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모그래피
배시현
122호
201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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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남자, 수진무대 어디든 상관없다. 포장마차여도 상관없고, 연습실이어도, 혹은 길거리나 공원이여도 괜찮다. 의자에 앉아있는 수진, 남자 공간을 바쁜 듯 무대에 들어왔다 수진을 보고 반갑게 다가간다.
인물 남자, 수진
무대 어디든 상관없다. 포장마차여도 상관없고, 연습실이어도, 혹은 길거리나 공원이여도 괜찮다. 의자에 앉아있는 수진, 남자 공간을 바쁜 듯 무대에 들어왔다 수진을 보고 반갑게 다가간다.
- 남자
- 수진아!
- 수진
- 선배님! 안녕하세요!
- 남자
- 야 그래,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 수진
- 저야 뭐 늘 똑같죠, 선배님은요? 잘 지내셨어요?
- 남자
- 나도 뭐 늘 똑같지.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
그냥 뭐 글 쓰고, 공연도 올리고 그렇게 지내 - 수진
- 선배님 소식 들었어요, 이번에 글 쓰신 거 또 상 받으셨다면서요?
- 남자
- 그게 또 여기까지 소문났어? 그냥 뭐 운 좋아서 받은 거지.
- 수진
- 운이 좋아서라뇨, 선배님 글 실력 이미 대한민국이 다 알아주는데 빼시기에요?
- 남자
- 아이 진짜 쑥스럽게, 얘가 나 겸손을 못 갖추게 하네.
그래 인마, 야 솔직히 나 출품할 때부터 상 받을 줄 알았어.
내가 바로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인간을 보고 그려내는 극작가 김봉우 아니냐. - 수진
- 맞습니다! 김봉우 최고!
- 남자
- 아이 짜식, 하여간 옛날부터 사람 기분 띄워주는 데 뭐 있어.
근데 너 여기서 뭐 해? - 수진
- 아… 저 아까 공연 오디션 하나 보고 와서요,
그냥 집에 들어가기도 뭐하고 해서 그냥 여기 있었어요. - 남자
- 오디션? 야 너 아직도 공연해? 나는 요새 통 네 소식 없길래 그만 둔 줄 알았다.
- 수진
- 하하, 아직 계속 하고 있어요.
- 남자
- 그래, 사람이 꿈을 먹고 살아야지, 현실을 먹고 살면 안돼요. 그리고 수진이 넌 여자니까 좀 더 해도 돼.
- 수진
- 네?
- 남자
- 가만있어봐, 네가 지금 스물아홉이지? 그럼 앞으로 3년은 더 해도 돼,
만약 네가 남자면 내가 좀 현실적인 방향으로도 생각을 해 보라고 하겠는데
우리 수진이 정도면 그냥 남자 하나 잘 물어서 계속 공연 하면서 지내도 되지. - 수진
- 아…….
- 남자
- 그래서 무슨 역할 오디션 봤는데?
- 수진
- 큰 역할은 아니구요, 아! 한 번 보실래요?
- 남자
- (수진이 건넨 안내문을 읽으며)
에이 뭐야, 너 정도 되는 애가 무슨 이런 역할을 해. 좀 더 힘 있는 걸 해야지!
너 연기도 곧잘 하잖아? - 수진
- 그게 제가 할 만 한 역할이 따로 없어서…
- 남자
- 그게 무슨 말이야 수진아,
너 정도 되면 이제 필모 신경 써야 할 때야.
가만있어봐, 너 혹시 내 작품 하나 출연할래? - 수진
- 네? 정말요? 선배님 저야 완전 영광이죠!
- 남자
- 그래, 잘됐다. 안 그래도 나 이번에 한 연출이랑 뭐 하나 하기로 했거든.
- 수진
- 한 연출님이요?
- 남자
- 그래, 지금 내가 생각해 둔 작품이 한 두 세 개 정도 있는데 말이야.
시간 되면 한 번 들어볼래? - 수진
- 네!
- 남자
- 좋아, 수진이는 생긴 거랑 다르게 참 씩씩해서 마음에 든단 말이야.
일단 첫 번째는 히어로물인데…
애들 대상으로 하는 거 말고 어른들 대상으로 하는
히어로 물을 하나 내가 해볼까 하거든. - 수진
- 세상에 히어로요? 선배님 완전 멋져요! 어떤 내용인데요?
- 남자
- 일단 주인공은 똥꾸멍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애야, 아주 가난해.
한글도 제대로 못 읽는 할머니 밑에서 힘들게 힘들게 살아오던 애였는데
그런데 어느 날 방사능 같은 걸 잘못 맞고 미지의 초능력이 생기는거지!
그래서 이 초능력으로 주인공이 - 수진
- 악당을 물리치나요?
- 남자
- 아니 바로 물리치면 재미가 없지, 인간의 서사가 없잖아!
얘가 도둑질을 하기 시작해.
염력으로다가 은행 털어버리고, 길 가던 사람들 금붙이 싹 다 훔쳐버리고. - 수진
- 그럼 그냥 악당 아니에요?
- 남자
- 악당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인거지. 잘 살고 싶은 본성.
그동안 얘가 가난의 구덩이에서 얼마나 돈을 원망하고 갈망했겠어. - 수진
- 오… 그래서요?
- 남자
- 그러던 어느 날 비정규직 노동자인 할머니가 용역들에게 봉변을 당해.
그로 인해 분노한 주인공이 용역들을 싸그리 무찔러버리면서
그동안 쌓아왔던 돈에 대한 분노를 이 사회의 부조리로 확 돌리는 거지.
그래서 비정규직들의 히어로가 되는거야!
검은 마스크 딱 쓰고! 염력으로 철근 딱 들어 올리고! - 수진
- 우와 선배님 완전 멋있어요! 그럼 저 그거 하려면 뭐부터 준비해야 해요? 팔 힘을 좀 기를까요?
- 남자
- 응? 무슨 소리야? 수진이 네가 왜 팔 힘을 길러?
- 수진
- 어… 염력 쓰는 동작 같은 거 할 때 필요할 것 같아서…
- 남자
- 아하, 수진이 네가 오해를 했구나.
히어로물인데 주인공은 당연히 남자지. - 수진
- 아… 그렇구나…
- 남자
- 여자가 어떻게 히어로를 해. 몸도 약한데.
- 수진
- 어, 그럼 저 악당은요? 요새 악당들도 사연 있으면 멋있던데.
수트 쫙 입고 나타나면 멋있을 것 같은데. - 남자
- 에이, 남자랑 여자랑 싸우면 그게 되겠어?
남자한테 여자는 지켜줘야 할 존재지 힘으로 윽박지르고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 수진
- 아… 그럼 제 역할은…?
- 남자
- 남자 주인공이 짝사랑하던 옆집 여자.
그런데 돈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배신하고 악당 편에 붙어. - 수진
- 그럼 저도 엄청 가난해서 뭔가 돈에 대한 한이 있었던 건가요?
- 남자
- 아니? 그냥 돈이 좋았던 거야, 그 여자는.
캬, 작품 클라이막스쯤에 이런 대사 한 번 날리자. 다이아 같은 거 만지면서
이 곳에 온갖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한데 어떻게 내가 여기 있지 않을 수 있겠어,
여자는 아름다움 속에서야 완벽히 피어나는 생물이야.
어때? 죽이지? 완전 섹시하고 도발적이고, 장난 아니지? - 수진
- 아… 뭐……, 네…….
- 남자
- 왜? 별로 마음에 안 들어?
- 수진
- 네? 아, 그게, 저랑은 좀 역할이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 남자
- 그래? 그럼 다른 거 하지 뭐. 이번 건 청년들에 관한 이야기야.
- 수진
- 와, 청년들 이야기 좋네요.
- 남자
- 그러고 보니 나이도 수진이 너랑 딱이다.
88년생에서 92년생들 얘기를 좀 해볼까 하거든.
부모세대가 이뤄놓은 부를 절대 뛰어넘지 못한다는
요즘 청년들 이야기를 좀 심도 있게 다뤄볼 생각이야. - 수진
- 맞아요, 21세기 들어 우리 세대만큼 불쌍한 세대가 없다면서요.
저랑 제 친구들만 해도 그래요,
어렸을 땐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학교랑 학원 왔다 갔다 하면서 19년을 보내고,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는 상태로 수능을 보고 성적 맞춰 대학 왔더니
이젠 또 토익이다, 텝스다, 컴퓨터 자격증에 대외활동으로 정신없이 4년을 보내고,
졸업이 무섭게 취업 압박, 취업을 안 하면 안하는 대로 죄인이고,
취업을 하면 하는 대로 숨 막히고, 그렇게 어른은 되어 있고
쉴 틈 없이 쳇바퀴처럼 삶이 돌아만 가고 있는데
이 쳇바퀴는 대체 누가 돌리는 건지도 모르겠고… - 남자
- 그래 맞아, 지금의 청년세대는 제대로 숨을 쉬어 보질 못한 세대야.
참 가슴 아픈 일이지. 모두가 그저 지친 정신 밖으로 내몰리고만 있으니…
그래서 주인공은 루저로 정했어.
인문계에 가지 못한 루저, 대학을 가지 못했던 루저, 토익점수조차 없는 루저. - 수진
- 루저라는 말이 참 씁쓸하네요.
이기고 지는 삶 같은 건 없는 건데. - 남자
- 그러게, 여하튼 이 루저는 사회의 부품이 되고 싶어 안간힘을 써.
누군가는 톱니바퀴 같은 삶을 한탄하겠지,
하지만 여기엔 그 톱니바퀴라도 되고 싶어
몸부림을 치는 사람이 있다 하면서 눈물을 막 쏟고 - 수진
- 선배님 저 이 작품은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남자
- 그래, 나도 수진이 너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다!
이 작품에서 너는 어떤 역할이냐면 말이야.
일단 이름은 이은경이야. 예쁘지? - 수진
- 이은경, 네.
- 남자
- 은경씨는 28년을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남자들의 주목을 놓쳐 본 적이 없는 여자였어
그런데 입사를 하고보니 사내에 자기보다 더 예쁜 민대리라는 여자가 있는거라! - 수진
- 네?
- 남자
- 그러니 일에 집중이 잘 안 되는 거지,
평생 세상의 중심은 나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민대리라는 존재가 내 세상을 깨 부숴버린거야!
왜, 원래 여자는 자기보다 더 예쁜 여자 싫어한다며.
하지만 사회라서 제 싫은 감정을 티낼 수 없는 그런 20대 초년생의 갈등과 괴로움!
자아와 비자아의 경계 속에 선 여자의 모습! 어때? - 수진
- 잠깐만요, 선배님 이은경이 그 루저 역할 인 것 아니었어요?
- 남자
- 응? 수진아 감 없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
여자가 그런 역할을 맡으면 좀, 극이 안 살잖아.
남자가 성장을 해야 더 감동이 크게 와닿지. - 수진
- 아니요, 저, 선배님 저도 그런 역할 할 수 있어요.
제가 살아온 인생이랑도 비슷하고 - 남자
- 에이, 어떻게 네가 살아온 인생이랑 주인공 인생이 비슷해
남자가 느끼는 책임감이랑 여자가 느끼는 책임감이 같아? - 수진
- 다를 건 뭔데요?
- 남자
- 하하, 수진아 상식적으로 남자가 더 책임감이 강하잖아. 그것부터가 다른 거지.
여자랑 달리 남자는 한 가정을 먹여 살려야 되잖아,
그러니 당연히 남자가 사회에 버둥거리는 모습이 더 자연스럽고 와 닿지 않겠어? - 수진
- 선배님
- 남자
- 아하 수진이 너 이 역할도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구나?
하긴, 여배우는 좀 까다로워야 매력적이지.
그래도 수진아 결혼하고 은퇴할 거면 괜찮지만,
만약 다시 돌아올 생각 있으면 필모 제대로 채워야 해.
아! 생각났다! 너 원탑 하나 세워줄게! - 수진
- 아니요 선배님, 저
- 남자
- 마침 여자 원 탑인 얘기 둘 있거든.
하나는 모성애 얘기고, 하나는 창녀 얘긴데 이것도 기깔나.
어때 뭐할래?
END
- 호들갑 작가소개
-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잘 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좋은 이야기란, 좋은 사람이란 무엇일까. 이것도 아직 잘 모르겠다.
아직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일까, 그렇지 않은 일일까.
어쨌든 지금 이 순간 내가 제일 모르겠는 건 작가 소개 글이다.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