
아니야. (딸을 안아주며) 엄마 안에는 우리 미현이로 가득 차 있는 걸. 우리 딸은 엄마가 살아 숨 쉬는 이유야.
딸
너무 많은 건, 없는 것과도 같대요.
엄마
공기처럼 말이니? 공기가 없으면 사람은 죽잖아. (사이) 엄마는 미현이 없으면 죽어.
딸
아니야. 잘 살 거야. 엄마는 항상 좋은 선택을 해 왔으니까요. 엄마가 없었으면 나는 여전히 망설였을 거예요.

엄마, 갑자기 끌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뒤집개를 내팽개친다.

엄마
이 꼴을 보고도? 이 꼴을 말이야! 그래ㅡ 열심히 공부했고 열심히 일했어. 평생 돈 한 푼 허투루 쓰지 않았어. 악착같이 벌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이천에 사십짜리 이 옥탑에 들어온거야. 손수 구멍 난 지붕을 고쳐가며, 화분에 꽃도 심고. 그렇게 비가 세지 않는 집에서 우리 둘이 오손도손 살기 위해. 그런데, 왜 이렇게 힘이 드니. 밖에서 일하고 들어오면 하나밖에 없는 딸년이 엄말 기쁘게 해주면 안 돼? 이건 뭐, 사람구실 제대로 하길 하나. 마구 비뚤어져서는, 따박따박 말대꾸에, 밥도 제때 안 먹어 말라 비틀어져만 가고, 집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다구. 널 돌보느라 엄마도 발이 묶였어. 우리 꼴 좀 봐!
딸
그래도 내가 엄마 곁에 남아서 행복하지 않아요? 나는 결국 엄마를 떠나지 않았어요...
엄마
너는 엄마한테 잘 해야지.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네가 걷는 길 앞에 돌이 있을 때면 걸려 넘어지기 전에 네 다리를 붙잡아 구했지!
딸
엄마. 그건 사랑이에요?
엄마
그럼! 내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이란다. 그리곤 그 못된 돌이 있던 길을 피하는 방법을 가르쳤잖니. 널 사랑하니까!
딸
난 배우지 못했는걸요. (마치 천식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콜록댄다) 숨이 막힐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딸이 냉장고로 가 소시지를 꺼낸다. 유통기한을 보는 듯 소시지를 살핀다.

딸
오늘까지 먹어야 해요. (후라이펜에 소시지를 굽기 시작하는.)
딸
엄마가 소시지를 좋아한다는 거 알아요. 부끄러워하지 말아요. 그게 무슨 죄예요.
엄마
혹시라도, 혹시라도 네가 창피할까봐...
딸
엄만 너무 내 걱정이 많아. 이젠 조금 덜 때도 됐는데.
엄마
딸래미 있어봐라, 그렇게 되나.
딸
나 닮은 딸은 어떤 애일까? 궁금하다.
엄마
다음 생에는 내가 네 딸로 태어날래.
딸
음. 잘 키울 수 있을까요?
엄마
잘 키우는 게 뭘까...
딸
글쎄요. 엄마는 열심히 키웠어요. (사이) 그 때, 엄마, 엄마도 많이 놀랐죠? 그런 일들이 일어났을 때, 나도 그렇지만 엄마도 너무 어렸어요. 그 돌멩이는 아주 크고- 땅 속 아주 깊이 박혀있던 거였어요.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누구도 모를 만큼 오래된 거예요. 내 다리를 붙잡은 엄마 덕에 피했지만 곧바로 다른 모서리에 부딪혀 넘어졌어요. 그 때, 나는 정체를 알아봤어요. 일전에 엄마가 피하라고 했던 그 돌이었어요. 그래요, 엄마는 파내야 했던 것 같아요. 그 뒤로도 몇 번씩이나 마주쳤어요. 나는 똑똑히 기억해요. 매번 걸려 넘어질 때마다 앞니가 모두 박살났거든요. 내 앞니는 그 뒤로도 몇 번씩 새로 났지만, 점점 못된 모습으로 나고 말았지요. 이젠 더 이상 나지 않지만요. 의사를 찾아가는 게 좋았을텐데. 다 지난 일이 되었네요.
엄마
다음 생에는 쭉 포장된 길만 걸어. 모난 곳도 없고 어디에도 걸려 넘어지지 않을 곳에.

소시지와 계란후라이를 접시에 담아 케찹을 가득 뿌린다. 식탁으로 들고 와 엄마와 함께 먹기 시작한다. 머뭇거리다가 식사를 시작하는 엄마. 기다란 소시지에 묻은 케찹을 핥아먹고 쪽쪽 빨아먹는다.

딸
엄마, 어때요? 저는 너무 맛있어요. 소시지가 아작 아작 씹혀요. 계란 후라이도 나쁘지 않네요.
엄마
맛있어. 정말. (사이) 말 걸어줘서 고마워.
딸
오랜만에 엄마와 얘기하니 참 좋네요.

딸, 설거지통에 빈 그릇을 넣고 번개탄을 꺼내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는 불을 켠다. 딸 인형은 제자리로 돌아가고, 긴장한 듯 웅크리고 앉아있는 엄마. 시간이 흐른다.

딸
(사이) 엄마, 생각해봤는데, 우리 죽지 말아요.
엄마
(울먹이다) 사실 엄마도 돌 피하는 법 같은 거, 못 배웠어.
딸
'돌을 파는 여인들의 모임' 어때요? 돌파모. 제가 넘어지거든 엄마가 꼭 파내주세요. 너무 큰 건 다른 언니들이랑 같이 파내요. 다음 생으로 미루지 말아요.
엄마
그런 게 될까?
딸
말을 꺼내 봐요. 모두들 누군가가 말의 씨앗을 심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엄마
누구?
딸
무릎이 까지고 앞니가 나간 모든 친구들이요. (사이) 그리고 엄마, 당신도.
엄마
나... 그 말을 기다렸던 것 같아.

벽의 테이프를 뜯어내기 시작하는 엄마. 창이 보인다. 햇빛이 들어온다. 창을 여는 엄마.

엄마
내가 왜 죽어야 돼.
딸
살아요, 엄마.

햇빛이 눈부신 듯 눈을 찡그리지만 바깥구경을, 햇살 구경을 멈추지 못하는 엄마. 막.

호들갑 작가소개
페미니스트를 지향합니다. 대안가족을 꾸리는 중입니다. 얘기 나누는 거 좋아합니다. 알맞게 노동하고 적절히 벌어 잘 지내고 싶습니다. 매일 덜 두려워하려 노력합니다(만, 어려워요). 그리고 여전히 글쓰고 있어요.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