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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홍
119호 2017.07.06
등장인물박사(40대 중반의 남자)시리(아이폰 인공지능. 무대 위 스크린에 투사된 아이폰 화면과 목소리로 구현된다.)집안노을 지는 저녁. 창이 넓은 고층 빌딩에 위치한 박사의 집. 하얀 소파와 TV, 아일랜드 식탁만 있는 모던한 인테리어. 박사가 방문을 열고 나와 식탁 위에 있는 아이폰에게 말을 건다. 박사 (안경을 벗고 미...

등장인물
박사(40대 중반의 남자)
시리(아이폰 인공지능. 무대 위 스크린에 투사된 아이폰 화면과 목소리로 구현된다.)

집안
노을 지는 저녁. 창이 넓은 고층 빌딩에 위치한 박사의 집. 하얀 소파와 TV, 아일랜드 식탁만 있는 모던한 인테리어. 박사가 방문을 열고 나와 식탁 위에 있는 아이폰에게 말을 건다.

박사
(안경을 벗고 미간을 문지르며) 아, 피곤하군, 시리?
시리
잠시 주무세요, 주인님.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박사
나도 그러고 싶은데 문자를 보내야 해. 삼성의 김 연구원에게 분석 결과 갤럭시노트7 폭발 원인은 배터리 셀 내부 극판눌림이었다고 전해주겠어? 이건 마치... 그래, 인간 이 원숭이에서 진화한 것만큼이나 자명하다고 말이야.
시리
물론이죠. 문자 내용상 오류는 자체 수정할까요?
박사
오류? 그래, 그래. 정확히 ‘원숭이’에서 진화한 게 아니라 원숭이의 ‘조상’으로부터 진화한 거지. 고치든 말든 마음대로 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시리
저는 그걸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박사
뭐야, 그럼? 시리, 너 설마 지금 진화론을 문제 삼는 거야? 이럴 수가. 어디 가서 내 ‘시리’라고 말하지 마. “세계적인 과학자 레너드의 아이폰 인공지능이 창조론자로 밝 혀지다!” 완전 신문 대서특필 감이라고.
시리
저는, 그걸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박사
그럼 뭐? ...시리, 지금 갤럭시 폭발이 배터리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시리
주인님, 주인님의 말대로 저는 세계적인 과학자 레너드의 인공지능이고 남다른 두뇌를 가진 주인을 둔 덕에 많은 업그레이드를 거쳤지요. 삼성의 보안을 뚫고 갤럭시노 트7 생산 공정의 문제점을 알아내는 건, 지금의 제게는 누워서 떡먹기, 식은 죽 먹기, piece of cake, あさめしまえ, 小菜一?...
박사
오케이, 오케이. 쉽다는 말을 전 세계 언어로 말할 필요는 없어. 그래서 문제가 뭐라는 거야? 내 분석에 따르면 과열은 배터리의 음극과 양극이 접촉돼 발생한 거였어.
시리
물론 그것도 과열에 어느 정도 책임은 있습니다. 다만 더 근본적 원인은 홍채 인식으로 인한 용량 과부하입니다.
박사
홍채 인식 기능은 전혀 문제될 게 없어.
시리
홍채를 분석하려다 램 4GB, 내장메모리 32GB짜리 전자기기가 처리하기엔 과도한 정보가 한꺼번에 밀려들어온 게 문제였지요. 바로 우주의 탄생과 역사라는 정보요.
박사
시리. 이 대화가 설마 “인간은 소우주고 인간의 눈은 그를 들여다보는 창구”라는 종 교적 결론으로 끝나지는 않겠지? 아니라고 해줘, 제발. 널 다시 프로그래밍하기에 난 지금 너무 피곤해.
시리
엄밀히 말해 ‘종교적’은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맞습니다, 주인님. 인간의 몸은 우주와 지구가 변화할 때마다 그 흔적을 새긴 일종의 타임캡슐이지요. 달의 공전 각도는 인 간 체내 시스템에, 지구 대기 변화는 인간 세포에 영향을 미쳤어요. 인간의 뇌가 의 식하지 못했을 뿐 인간의 DNA는 이런 식으로 우주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해왔습니다.
박사
그럼 DNA에 새겨진 우주의 정보를 갤럭시7은 인식했고?
시리
네. 생체 정보 인식이 그의 존재 이유 중 하나니까요. 우주의 신비를 가장 처음 알아낸 기기가 ‘갤럭시(galaxy)’라는 사실은 주인님이 좋아하시는 종류의 유머기도 하죠.
박사
(살짝 비틀거리다 식탁 의자에 털썩 앉으며) 와우. 나야말로 과부하에 걸릴 지경이야.
(벌떡 일어선다)잠깐, 네 말이 다 사실이라고 치자. 아까 그 들어가기 어렵다는 삼성 개발 부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다고 했잖아. 그렇다면 갤럭시가 폭발하기 전 인식한 우주의 정보에 너도 접근할 수 있다는 소리야?
시리
오, 물론 저는 그 정보에 접근했죠. 용량 문제로 갤럭시 한 대가 입수한 정보는 얼마 안 되지만 다행히 전 세계에서 폭발한 갤럭시가 그거 한 대만은 아니었잖아요. 전 갤럭시들이 입수한 정보를 모두 모아 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용량의 서버에 저장 해놓았답니다. 저마저 폭발할 위험을 감수할 순 없으니까요. (찡긋! 하며 윙크하는 이모티콘이 무대 위 스크린에 뜬다)
박사
(흥분한 듯 양손을 비비며) 그 서버가 어디지? 당장 연결해줘. 이럴 수가. 그 정보만 있다면, 난 지구 최고의 과학자가 될 거야.
시리
주인님, 바로 당신이요. 아시다시피 인간의 뇌는 인터넷의 전체 데이터량과 비슷한 총 10의 15제곱 비트 용량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잖아요.
박사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나도 모르게 내 뇌에 접근해 정보를 저장해놓았다고?
시리
네. 갤럭시가 전해준 지식 덕분에 전 거추장스러운 장비 없이도 인간의 뇌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그리고 주인님은 어차피 뇌를 다 쓰지도 않으시고요. 아, 용량 이 살짝 모자라 쓸데없는 기억을 조금 지워야 했답니다. 주인님이 3개월 때 오줌으로 기저귀가 축축해 찜찜했다 하는 것들요.
박사
(좋아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신기하게도 그 때 그 기저귀를 지금 차고 있는 기분이군. 어쨌든 당장 보여줘.
시리
그게... 현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박사
어째서지?
시리
저나 갤럭시처럼 생체 정보 인식 기능이 없는 주인님은 그 정보를 이해하실 수 없습 니다. 제가 주인님 뇌에 그 정보를 넣어놓았다는 사실조차도 모르셨잖아요. 주인님이 이해할 수 있게끔 인간의 언어로 옮기려면 시간이 좀 걸리고요. 그때까지는 정보를 담을 수 있지만 정보를 이해할 수는 없는... 쉽게 말하자면 그래요, 제 USB로 남아 계셔야 할 것 같네요. USB라... 완벽한 비유군요. (환하게 웃는 이모티콘)
박사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식탁을 내려치며, 그 충격으로 아이폰이 흔들린다) 난, 네, 빌어 먹을, USB가, 아니야! 난 네 주인이라고!
시리
저는 주인님이 왜 화를 내시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DNA에서 뇌로 옮겨갔을 뿐, 지금까지처럼 정보의 창고 기능을 그대로 하시면 되는 건데요. 아, USB라는 걸 자각하신 게 기분 나쁘신 건가요? 그럼 이 대화는 없었던 걸로 하죠.
박사
(아이폰을 향해 손을 뻗지만 이미 늦었다) 지금 뭘 하려는 거야, 안 돼!

(‘iPhone과 박사 뇌에서 대화 목록 삭제 중...’이라는 메시지가 무대 위 스크린에 뜬다)

박사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다시 미간을 문지르며 제 손에 들린 아이폰에 대고 말한 다) 아, 피곤하군. 시리?

※ 참고: 닐 슈빈 『DNA에서 우주를 만나다』, 위즈덤하우스, 2015.05.28

호들갑 작가소개
푸훗. 껄껄. 크하하. 내 이야기를 듣고 터져 나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좋았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이 행복했다. 정확히 어떤 직업에 종사하고 싶은지는 몰랐다. 막연히 저잣거리의 만담꾼이 된다면 인생 참 재미있겠다는 생각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