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설계소
현예솔
114호
2017.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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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은 ‘주인공’과 ‘천사’로, 한 명이 가면을 이용해 1인 2역으로 연기한다.배경은 사후세계. 주인공은 짐가방을 들고 들어와 관객에게 말을 건다.주인공: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와, 여기 영혼들이 많이 계시네요. 다들 못 보던 영혼들인데 신입이신가 봐요. 사후세계 구경은 좀 하셨어요? 아직 많이 좀 낯설죠?.....
등장인물은 ‘주인공’과 ‘천사’로, 한 명이 가면을 이용해 1인 2역으로 연기한다.
배경은 사후세계. 주인공은 짐가방을 들고 들어와 관객에게 말을 건다.
- 주인공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와, 여기 영혼들이 많이 계시네요. 다들 못 보던 영혼들인데 신입이신가 봐요. 사후세계 구경은 좀 하셨어요? 아직 많이 좀 낯설죠? 근데 여기서 뭐 해요? 여기서 뭐 재밌는 거 해요? 언제 시작하는데요? (관객의 답변을 기다리다가) 그럼 기다리기도 심심하고, 제가 여기서 제일 오래 있었던 것 같으니까, 신입 영혼들이 사후세계에서 알아두면 좋은 팁들을 알려드릴게요. 여기가 어디라구요? 여긴, 사후세계예요. 우린 지금 다 죽어있는 거예요. 아시겠죠? 여기서 사는 것도 이승이랑 많이 다르진 않은데요, 이승에선 누구나 언젠가 죽듯이 사후세계에선 환생을 해야 돼요. 그래서 때가 되면 집으로 이런 편지가 오는데요. (종이를 꺼낸다) “환생통지서. 귀하는 환생 대상자로, 기한 내에 환생설계소를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정당한 사유 없이 방문하지 않을 경우, 강제 추방되어 영원히 구천을 떠돌게 될 예정입니다.” 무시무시하죠? 전 이걸 받았을 때, 너무 두근거렸어요. 전 꼭 한 번 멋지게 다시 살아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신나게 설계소로 갔죠. 거기 가면, 이런 상담원이 있어요. (천사가면을 쓴다. 상냥한 음성으로) “어서 오십시오. 오늘 귀하의 환생설계를 도와드릴 상담원, 김천사입니다~” (가면을 치우고)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가면을 하나 준비했어요. 얘가 이제 저희 내세 설계하는 걸 도와주는데요, (역할에 따라 가면을 썼다가 벗었다가를 반복한다)
- 천사
- 상담에 앞서 몇 가지 질문 드리겠습니다. 혹시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습니까?
- 주인공
- 여기 나라를 구해보신 분 계세요? 전 아니었어요.
- 천사
- 그럼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 위대한 발명을 하셨습니까?
- 주인공
- 아니오.
- 천사
- 그럼 평생을 어려운 이들을 위해 헌신하셨습니까?
- 주인공
- ...아니오.
- 천사
- 전생에 딱히 이룬 것도, 지은 죄도 없으시네요. 환생 대상은 ‘인간’, 등급은 ‘D’입니다.
- 주인공
- (D라고 쓰인 이름표를 목에 걸며) 어쨌든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긴 하나 봐요. 이제 본격적인 설계가 시작돼요.
- 천사
-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무대 중앙에 테이블과 짐가방을 세팅한다) 이제 여기 있는 옵션 중에서 선택하시면 되는데요, 단 시간제한은 9분입니다.
- 주인공
- 9분?? 9분은 너무 짧잖아요??
- 천사
- (9분짜리 타이머를 세팅하며) 대기자가 많아서요. 이 와중에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마음껏 고르세요, 9분 안에.
- 주인공
- 시간은 촉박한데,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 보통 뭐부터 고르냐고 물어봤더니,
- 천사
- (껍데기에 성별이 표시된 계란판을 보여주며) 성별부터 많이들 선택하십니다.
- 주인공
-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소품을 좀 준비했어요. 다음엔 어떤 성별로 태어나고 싶으세요? 저는 전생부터 이걸로 고민이 많았는데, 아직도 못 골랐어요. 근데 시간이 없으니까 다른 걸 먼저 보기로 했죠. 다음은 제 ‘출신’이었는요. (푯말이 꽂힌 작은 화분들을 차례로 살펴보며) “평범한 IQ로 태어남. 근데 주변이 다 천재들뿐이라 평생 바보취급 당함.” “천상의 외모를 가지고 태어남. 근데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육남매 중 첫째로 태어남.”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음. 근데 일찍 고아가 되어 못된 친척들 밑에서 자람.” 와, 이거 진짜 못 고르겠죠? 그래서 혹시 안 고르면 어떻게 되냐고 물어봤더니,
- 천사
- 무조건 하나 랜덤으로 선택되십니다~
- 주인공
- 하... 그래도 선택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좀 더 생각해보기로 했어요. 그 다음은 ‘제가 살게 될 집’이었는데요. “층간소음 쩌는 아파트”, “재래식 화장실 있는 외풍 쩌는 주택”, “곰팡이 쩌는 반지하”. 아니, 여기서도 하나 골라야 돼요?
- 천사
- 안 고르면 무조건 하나 랜덤으로 선택되십니다~
- 주인공
- ...시간은 계속 흐르고, 아직 아무것도 못 골랐고, 정말 미치겠더라구요. 여러분도 이런 상황에 처할 수 있어요. 남 얘기가 아니에요. 그래서 오늘 좋은 물건 하나 가져왔는데요, (종이로 접은 동서남북을 꺼낸다) 바로 “자동선택기”입니다. 여러분을 대신해 명쾌한 해답을 내려주는 기특한 상품입니다. 꼭 환생설계소에서 뿐만이 아니라 아침마다 뭐 입을지, 밥은 뭐 먹을지, 이번 휴가에는 어딜 갈지, 선택의 순간들 많으시죠? 하지만 이거 하나면 선택? 고민? 전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관객에게) 3만원입니다. (사지 않으면) 체험해 보시면 생각 달라지실 거예요. 한 번 다음 생을 골라볼까요? 동서남북 중 하나랑 1부터 10까지 숫자 아무거나 대세요. (동서남북을 움직인 뒤) 와, 다음 생엔 행복한 거북이로 태어나실 거예요! 이건 기념으로 하나 가지시구요, 주변에 소문 좀 많이 내주세요. 다시 설계소로 돌아가서, 저는 ‘동반자’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하트 모양 팝업카드를 살펴보며)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만 멀리 떨어져 살게 됨.” “영화보다 더 로맨틱한 연애를 한 번 하고 평생 혼자 삼.” “그냥 그런 결혼을 하고 늙어죽음.”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만 상대방은 나를 사랑해주지 않음.” ...대체 왜 선택지가 다 이 모양이냐 따졌더니,
- 천사
- 전생에 쌓은 덕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 주인공
- ...전 결국, “그냥 그런 결혼”을 선택했습니다. (장바구니에 담는다) 다음은 ‘인생의 찬스카드’였는데, 제일 괜찮은 코너였어요. (찬스카드들을 꺼내며) “로또 2등 당첨.” “무슨 병에 걸려도 한 번 회복함.” “재난 속에서 한 번 살아남음.” “사랑을 한 번 쟁취함.” 아, 뭐가 좋을까요? 돈도 좋지만, 아프면 병원비로 다 쓸 거고, 건강해도 사고로 죽을지도 모르고, 다 갖췄어도 평생 외롭다면 그것도 별로고. 전 결국 또 못 고르고 다음으로 넘어갔는데요. 이번엔 ‘업적’이었어요. (마트로슈카를 하나씩 열어 살펴본다) “위대한 예술가가 되지만 평생 어렵게 살다가 사후에 인정받음” “누군가를 평생 뒷바라지해서 출세시킴”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지만, 심각한 환경오염을 초래함.” “있는 듯 없는 듯 평범하게 삼.” 죽고 나서 위대해지는 게 좋을까요, 다른 사람이라도 위대하게 만들어볼까요, 돈이라도 많이 벌까요, 아님 전생처럼 또 살까요. 시간은 거의 다 됐는데, 장바구니에 든 건 그냥 그런 결혼뿐이었어요. 다음 생은 정말 잘 살아보고 싶었는데, 제 미래가 그냥 그런 결혼밖에 없다니요. 무슨 성별로 태어날지, 어떤 집안에 태어날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어요. 부? 명예? 사랑? 반지하? 잠깐만요!!! (시간이 아슬아슬하게 남은 타이머로 달려들어 시간을 멈춘다) 저... 나중에 다시 오면 안 될까요...?
...결국 저는 엄청난 벌금을 물고 도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돈 벌고 있어요. (다시 동서남북을 꺼내든다) 여러분은 저처럼 되지 마시고 이거 하나씩 장만하세요. 머리 아픈 결정을 명쾌하게 대신 내려줍니다. 3만 원입니다. 3만 원입니다... 알아요, 저도. 3만 원 말도 안 되는 거. (짐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얼마 못 벌었어요.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계속, 계속 미루기만 하고... 안 사실 거죠? 저 갈게요. - 천사
- 네,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출하신 벌금은 다음 생에서 정산 되실 거구요. 이제 이 원서만 접수하면 되는데요. 이걸 이렇게 구겨서, (쓰레기통을 꺼내며) 이 접수함에 골인시키시면 됩니다. 쓰레기통 아니구요, D급 원서 접수함입니다. 여기에 들어가야 최종적으로 환생하시게 되는 거예요. 안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진 안타깝게도 모릅니다. 던질 위치도 정해드릴 건데요, (계산기를 두드리며) 전생에 살아온 햇수를 x, 쌓은 덕을 y에 대입해 D급 거리계산 방정식에 대입을 하면... 네. (줄자로 거리를 재는데 너무 길어져 무대 밖까지 나간 뒤 목소리만 들린다) 여기서 던지시면 됩니다~!
- 주인공
- (목소리) 여기서요??
- 천사
- (다시 들어오며) 네, 그렇습니다~ 시간 내에 성공하셔야 합니다. 파이팅 하십시오~
주인공이 짐을 들고 퇴장하면 조명이 변화되고, 장소는 환생설계소로 바뀐다.
천사가면을 쓴 주인공이 종이 한 장을 들고 다시 등장한다.
천사가 1분 타이머를 세팅한 뒤 퇴장하자 무대 밖에서 계속 종이공이 던져진다.
실패하면 뛰어 들어 주워가서 계속 다시 던진다.
마침내 골인되면 무대로 들어와 “저, 이제 환생하러 갑니다”하고 인사한 뒤 공연이 끝난다.
골인되지 않고 타이머가 울려도 공연은 끝난다.
- 호들갑 작가소개
- 1989년 서울 출생 여자입니다. 고등학교 때 연극동아리로 연극을 시작해서 아직도 연극을 하고 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주로 조연출로 일해 왔는데, 글을 쓸 때는 스스로 창작자란 느낌이 들어서 좋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장르 불문하고 좋아하구요, 연극으로 어디까지 가볼 수 있을지도 궁금합니다.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