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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소개서

연지아
123호 2017.09.07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는 공간. A가 구두 소리를 내며 천천히 무대로 나온다. 감정이 없어 보이는 차가운 표정이다. A의 손에는 종이 뭉치가 들려 있다.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다.A 들어오세요. B, C가 영혼 없는 사람처럼 아주 천천히, 그리고 침착하게 무대로 나온다. 그리곤 의자에 앉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는 공간. A가 구두 소리를 내며 천천히 무대로 나온다. 감정이 없어 보이는 차가운 표정이다. A의 손에는 종이 뭉치가 들려 있다.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다.

A
들어오세요.

B, C가 영혼 없는 사람처럼 아주 천천히, 그리고 침착하게 무대로 나온다.
그리곤 의자에 앉는다.

A
이공일칠공팔이사
B, C
네.

B와 C 서로를 경계하듯 바라본다.

A
(혼잣말로) 뭐야. 번호도 똑같아?

냉소 짓는 A.
B와 C는 서로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관객석을 바라본다.

A
당신들이 여기에 온 이유를 알고 있겠죠?

B와 C, 말이 없다.

A
설마... 모르고 있나요?
B
아뇨. 그게 아니라...
C
믿기지가 않아서요.
A
요즘 이런 일은 워낙 흔해서 (웃는다) 그다지 믿기지 않을 일은 아닐 텐데요.

A는 종이 뭉치를 찬찬히 한 장씩 읽어본다.

A
(종이를 살펴보며) 여러분 같은 고스펙자들 사이에서는 아주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이죠. 뭐, 괜찮습니다. 제가 하나 하나 여러분을 시험하면서 밝혀낼 거니까요.
B
(억울한 듯) 면접관님, 저는 거짓된 것을 적지 않았습니다.
C
(B를 째려보며) 그럼 제가 그랬다는 거예요? (면접관을 보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B
그 소개서는 분명 제 거예요. 아무리 물어보셔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C
(B에게) 이봐요.
B
(C의 말을 무시하며, A에게)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
A
(B와 C에게 말리는 손짓하며) 자자, 진정하세요. 이건 여러분들끼리 말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오로지 제가 판단할 문제죠.

A가 박수를 두 번 친다.
D가 나와서 A에게 의자를 주고 퇴장한다.
A가 의자에 앉는다.
B는 D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가 A를 본다.

B
저 분은 누구시죠?
A
여기서 일 하시는 분입니다.
B
(신기한 듯) 여기에도 일을 하는 사람이 있나요?
A
곧 여러분 중 한 사람도 그렇게 될 거예요.
C
그게 무슨...
A
이 인생 소개서가 본인의 것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분은 이곳에서 영원히 일을 하게 됩니다. 설마 모르셨나요?
B
처음 듣습니다.

C가 놀란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A
(C를 쳐다보며) 이곳에서 임의로 나가셔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겁니다.
C
이게 말이 돼요?
A
말이 안 될 건 뭐죠?
C
지금 제 인생을 제 것이라고 주장해야한다는 말이잖아요.
A
잘 이해하고 계시는군요.
C
왜 제 인생이 제 것이라고 남을 설득해야 하는 건가요?
A
두 분이 같은 이력을 쓰셨으니까요.
B
저랑 이 분이랑 모든 게 같나요?
A
적어도 이 소개서 안에 있는 내용은 그렇습니다.
C
말도 안 돼...

C가 털썩 자리에 앉는다.

A
(C를 보며) 그래요. 그렇게 얌전히 앉아서 대답하시면 됩니다. 쉽지 않나요? 자기 인생을 증명하는 건데 뭐가 어려운가요? (짧은 사이) 자, 그럼 조사 시작하겠습니다.

A가 종이를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가리키며 읽는다.

A
여러분이 전공한 학과를 말해보세요. (B를 가리키며) 이쪽부터.
B
경영학과입니다.
C
저도 경영학과입니다.
A
학점은 어떻게 되죠?
B
4.5 만점에 3.9입니다.
C
저도 4.5 만점에 3.9입니다.
A
토익 점수는 어떤가요?
B
980입니다.
C
(뭔가 이상하다는 듯) 980...입니다.
A
두 분 다 한국사 1급이죠?
B, C
네.
A
각자 다니던 회사의 증빙서류를 제출해주세요.

B, C가 가방에서 자신의 서류를 꺼내
A에게 제출한다.
A는 찬찬히 읽어본다.

A
신기하네요. 두 분이 대외 활동이나 인턴 경험도 같고, 다니던 회사도 같으니... (짧은 사이) 인생소개서에 적었던, 기업에 입사하고 싶었던 이유에 대해 말해보세요.
B, C
저는 어린 시절부터 경영, 경제 관념이 투철했고, 그 회사를 동경해왔습니다.

A는 B, C가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고 폭소한다.

사이.

A
어렸을 때부터 경영, 경제 관념이 투철했다니 그게 말이 돼요? 어쩜 그렇게 가식적이죠?
B
어쩔 수 없잖아요.
A
뭐가요?
B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요. 솔직히 비슷한 자기소개서들 이곳저곳에 뿌리는 거, 저만 하는 거 아니잖아요.
A
(냉정하게) 누가 뭐랍니까? 그게 인생소개서까지 이어지니까 문제지.
C
(발끈하며) 그럼 어쩌라는 거예요? 저는 학교 다니는 내내, 회사를 다니는 내내 먹고 살기 위해 노력했어요. 이것저것 스펙도 쌓고 취업이나 승진에 도움 될 만한 경험을 하려고 미친 듯이 노력했다고요. 그런데 그게 문제라고요? 대체 인생소개서랑 자기소개서가 뭐가 다르다고 그렇게 조롱하시는 겁니까?

짧은 사이.

A
저는 여러분들께 본인의 인생을 자유롭게 서술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동안 살아온 인생을 마음껏 활자로 풀어낼 수 있도록 말이죠.

A가 백지를 꺼낸다.

A
보이시나요? 이게 제가 여러분들께 처음 드렸던 소개서 작성지였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학점이 몇인지, 무슨 스펙을 쌓았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항목은 존재하지도 않았고요.
B
어떻게 자유롭게 쓰라는 겁니까?
C
어차피 누군가가 봐야 하는 거잖아요. 누군가가 이 소개서를 보고 판단을 내릴 거 아닙니까.

A는 펼쳐진 종이들을 정리한다.

A
여러분께 기회를 드리려고 했던 제가 멍청했군요. 그냥 영원히 저에게 의자나 갖다 주면서 사셨어야 할 분들이었는데.

A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B와 C가 A를 쳐다본다.

B
저기요, 잠시만요.
A
할 말이 더 남아 있으신가요?
B
저... 저는 주말마다 기타를 쳤어요.

A가 B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B
계속 해도 되나요...?
A
네. 말해보세요.
B
잘 치지는 못해서... 10만 원 정도 되는 입문용 기타를 샀었죠. (기억난 듯) 아, 기타를 산 이유는 기타 학원에서 이상형을 만났기 때문이었어요. 남들보다 더 열심히 연습해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A가 고개를 끄덕인다.
C가 A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연다.

C
저... 저도 말해도 되죠?
A
해보세요.
C
저는 노을이 지는 풍경을 좋아했어요. 초저녁이 되면 담배 피우러 나간다는 핑계로 하늘 사진을 찍었었죠. 날짜별로 컴퓨터에 저장도 해두었어요. 하늘 사진 공모전 같은 곳에 그 사진들을 꼭 내보고 싶었습니다. 어쩌다보니 한 번도 내지 못하고 끝났지만...

B가 자리에서 일어나, 관객을 보며 말한다.

B
(신이 나서) 퇴근하고 마시는 맥주가 너무 좋았어요. 처음엔 국산 맥주를 먹었다가 편의점에서 수입 맥주를 사다 먹기 시작했죠. 그러다가 생맥주를 먹고 싶은 마음에 생맥주 기계까지 샀어요. 마 누라가 요리 솜씨가 없어서 안주가 별로였거든요? 그래서 제가 안주를 만들기 시작했죠. 맞벌이라 돈도 같이 버는데 꼭 여자가 만들라는 법 있나요? 아내가 고맙다고 어깨도 주물러줘서 저는 좋았습니다. 저는 스킨십이 참 좋더라고요. (흐뭇하게) 덕분에 부부금실도 좋았고요.

C가 자리에서 일어나, 관객을 보며 말한다.

C
백지를 보니까 생각났는데... 사실은 제가 고등학교 때 시험지를 백지로 낸 적이 있거든요. 수시로 대학에 붙어서, 학교 기말고사가 필요 없던 때였어요. 그래서 평생 그래본 적 없던 일탈 같은 걸 해본 거죠. (행복한 듯) 너무 짜릿했어요. 문구점에서 300원짜리 샤프심을 훔치던 순간처럼... 아니 뭐 제가 훔쳤다는 게 아니라... 그래요, 사실 열 살 때 한 번 그런 적 있었어요. 뭐, 아무튼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어요. 참 행복했죠.

B와 C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A.

A
드디어 인생을 바로 보기 시작하셨군요.
B
제가 잘 말씀드리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C
혹시 틀린 건 아닐까요...?

A가 백지를 두 장 꺼낸다.

A
애초에 같은 소개서가 나오지 않았다면, 제가 진위 여부를 판단할 일도 없었겠죠. 인생은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영역입니다. 틀림이 아닌 다름이 존재할 뿐이에요. 생을 다하고 나서야 그것을 알게 된 당신들이, 그리고 제가... 참 불쌍할 뿐입니다.

B, C의 앞에 백지를 한 장씩 놓는 A.

A
여러분께 마지막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자유롭게,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인생을 소개해 주세요. 다른 사람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 이 소개서도 백지이지만 백지가 아니게 느껴질 테니까요.

B와 C는 A가 주는 백지를 받고 A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다.
열심히 글을 쓰는 B, C.
사각거리는 글 쓰는 소리 무대 위에 울려 퍼진다.

호들갑 작가소개
<인생소개서>를 쓴 작가 연지아는 쓰기 위해 쓰는 게 아니라, 삶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글을 쓰고 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에서 글과 사람을 공부하는 중이며, ‘창작집단 혜윰’의 대표로서 연극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작가는 연극이 군더더기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때문에 자신을 비롯한 모든 군더더기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