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언쟁 五感言爭
이해섬
121호
2017.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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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한 오후, 어느 호텔의 1층 카페. 남자가 홀로 앉아 커피를 마신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두꺼운 책을 읽는 중이다. 암전. 다시 무대가 밝아지고, 눈, 코, 입 그리고 왼손과 오른손이 테이블에 둘러앉아있다.눈 : (졸린 듯) 피곤하다. 언제까지 읽을 거야.오른손 : (지친 듯) 내 말이....
한가한 오후, 어느 호텔의 1층 카페.
남자가 홀로 앉아 커피를 마신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두꺼운 책을 읽는 중이다.
암전.
다시 무대가 밝아지고, 눈, 코, 입 그리고 왼손과 오른손이 테이블에 둘러앉아있다.
- 눈
- (졸린 듯) 피곤하다. 언제까지 읽을 거야.
- 오른손
- (지친 듯) 내 말이.
- 입
- (명랑하게) 그런데 여기 커피 맛있는 거 같아. 역시 고급스러운 호텔에서 주는 커피라 그런가? 수없이 많은 커피를 마셔본 입장으로서 이 커피는 손가락에 꼽을 만해.
- 왼손
- (다소 쏘아붙이며) 손가락도 없으면서 무슨.
- 입
- (기죽지 않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이 커피 정말 맛있다구.
- 오른손
- 왼손아, 책 좀 네가 넘기면 안 되냐? 지금 나 혼자 100쪽 째 넘기고 있어.
- 왼손
- (귀찮다는 듯) 나도 바쁘다. 그리고 넌 책이라도 넘겨야지.
- 입
- 커피 거의 다 마신 거 같은데? 그렇지, 눈아?
- 눈
- 어. 거의 다 마셨다.
- 입
- 왼손아, 커피 리필하게 종업원 좀 부르자.
- 왼손
- 나 지금 바쁘다.
- 눈
- 시간 보니까 슬슬 움직일 거 같은데.
- 입
- 에이, 아쉬운데. 한 잔 정도는 더 마실 수 있지 않아?
- 왼손
- (핀잔주듯) 너야 가만히 커피나 홀짝이고 있으니까 아쉽지.
- 눈
- (피곤한 목소리로) 계속 책 보기 피곤하다.
- 오른손
- (투정부리듯) 책 넘기는 거 은근히 힘들어.
- 입
- 거, 너무 뭐라고들 하시네. (거들먹거리며) 내가 마시는 게 다 너희한테도 돌아가잖아. 당장은 나 혼자 커피나 홀짝이며 즐기는 거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거지. 그게 눈에 띄지 않아서 니들이 잘 모를 뿐인 거야.
- 왼손
- (다소 쏘아붙이듯) 눈도 없으면서 무슨.
- 입
- (기죽지 않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 눈
- 너희들끼리 싸워봤자야.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 입
- 에이, 어쩔 수 없지. 안녕, 커피야. 너의 향을 잊지 않을게.
- 왼손
- 향은 코가 맡지, 니가 맡냐?
- 코
- 킁킁.
- 눈
- 계산이나 빨리 하고 가자. (뭔가를 살피는 듯) 오른손아, 가방 좀 더 확실히 벌려봐. 왼손아, 지갑 저기 있다. (사이) 아니, 그 카드 말고, 옆에 있는 카드.
- 입
- (놀리듯) 계산 하루 이틀 해봅니까, 왼손 씨?
- 왼손
- (날카롭게)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계속 바빠서 헷갈렸다. 왜.
- 입
- (놀리듯) 바쁜 거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입니까, 왼손 씨?
- 눈
- (피곤한 듯) 그만하고, 빨리 계산이나 하자.
- 왼손
- (딱딱한 목소리로) 야. 근데 왜 맨날 나만 계산해?
- 입
- (우습다는 듯) 내가 하리?
- 오른손
- (순진한 말투로) 가끔은 나도 계산하는데?
- 눈
- (피곤한 목소리로) 그거야, 네 할 일이니까.
- 왼손
- 그러니까 계산하는 게 왜 내 일이냐고. 지금 여기서 나한테 뭐가 좋았는데?
- 입
- (비아냥거리며) 아까 메뉴판 돌려줄 때, 종업원 손이랑 조금 스치지 않았어? 나는 손이든 입술이든 못 스쳤는데.
- 오른손
- (조금 재미있다는 듯) 네가 스치면 범죄지.
- 입
- (농담하듯) 불공평하구만.
- 왼손
- (어이없다는 듯) 불공평? 지금 내 처지가 불공평한 거지. 이 카페에서 지금 뭐했어?
- 입
- (순순히, 기죽지 않고) 커피 마시면서 책 읽었지.
- 왼손
- (목소리를 높이며) 커피는 입, 니가 다 퍼마시고, 책은 눈이 읽었잖아.
- 입
- 아, 나도 틈틈이 같이 읽었어.
- 왼손
- (애써 참는 듯) 나는 멀뚱히 있으면서 가끔씩 휴대폰이나 만지작거리다가 커피 잔 날라주고, 커피 흘린 거 냅킨으로 닦고, 턱 받쳐주고. (다시 목소리를 높이며) 심지어 입. 네 놈 각질도 떼 줬어! 그런데 계산은 왜 내가 하냐고!
- 입
- 각질은 내가 이빨로 알아서 뗀 것도 있는데, 생색은…
- 왼손
- (흥분하며) 생색? 내가 지금 생색낸다고? 진짜 생색 한 번 지랄 맞게 내봐?
- 눈
- (피곤한 목소리로) 그만하자. 어쩔 수 없는 거잖아.
- 왼손
- (화내며) 뭘 그만해. 뭐가 어쩔 수 없는데.
- 눈
- (달래듯) 우리 각자 정해진 역할이 있는 거잖아. 우리는 우리가 맡은 역할만 할 수 있는 거야.
- 입
- (거들며) 그렇지, 그렇지. 정해진 자리라는 게 있는 거야.
- 왼손
- 그러니까 나는 싫다고. 왜 자질구레한 일은 내가 다 도맡아서 해야 되는데. 어디 가려운 데 있으면 내가 비듬이며 각질 묻혀가며 긁어주고, 웬만한 짐은 내가 다 들고, 방에 벌레 나오면 내가 잡고, 화장실에서 뒤처리도 내가 다 하고!
- 입
- (놀리듯) 얼~쑤!
- 오른손
- (조금 눈치 보며) 방금 말한 것들은 나도 거들어 주는데…
- 입
- (거들며) 그래, 맞아. 왼손 너 혼자서 다 하는 것도 아니네.
- 왼손
- (비아냥거리며) 오른손 네가 뭘 얼마나 거드는데. 기껏해야 가려울 때 오른쪽 귓구멍 쑤시는 정도 아니야?
- 눈
- (타이르듯) 그럼 어떻게 해. 긁고, 들고, 벌레 잡고, 계산하고, 다 너만 할 수 있는데.
- 왼손
- (따지듯) 왜 나만 할 수 있다고 단정하냐고.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잖아.
- 코
- (조용하게) 저기…
- 코
- 아까부터 왼쪽 콧구멍이 영 찝찝한 게… 코딱지 큰 게 낀 거 같은데…
- 왼손
- (버럭) 어쩌라고! 참아!
- 눈
- (침착하게) 우리 그냥 계산하고 가면 안 될까. 이러다 늦을 거 같은데.
- 왼손
- (무시하고) 내가 이렇게 고생이 많은 동안 니들은 뭐하는데? 맛있는 거 있으면 입이 다 처먹고, 영화며 책이며 보는 건 눈 너 혼자 다 하지. 친구들이랑 술 마시며 떠드는 것도 입 혼자 신나서 하고, 눈 너는 세상 구경하면서 혼자 아는 척 다 하고. 노래 듣는 건 귀 차지야. 니들이 그렇게 놀고, 먹고, 보는 동안 나는 자질구레한 거 처리하기 바쁘다고.
- 입
- (속삭이듯) 그러고 보니까 귀는 왜 둘 다 안 왔어?
- 눈
- (속삭이듯) 지금 노래 듣느라 정신없나봐.
- 왼손
- (더욱 흥분해서) 이 몸뚱어리는 왜 왼손잡이냐고. 발에 채이는 게 오른손잡이라는데. 생긴 것만 똑같고, 온통 다르잖아. (오른손을 바라보며) 모자란 놈.
- 눈
- (차분하게) 우리랑은 생긴 것도 다르잖아.
- 입
- (맞장구) 그렇지, 그렇지. 우리랑 니들은 생긴 것부터가 다르잖아. 왼손 니가 고생이 많은 건, (달래는 척) 그래, 잘 알겠어. 하지만 어쩌겠냐. 우리는 못하는데. 정 억울하거든 오른손이랑 얘기하고, 빨리 계산하자.
- 왼손
- (단호하게) 싫어. 못 해. 절대로 싫어.
- 눈
- (한숨) 오른손아, 오늘은 네가 계산 좀 하자.
- 왼손
- 오늘은? 공평하게 할 거 아니면 난 앞으로 쭉 계산 안 할 거야.
- 오른손
-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도 안 해. 내가 뭐 왼손 꼬붕이냐? 왼손이 안 하면 내가 대신 하게?
- 입
- (혼잣말하듯) 비슷하지, 뭐.
- 왼손
- 커피는 입 혼자 쳐마셨으니까 입이 계산하라고 해.
- 입
- (뻔뻔하게) 아니, 막말로 나한테 커피 들이민 건 왼손 너잖아.
- 왼손
- (화내며) 그게 무슨 개소리야. 한 잔 더 마시자고 지껄여…
- 코
- (느닷없이, 힘차게) 킁!
- 오른손
- (기겁하며) 으악! 내 손등이 갑자기 축축해! 이거 뭐야!
- 코
- (조용하게) 미안… 코딱지가…
- 눈
- (침착하게) 다른 사람들은 못 본 거 같다.
- 입
- (자지러지게 웃으며) 야, 빨리 치워줘라. 니 친구가 기겁을 하네.
- 왼손
- (질색하며, 오른손을 닦아주며) 아오, 썅. 더러워서 진짜.
- 눈
- 그럼 우리 투표로 하자. 누가 계산을 하면 좋을지 말이야. 다수결로 정하는 거니까 공평하잖아? 각자 할 말 있으면 한마디씩 하고.
- 왼손
- 아니, 그게 어떻게…
- 입
- (말을 자르며) 커피를 나 혼자 잔에 처박혀서 마신 건 아니야. 눈이 보고, 왼손이 옮기고, 코는 향을 맡고, 오른손은… 아무튼. 내가 그저 커피를 삼켰을 뿐, 우리 모두 커피를 마신 거야. (한 글자씩 힘줘서) 각자의 역할에 맞게.
- 왼손
- (어이없다는 듯) 뚫린 입이라고 막 지껄이네.
- 입
- (비아냥거리며) 넌 입이 안 뚫려봐서 잘 모르겠지.
- 왼손
- 지랄한다, 진짜. (조금 침착하게) 우리는 같은 몸에 같이 살고 있어. 일부만의 즐거움을 위해 다른 일부만 고생하는 건 불공평해.
- 오른손
- 옳소!
- 왼손
- 모두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즐겨야지.
- 입
- (놀리듯) 이야~ 우리 중에 빨갱이가 있었네.
- 왼손
- (으르렁거리듯) 넌 옆 동네 주둥이였으면 벌써 한 대 맞았어.
- 입
- (놀리듯) 어이쿠, 무서. 야, 타고나기를 이렇게 타고났는데 어쩌냐. 받아들여.
- 눈
- (지친 목소리로) 그만해. 다들 할 말 더 없으면 빨리 투표하자. 늦었어.
모두 코를 바라본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눈은 서둘러 주위를 둘러본다.
사이.
암전.
무대가 밝아지고, 다시 처음의 남자가 보인다.
앉아있던 남자가 오른손을 들어 종업원을 부른다. 곧 종업원이 다가오고, 남자는 왼손으로 카드를 건넨다. 암전. 어디선가 욕하는 소리가 들린다. 막.
- 호들갑 작가소개
- ⅰ. 저 이(伊), 바다 해(海), 헛소리 섬(?) 자를 쓰고 있습니다.
ⅱ. 테이블 간격이 좁은 식당과 감자싹을 싫어합니다.
ⅲ. 늦은 밤과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합니다.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