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검색

검색영역

자발적 멸종

노연주
117호 2017.06.08
더 이상 후손을 낳지 않고 지금의 세대를 마지막으로 멸종을 하는, 일명 자발적 멸종이 국민투표로 결정된 지 오늘로78일이 됐습니다. 90일부터는 불임수술을 받지 않은 남녀에게는 벌금이 부과되니 아직 병원을 찾지 못한 시청자 분들은 병원 예약을 서둘러야겠습니다. 현재까지도 일부 지역에서는 자발적 멸종 반대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데요. 하지만 임신이 가능...

등장인물
미래 30대 중반 여자
현아 20대 여자

시간
2057년 어느 봄날,오후.

장소
산부인과 대기실

대기실 의자가 놓여있고 미래가 앉아있다. 옆에서 햇볕이 비춘다.미래가 하품을 한번 한다.

TV
더 이상 후손을 낳지 않고 지금의 세대를 마지막으로 멸종을 하는, 일명 자발적 멸종이 국민투표로 결정된 지 오늘로78일이 됐습니다. 90일부터는 불임수술을 받지 않은 남녀에게는 벌금이 부과되니 아직 병원을 찾지 못한 시청자 분들은 병원 예약을 서둘러야겠습니다. 현재까지도 일부 지역에서는 자발적 멸종 반대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데요. 하지만 임신이 가능한 20, 30대 젊은 층의 찬성 비율이 약 80퍼센트 이상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보이고 있어 정부는 기존에 발표했던 100년 후 멸종에는 별 무리가 없을 거라는 의견입니다. 자발적인 멸종을 찬성으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한 지금의 청년세대에 대해 생명마저 포기해버린 무기력한 세대라는 평가도 있지만 후대에 대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으니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즐기는 세대라는 평가도 공존하고 있습니다.

TV 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현아가 등장해 미래가 앉아있는 대기실 의자에 앉는다. 앉으며 현아의 주머니에서 번호표가 떨어지지만 현아는 눈치채지 못한다. 미래는 하품을 하다가 현아의 번호표가 떨어진 것을 발견한다.

미래
(번호표를 주워서 건네며) 저기요, 이거 떨어트리셨어요.
현아
아....... 네, 감사합니다.
미래
수술 받으려면 많이 기다려야 되죠?
현아
(어색하게 웃으며) 네. 조금요.
미래
그래도 이 병원이 그나마 한산한 편인 것 같아요. 다른 병원은 이렇게 번호표 받으려면 한참 걸린다고 하더라구요.
현아
그런 가요.

밖에서 ‘멸종반대’, ‘생명존엄’ 등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미래
(소곤대며) 저 시위 때문에 괜히 봉변 당할까 봐 무서워서들 여기론 안 오나 봐요. 보니까 매번 병원 들어가는 사람 붙잡고선 수술 받으러 간다고 하면 단체로 살인자라고 야유하더라구요. 들어올 때 별일 없었어요?
현아
그냥 무시하고 들어왔어요.
미래
정말요? (호탕하게 웃으며) 잘했어요. 내가 내 몸 결정하는 데 무슨 상관이야, 지들이. 그쵸?
현아
네, 뭐. 그렇죠.
미래
근데 불임수술 받으러 온 건 맞죠?
현아
네, 맞아요.
미래
부럽다.
현아
네?
미래
전 못하거든요. 사실 전 멸종 찬성 쪽이라 결정이 나고 바로 수술 받으러 병원으로 왔다가 알게 됐어요. (배를 어루만지며) 얘가 숨어있던 걸요.
현아
낳기로...... 하신 건가요?
미래
지울까도 고민했는데, 사실 제가 멸종 찬성 시위 다니면서 엄마랑 심하게 다퉜어요. (하품을 한다) 엄마는 반대쪽이라 거의 연을 끊고 지내는 수준이었는데 어떻게 신랑한테서 들었는지 앞으로 제가 하는 일에 아무 신경 안 쓰고 애도 키워줄 테니까 낳으라고 사정사정을 하는 거예요. (하품을 한다) 엄마랑 평생 연 끊고 살기도 어려우니까. 낳기로 한 거죠.
현아
아, 그러시구나.

현아는 미래의 배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미래
그래도 사실 여기 불임수술 받으러 오신 분들 보면 후회되는 거 있죠? 계획도 다 세워뒀는데. 멸종이 결정되면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조금 쉬려고 했어요. 그냥 다 지쳤었나 봐요. 멸종 발표 나자마자 기운이 쭉 빠진다고 해야 하나. (하품을 하고) 근데 엄마가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자기 때는 이것저것 다 포기해도 희망마저 포기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것 같은데 너흰 그걸 포기하더라. 그걸 듣고 나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알아요? 엄마도 포기하지 않았다고 희망이 생기진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난 나름대로 이걸 우리 세대의 발전이라고 생각해요. 가능성이 없으니 일찌감치 포기하기. (다시 한 번 하품을 하고 살짝 웃음을 지으며) 내가 시위하던 때가 생각나서 이것저것 말이 많아졌네요. 그래서, 수술하고 계획은 따로 있어요?
현아
계획이요?
미래
왜, 요즘 그런 거 유행이잖아요. 옛날 유행어 중에 YOLO라고 해서 이제 후대 신경 쓸 필요 없으니 멸종 기념해서 그동안 못해왔던 거 하는 거,
현아
글쎄요. 전 그냥 알바 중에 나온 거라.
미래
알바요?
현아
네. 다음달부터 불임수술 안 받은 사람들은 과태료 낸다고 해서 알바 잠깐 빼고 나온 거에요.

사이. 현아는 미래의 배를 다시 바라본다.

현아
신기해요. 10개월 후에는 거기서 아이가 나온다니.
미래
만져볼래요?
현아
그래도 되나요?

현아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미래의 배에 아주 살짝 올려놓는다.

현아
10개월 후에 태어나면 얘는 100년 후 멸종을 맞이하는 마지막 인류가 되겠죠?
미래
그래요. 마지막 아이일 수도 있죠.
현아
100년 후라니. 10개월 후에 태어날 아이도 보이지 않는데. 우리가 정말 멸종할 날이 오긴 할까요?
미래
언젠가는 그 날도 올 거예요.
현아
저는 하루살이로 태어나서 100년 후도, 10개월 후도 보이지 않아요.

사이.

현아
이 아이는 100년 후를 벌써 보면서 태어날 테니 축복받은 걸까요?
미래
글쎄요. 그래도, 이 아이는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살 수 있지 않을까요?
현아
저는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태어났다면, 더 좋을지. (미래의 배에 조그맣게 속삭이며)너는 100년 후를 내다보며 태어난 아이야. 꼭 그렇게 살아가렴.

멀리서 “김미래 님!”하고 간호사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미래
저는 이만 가봐야겠어요.
현아
(미래의 배에 올려놓은 손을 거두며) 네, 안녕히 가세요.
미래
안녕히 가세요.

미래가 대기실을 떠나고 현아만 남는다. 밖에서는 여전히 멸종반대, 생명존엄 구호소리가 아련하게 울리고 대기실에는 자그마한 햇빛이 내리쬔다. 미래, 다시 한 번 하품을 한다.

막.

호들갑 작가소개
글 속에서도, 글 밖에서도 방황하고 있습니다.
항상 물음표가 가득한 글을 쓴다는 평을 받은 적이 있는데 언젠가는 답을 찾아 또 다른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