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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

김혜민
125호 2017.10.12
나: 우리 반 113명의 학생은 입학한 첫날 1번부터 114번까지 고유의 번호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리고 있다. 이름이나 키와 같이 일반적으로 번호를 정하는 기준과 우리의 번호에는 어떠한 상관관계도 없어 보였다. 몇몇 학생은 이는 분명 성적순이라고 주장했으나, 중간고사 결과가 발표되자 성적도 우리에게 번호를 지정한 정당...
나
우리 반 113명의 학생은 입학한 첫날 1번부터 114번까지 고유의 번호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리고 있다. 이름이나 키와 같이 일반적으로 번호를 정하는 기준과 우리의 번호에는 어떠한 상관관계도 없어 보였다. 몇몇 학생은 이는 분명 성적순이라고 주장했으나, 중간고사 결과가 발표되자 성적도 우리에게 번호를 지정한 정당한 이유가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여전히 우리의 번호에 대해 끊임없이 그럴듯한 가설을 제기하며 언젠가는 비밀을 밝히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해댔다. 그러나 그 외 나머지 아이들은 번호에 그다지 관심이 없으며, 100명이 넘는 친구들의 이름을 전부 외우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은근히 반기고 있는 듯 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 역시 어떤 이유로 나에게 이런 번호가 붙여졌는지 궁금하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113명 중 1번이기 때문이다. 성적도, 이름의 첫 글자도, 키나 몸무게 그 어느 하나에도 특별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내가 1번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튼 1번이라는 이유로 학기 초엔 아이들에게 주목을 조금 받긴 했지만 (활짝 웃으며 브이를 하고 손을 흔든다.) 그것도 잠시, 바닷가의 수많은 모래알 같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나는 금세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시무룩하고 낙담한 표정)
나
(다시 발랄하게) 한편 학기가 시작되고 내 눈길을 끈 아이는 92번이다. 그 아이의 얼굴이 유난히 하얗고, 웃는 모습이 예쁘기 때문이다.
1번:
안녕 92번?
나
내가 복잡한 책상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 92번 옆에 서서 인사를 건넸을 때, 92번은 눈을 한껏 찌푸리며 칠판을 노려보고 있었다.
1번
여기서는 칠판이 잘 안 보이나 봐.
92번
(1번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응. 안경을 썼는데도 잘 안 보이네. 넌 1번이라 좋겠다.
나
순간 나는 기뻤다. 내가 1번이라는 사실을 92번이 이미 알고 있었다니. 혹시 얘도 나를 몰래 좋아하고 있었던 건가?
1번
(몸을 배배 꼬며) 1번이라고 좋을 것도 없어. 너무 앞자리라서 선생님 침이나 튀고.
92번
(무시한 채 여전히 눈을 찌푸리고 칠판을 보다가 무언가를 받아 적는다.)
1번
우리 이따가 점심 같이 먹을래?
나
그때 아직도 번호의 비밀을 찾아 헤매는 몇몇 무리가 우리 옆을 지나가며 종이 한 장을 건넸다. 92번과의 대화를 방해받기 싫어 종이를 얼른 낚아채고는 92번에게 다시 말을 걸려고 했으나, 92번은 나보다 그 아이들에게 더 관심이 있는 눈치였다.
92번
(종이를 보며) 너네 아직도 탐정놀이 하니? 이 종이는 뭐야?
X번
개인정보 조사서야. 거기에 있는 항목을 토대로 더 체계적이고 분석적으로 번호의 규칙을 캐보려고.
나
얘네들은 정말 노답이다. 중간고사가 끝난 지도 한참 지나 며칠 뒤면 기말고사를 치르고 곧 방학을 할 텐데 아직도 우르르 몰려다니며 저런 멍청한 짓거리를 하고 있다니.
1번
(92번을 보며) 점심 뭐 먹고 싶/
114번
그러니까 하나도 빼먹지 말고 성심성의껏 써주면 좋겠어.
나
이 아이는 114번으로 추정된다. 그렇다. 나는 아직도 우리 반 아이들의 번호를 다 외우지 못했다.
92번
알겠어. 재미있어 보인다. 협조할게.
114번
재미로 하는 건 아니야. 나는 우리 번호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
X번
(비장하게) 우린 사명감을 갖고 임하고 있어.
1번
근데 113번은 왜 없는 거야? 너네 그건 몰라?
나
나는 이때다 싶어 평소 궁금했던 걸 물었다. 우리 반은 총 114번까지 있으나 이상하게도 113번은 처음부터 비어있었다.
92번
113번이 없다구?
나
그러자 114번은 내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114번
(1번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낮은 목소리로) 그건 아직 몰라. 하지만 그것도 알아보고 있어.
나
113번이 없다는 말을 하는데 왜 이렇게 조심스러운 태도를 필요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어쩐지 이 사실을 비밀에 부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쉬는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나는 아쉬운 마음에 92번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92번은 여전히 눈을 찌푸린 채 칠판에 집중하고 있었다. 칠판에는 기말고사 시험 범위와 급식비 납부 기한 따위가 적혀 있었다.
나도 선생님이 오시기 전에 얼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좀 전에 114번에게 받은 종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부모님 이름, 주소, 전에 다니던 학교와 같은 질문이 수십 개나 있었으나, 아무래도 이런 걸로 우리와 번호의 상관관계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어쩌면 규칙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선생님들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정해놓은 번호에 우리만 괜히 들떠서 그 안에 어떠한 고차원적인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는 것뿐일 수도 있다. 나한테 부여된 번호로 인해 어떤 피해를 받은 적도 없는데 이걸 알아내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나는 선생님이 칠판에 필기하는 틈에 뒤를 돌아 114번을 쳐다봤다. (114번을 쳐다본다.) 114번은 교과서도 펴지 않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공책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114번, 교과서도 펴지 않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공책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는다.) 문득 그 옆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부터 비어있던 저 자리에 앉기로 되어있던 건 누구였을까. 그리고 그 아이는 무슨 일로 학교에 한 번도 오지 않고 있으며, 그럴 바엔 애초에 113번이라는 번호를 왜 그 아이에게 준 것일까. 이럴 거면 처음부터 113번이 마지막 번호가 되는 게 맞지 않았을까. 갑자기 지금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여러 가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선생님
자, 이건 1번이 나와서 풀어보자.
나
선생님의 한마디에 나는 화들짝 놀라 칠판을 쳐다봤다. 칠판에는 주기율표가 한가득 그려져 있었다.
선생님
빈칸에 알맞은 이름을 채워 넣어봐.
호들갑 작가소개
낮에는 웃음이 많고, 밤에는 생각이 많은 사람.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