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검색

검색영역

노란 중앙선 옆

왕조현
116호 2017.05.25
1인극 또는 2인극으로 쓰였으나 몇 개의 목소리가 들리든 상관없다. 빛이 있다.어른 저는 그러니까 인도 가장자리에, 이렇게 발을 걸치고, 서 있었어요. 차가 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쌩하니 지나가는 그런 방향이었죠. 똑바로 서서, 보고 있었어요. 네? 아. 그거요. 그 노란 중앙선 옆에-아이...

1인극 또는 2인극으로 쓰였으나 몇 개의 목소리가 들리든 상관없다.

빛이 있다.

어른
저는 그러니까
인도 가장자리에, 이렇게 발을 걸치고, 서 있었어요.
차가 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쌩하니 지나가는 그런 방향이었죠. 똑바로 서서, 보고 있었어요.
네?
아. 그거요. 그 노란 중앙선 옆에-
아이
비둘기!
어른
아이씨, 네 비둘기요. 그러니까-
아이
터져 죽은 비둘기!
어른
야!
아이
머리가 터지고,
갈색 피랑 깃털이 섞여서,
바닥에 눌어붙은,
비둘기!
어른
야!

어른은 아이를 구석으로 데려가 설득할 것처럼 뒤로 돈다.
암전. 서로 투닥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아이
난 잊어버려 지지가 않아!
어른
조용히 해 좀!
아이
씨…….
어른
하여튼, 그랬는데, 그걸 지켜보고 있었는데, 차들이 그 옆엘 지날 때마다
(사이) 깃털이. 제 말은, 피에 엉겨 붙지 않은 깃털들이요.
그게 펄럭이는 거예요. 꼭 살아있는 것처럼.
(느리게) 도대체 알 수가 없었어요. 저 비둘기는 죽은 게 맞나?
죽어서, 죽어서 뭔가 지워진 거라면
이 땅에서 저 새가 지워진 거라면 도대체 뭐가
그러니까 뭐가 지워지고 뭐가 남은 거지-
아이
징그러!
어른
(사이, 낮게) 뭐가 문제야.
아이
초코우유 먹자.
어른
먹을 거야. 좀 기다려.
아이
거짓말.
어른
(한숨)
아이
비둘기 생각 그만해. 징그러워.
어른
그냥 생각이 나.
아이
(사이) 알아.
어른
그래.
아이
초코우유-
어른
기다려.
아이
거짓말! 기다려도 못 먹어. 거짓말.
어른
알면, 그 얘긴 왜 꺼내?
아이
네가 언제쯤 나한테 거짓말을 안 하나 보려구!
너는, 너는 나를 너무 미워해! 계속! 이렇게 됐는데도.
어른
(바로) 이렇게? 이렇게가 뭔데? 말해봐. 넌 맨날 그런 식이지 날 떠보고, 찔러보고-
아이
비둘기! 우리가 비둘기처럼 됐는데도 넌 날 미워해.

약한 빛이 든다.
배우의 시선 천천히 왼쪽 바닥에서 오른쪽 바닥으로.

아이
비둘기다…….
어른
(웅크려 앉는다)

다시 암전.

어른
왜 끝나지지가 않는 거야…….
아이
(사이) 뭐가.
어른
우리 말이야.
아이
너무 편리하게 쉬어보려고 해서 벌 받는 건가.
어른
(바로) 넌 그런 말 하기엔 너무 어려.
아이
넌 나만할 때부터 이런 생각 했잖아. 넌 다 알던 것도 내 입으로 나오면 듣질 않지. 바보 같애.
어른
…….
아이
바보 같애!
어른
…….
아이
바보야!
어른
알아.
아이
(혼자) 이런 말만 듣고. 맨날 이렇지, 맨날. 비둘기처럼 됐는데도 이래.
내가 하는 착한 말들은 암 것도 안 듣고.

사이.

아이
왜 그랬어.
어른
뭘.
아이
앞으로 걸어간 거. 보다가, 갑자기, 걸어간 거.
어른
그냥. 그냥 그러고 싶었어.
아이
(사이) 뭐야, 그게 다야?
어른
응.
아이
거짓말.
어른
응.
아이
넌...넌...
어른
뭐.
아이
(망설이다) 넌 날 사랑해야 돼!
어른
알아. 아니까 좀 닥쳐.

아이가 운다.

아이
(울며) 왜 끝나지지가 않는 거야?
어른
(사이) 뭐가.
아이
(울며) 우리 말이야!
어른
(바로) 넌 날 사랑해? 네가 날 사랑했으면, 진작 먼저 사라져줬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이런 귀찮은 짓거리하기 전에. 어? 말해봐!
아이
(버럭) 사랑해!
어른
(빠르게) 부럽잖아! 비둘기가.
비둘기는 머리가 터졌으니까 쳐다보거나 들을 노력 같은 거 안 해도 되잖아.
지나가는 차들의 배기량, 보험료, 기름 값, 세차비
그리고 그 번쩍번쩍한 것 안에 담긴 사람 같은 거 생각 안 해도 되잖아.
내 외투가 얼마나 얇은지
나한테 이 차도는 얼마나 까마득한지 느끼지 않아도 되잖아.
아이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
어른
(버럭) 피곤한 게 죄야?
(사이) 피곤했어.
(느리게) 깃털이 자라는 몸은 옷값이 안 들어서 좋겠다, 같은 생각을 하는 내가.
죽은 새를 보고, 숨이 꺼진 생명을 보고, 그런 것밖에 생각을 못하는 내가. 피곤했어.
아이
…….
어른
그게 다야.
아이
야.
어른
…….
아이
너 거짓말 안 하네.

옅게 드는 빛.

막

호들갑 작가소개
안녕.
외롭지 말라고
외롭지 말자고
건네는 인사예요.
연극이 제일 재밌어요. 그래서 계속 하고 싶어요.
같이 이야기해요. 활자로든 무대로든. 그럼 기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