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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페이스

양소연
121호 2017.08.03
등장인물 러브(외관상 30대 초)남자(50대 중) 지하에 자리한 술집. 러브, 정장을 입고 있다. 능숙한 손짓으로 테이블 위에 놓은 포커카드를 섞는다.그때, 후줄근한 행색의 남자 등장. 러브의 자리로 다가온다.남자 여긴 알코올 말고 기름도 파나 봐요?러브 (남자를 흘끗 보더니 다시 카드를 보며) 내 하드웨어...

등장인물
러브(외관상 30대 초)
남자(50대 중)

지하에 자리한 술집. 러브, 정장을 입고 있다. 능숙한 손짓으로 테이블 위에 놓은 포커카드를 섞는다.
그때, 후줄근한 행색의 남자 등장. 러브의 자리로 다가온다.

남자
여긴 알코올 말고 기름도 파나 봐요?
러브
(남자를 흘끗 보더니 다시 카드를 보며) 내 하드웨어는 전기로 돌아갑니다.
남자
예? (사이) 아 그렇지. 무슨 구식자동차도 아니고, 나 참. 워낙 시대감각이 없어서. (고개 살짝 숙이며) 이거 실례가 많습니다.

남자, 털털하게 웃더니 슬쩍 러브 맞은편 의자를 빼 걸터앉는다.
러브, 눈길도 주지 않고 계속 카드를 섞는다.

러브
무슨 일이십니까?
남자
굴지의 인공지능 포커플레이어 ‘러브’가 이런 델 다 오다니 신기해서요.
러브
제가 좀 바쁩니다.
남자
저도 이래봬도 포커에는 일가견이 좀 있어서, 아, 우리가족도 당신 팬인데.
러브
제가 좀 인기가 많습니다.
남자
(사이) 그런데 저, 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죠. 당신 같은 인공지능이 굳이 이리 정교한 사람거죽까지 써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단 말입니다. 옛날처럼 컴퓨터로 프로그램 돌리고, 직접 치는 건 대리인이 해도 되는 일 아닙니까?
러브
난 인공지능이기 전에 일종의, 회사 홍보상품입니다. 소프트웨어 수준만큼 그에 맞는 포장을 해야 해요. “우리는 하드웨어도 이만큼 발전했습니다.”라는 거죠.
남자
아하. (사이) 그럼 '포스'는 얼마나 더 잘 빠진 거람.

러브, 카드 든 손을 움찔하며 남자를 노려본다.

남자
헛, 이건 진짜 실례. (사이) 근데 말 나온 김에... 당신의 그, ‘포스’ 출시기념 은퇴경기, 세계1위 인간 포커플레이어 '퀸'과의 대결! 바로 내일이잖아요? 지금쯤 회사에 계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러브
잠시... 휴식 중입니다. (사이) 엔진 좀 식힐까 해서.
남자
기권이라도 할 겁니까?

러브, 잠시 침묵한다.

남자
흥, 젊은 도박꾼들, 원래 이렇게 제멋대로인가 봐. 왜, 그 ‘퀸’도 심심하면 판 뒤집어엎고 튀는 게 특기잖습니까. 뭐, 짜고 치지 말라나? 지가 뭐라도 된다고... (카드 흘끗 보며) 우리 머리도 식힐 겸, 게임 한 판할까요?
러브
칠 줄 아세요? 헤즈업 홀덤.
남자
알다마다요. (카드를 섞는다)

남자와 러브, 패를 나눈다. 조명 어두워진다.

조명 다시 밝아진다. 러브,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다.

남자
(비아냥대듯) 딥블루가 나와 체스가 죽고, 알파고가 나와 바둑도 죽었다죠?
러브
(고개 들며) 아니, 한번은 인간이 이겼지 않습니까.
남자
겨우 한번인데.
러브
그 한번이 문젭니다. 전시에 목표지점에 미사일을 쏘려는데 딱 한번, 조준실패라도 한다면 이후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게임용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개발 목적은, 게임을 잘하는 게 아니라 100퍼센트의 승률입니다.
남자
그래서 당신은, 200번 넘게 인간을 이겨놓고도 강판 당하는군요. 3년 전 퀸에게 졌던 그 한 번의 게임 때문에? (사이) 아, 이제 두 번째지.
러브
말했잖습니까. 나는 상품이에요. 내가 200번을 이겨도, 미세한 오류 1회에 회사주가가 급락하죠. 그날 이후 개발팀은 점검에 착수했고, 무려 3년이란 시간 끝에 몇 가지 단점을 보완한 신 모델을 개발해냈죠. 난 물론 그놈의 시범프로그램에게 77퍼센트 확률로 졌고요. 뭐, 결과는 보다시피. (사이) 하지만 난 알아요. ‘포스’가 나오든, ‘네오러브’가 나오든, 종목이 ‘오프라인’ 포커인 이상 내가 저지른 치명적 오류는 반복될 거라는 걸 말입니다.
남자
이상하네. 보통, ‘포커페이스’가 오프라인의 승부 포인트 아닙니까. 로봇이야말로 완벽하게 표정을 숨기고 게임하는 유리한 조건을 쥔 셈 아닌가요?
러브
거꾸로 말이죠, 로봇은 인간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블러핑. 소위, 배짱플레이죠. 기계가 인간의 그 블러핑을 온전히 읽는 데만 1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예측만으로 움직이는 기계에게 돌발 상황은 가장 치명적인 변수죠. 예측불허 한 싸움에서 가장 예측 불가능한 것! 그건 누가 뭐래도... 인간의 얼굴입니다.
남자
그럴싸하네.
러브
당신이 패를 보고나서 순간적으로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는 그 버릇... 그게 내 계산에 미세한 미스를 만들어낸 겁니다. 3년 전 퀸도 그랬죠. 그녀도, 내 눈을 봤어요. 인간과는 달리 그저 인간의 신경망을 흉내 낸 신호체계일 뿐인데 말이죠. 내 시스템은 일시적 혼선에 빠졌습니다. 이번 판은, 기권? 아니, 그래도 한번해보겠단 건가. 이건 도무지 패턴으로 읽히지가 않는 겁니다. 거기서부터 한계를 느낀 거죠. 모든 걸 흉내 내도, 인간 감정만큼은 평생 제대로 읽어낼 수 없을 거라고.... 이후로 난... 목표를 잃었습니다.

남자, 러브의 얘기를 듣던 중 담배를 꺼내 문다.

러브
이건 그러니까 인간 언어로, 일종의 슬럼프랄까요.
남자
아니, 불행이죠. (연기를 뱉으며) 승부가 두려워 도망친다라... 사실 누구보다 이기고 싶단 증거 아닙니까?
러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남자
내 생각에, 기계는 결국 당신이 평생 넘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벽마저 넘게 될 겁니다.
러브
무슨 뜻이죠?
남자
혼선 자체가 이미 당신이 그녀를 따라잡았단 증거에요. (어깨 으쓱하며) 뭐, 인간이 느끼는 감정도 결국 본능의 알고리즘 아니겠습니까. 난 여태 그게 인간의 약점인줄 알았는데 제대로 잘못 짚었네.
러브
약점이라니?
남자
당신의 패인이 된 그녀의 버릇, 실은 퀸의 오랜 콤플렉스였어요. 3년 전 그 경기... 세계대회 1위에 빛나던 그녀는 난데없이 등장한 로봇 상대로 4연패 중이었지요. 자신이 지면 자신 뿐 아니라, 포커도 죽는다... 그 불안과 두려움에, 그만 옛날 버릇이 튀어나오고 만 겁니다. 그런데 그 게임이 유일한 승리였다니, 어이가 없군.
러브
(사이) 당신은... 제게 퀸의 약점을 알려주러 왔던 겁니까?
남자
그럴 리가요. (사이) 단지 내일 은퇴경기에서 제대로 겨뤄 달라고 부탁하러 온 겁니다.
러브
왜죠?
남자
(픽 웃으며) 사실 나도 당신 팬이거든요.

러브, 따라서 피식한다. 잠시 침묵.

러브
당신도 퀸과 대결해본 적이 있나요?
남자
있죠, 물론. 셀 수 없을 만큼. (사이) 자주 졌지만요.
러브
어째서? 당신이 그녀에게 질 리... 아니, 이것도 내가 예측 못한 변수인가요.
남자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러브
예?
남자
역대 세계1위 플레이어들을 상대로 한 수없는 시도, 수도 없는 패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지요.
러브
알 수 없는 소릴 하시네요.
남자
그쪽도 충분히.
러브
(사이) 한 대 주실래요?
남자
뭐? (웃으며) 필 수 있어요? (담배 건넨다)
러브
필 수는 없는데, 태울 순 있죠. (담배에 불붙이며 태운다)
남자
거참, 싱겁긴.
러브
아마... 그녀도 내가 무너진 채 은퇴하는 꼴을 보고 싶진 않겠죠. (남자를 보며) 승부사의 행복은 승리가 아니라, 승부 자체에 있는 겁니다.
남자
멋진 말이군요.
러브
그런데... 당신, 어쩐지 낯이 익은데.

남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러브를 본다.

남자
여러모로 배워갑니다, 로봇 양반.
러브
이쪽이야말로.
남자
그 소식 들었어요? 오늘부로 신제품 ‘포스’는, 가장 위대했던 포커플레이어의 외형을 가진 하드웨어로의 이식을 마쳤답니다.

러브, 놀란 듯 고개를 치켜든다. 남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남자
그런데 해결 못할 딱 한 가지가 있었죠.
러브
......
남자
‘그 남자’의 모든 행동을 구현하려다보니, 자꾸만, (자기 눈을 가리키며) 어디선가 ‘실수’가 발생하는 겁니다. 피는 못 속인다고나 할까. (사이) 오늘 당신 덕에 오류가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 됐군요.
러브
당신은...

남자,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낸다.

남자
아, 이건 덤이에요. “우리는 이런 것까지 구현해낼 수 있습니다.” 랄까요. (고개를 까딱하며) 그럼, 내일 봅시다.

남자, 담배를 물고는 퇴장한다. 러브, 한참 그의 뒤를 멍하니 쳐다 보다 손에서 태우던 담배를 물고 들이마신다. 곧 콜록대며 담배를 입에서 뗀다. 러브의 몸 안 쪽에서 삐- 하는 경고 신호음이 희미하게 들려온다.

막.

호들갑 작가소개
날카로워지겠습니다. 예리한 첨단으로 누빈 온기를 함께 덮겠습니다. 함께 아물어가겠습니다.
만화와 희곡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무대의 열기, 캔버스의 집요함을 담아내고 싶습니다.

열정은 인간에게 최고의 힘을 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악덕이자 미덕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