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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 데이트

손명진
126호 2017.10.26
등장인물 김예술(30대 초반 남성)서지성(20대 후반 여성)김예술 엄마(무대에 등장하지 않고 목소리만)온라인 커플 매니저(무대에 등장하지 않고 컴퓨터스피커에서 나오는 자동기계음성처럼) 무대 중간 칸막이. 분리된 두 공간은 서로 다른 장소. 한 쪽은 김예술의 방안. 자고 일어난 이불 그대로 방구석에 대충 밀어져 있고 김예술은 방바닥에...

등장인물
김예술(30대 초반 남성)
서지성(20대 후반 여성)
김예술 엄마(무대에 등장하지 않고 목소리만)
온라인 커플 매니저(무대에 등장하지 않고 컴퓨터스피커에서 나오는 자동기계음성처럼)

무대 중간 칸막이. 분리된 두 공간은 서로 다른 장소. 한 쪽은 김예술의 방안. 자고 일어난 이불 그대로 방구석에 대충 밀어져 있고 김예술은 방바닥에 앉아 피규어들을 일렬로 늘어놓고 면봉으로 하나씩 청소하고 있다. 다른 쪽은 서지성의 원룸 자취방. 집안 곳곳에 옷들이 널브러져있다. 그녀는 침대위에 엎드려 누워서 감자 칩을 집어먹으며 만화책을 쌓아두고 읽고 있다. 둘 모두의 방안조명은 다소 어둡고 각각의 방에 있는 컴퓨터 모니터만 환하게 켜져 있다. 모두의 방안에 알림소리가 울린다.

온라인
커플 매니저
예약하신 판타스틱 데이트 시간입니다. 10회 차도 쾌적한 환경에서 진행될 수 있도록 지시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김예술과 서지성 모두 하던 일 멈추고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 화면을 주시한다.) 먼저 스타일 선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패션아이템들과 스타일링 서비스가 종류별로 화면에 보여 질 때마다 원하시는 품목위에 지문등록하신 손가락을 대시면 자동소액결제 된 후 최초 등록하신 얼굴과 체격에 반영되고 두 분 모두의 스타일 선택이 완료되는 즉시 상대방의 화면에 최종 사진으로 보여 집니다.
김예술
(화면 보며 잠시 고민하다) 에이, 어차피 진짜도 아닌데 싼 걸로 하자. (화면에 몇 차례 손가락을 댄 후) 오케이, 끝!
서지성
이것도 예쁘고 저것도 예쁘고... (화면을 몇 차례 누른 후 잠시 고민하다 조심스레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화면에 댄다.)
온라인
커플 매니저
얼굴과 체격요건을 변경하실 경우 성형에 해당되어 상대방이 변경된 외모로도 데이트를 진행할지 동의를 받는 절차가 추가됩니다. 진행하시겠습니까?
서지성
(다리를 떨어가며 건들건들하게) 성형이 아니라 양심선언인데... 그렇다고 그냥 내비 두면 보자마자 배신감에 멱살 잡힐지도 모르고...
김예술
(기다리는 게 지겨운 듯 컴퓨터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정신 사납게 두드리며) 어차피 온라인에선 다 뻥인데 뭘 진지하게 고르느라 시간을 잡아먹어? (못 참겠다는 듯 버럭) 아, 이래서 여자들은 안 돼!
서지성
(결심한 듯) 에잇! 어차피 직접 안 만나면 되는 거 뭐. (화면을 누르며) 완료!
온라인
커플 매니저
두 분 모두의 스타일링이 종료되었습니다. 이제 마이크 헤드셋을 착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착용하시는 순간부터 마이크에 감지되는 발화내용은 기존에 설정해두신 목소리로 변환된 후 상대방 컴퓨터로 자동 전송되어 헤드셋을 통해 들려집니다. 전송을 원치 않으시는 내용은 발화 후 3초 내 삭제를 원하시는 단어 수만큼 “삭제”라고 반복말씀하시면 됩니다. “삭제”라는 단어자체는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자 그럼, 예술님과 지성님의 판타스틱 데이트 시작합니다. 좋은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김예술, 서지성 모두 헤드셋 끼고, 처음 있던 곳으로 돌아와 아까 하던 일을 계속 한다.

서지성
(만화책 보면서 무미건조한 말투로) 어머, 예술님! 오늘은 완전 뉴요커 느낌이네요. 멋지세요.
김예술
(피규어를 면봉으로 손질하며 역시 무미건조한 말투로) 지성님도 아까 신경 많이 쓰시는 것 같더니 오늘 유난히 고혹적이시네요.
서지성
(만화책을 넘기면서) 죄송해요. 아까 제가 너무 시간을 끌었죠?
김예술
여성이 아름다움을 위해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라면 얼마든지 대환영이에요. 인류가 지구평화에 들인 시간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는 거에 비하면 훨씬 생산적이죠.
서지성
세상에 예술님 같은 분들만 계시면 마초문화와 페미니즘의 극렬한 대립과 반목에도 종말을 고할 수 있을 텐데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입으로만 웃으며) 호호호호.
김예술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입으로만 웃으며) 하하하하.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그나저나 지성님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계시나요?
서지성
(읽던 만화책을 바닥에 휙 던지고 새 만화책을 집으면서) 밀린 독서 좀 하느라고요. 예술님은요?
김예술
(다른 피규어를 집어 들어 면봉으로 닦으며) 전 엊그제 옥션에서 컬렉트 해 온 작품들 감상도 하고 정리도 좀 하고... 근데 무슨 책 읽고 계셨어요?
서지성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다룬 책이라고 할까? (보던 페이지를 빠르게 훑고 다음 페이지로 넘기면서) 인간의 희로애락을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세상의 가식, 기만, 위선에 당당하게 맞서는 성숙한 두 남녀의 내면을 음...(다음 페이지로 넘기면서) 아방가르드 적으로 표현한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이죠.
김예술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대중예술평론을 주로 하신다더니... 근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책 제목이?
서지성
제목은... (읽던 만화책을 돌려서 표지를 보다가 다시 휙 돌려 읽으며) 중요치 않아요. 그 안에 담긴 사상이 중요하죠.
김예술
외면보다 내면이 중요하다...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피규어를 면봉으로 닦으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대화를 할수록 지성님은 제 소울메이트 같다는 확신이 들어요. 요즘처럼 수박 겉핥기식의 얄팍한 지식과 싸구려 감성, 저급한 언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지성과 품격을 갖춘 여성... 정말 찾고 있었거든요.
서지성
(만화책을 넘기며 무심결에) 예술님도 짱!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삭제! (안도하며) 여러모로 안목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김예술의 방문이 벌컥 열린다. 김예술, 화들짝 놀란다.

김예술 엄마
(무대 등장 없이 목소리로만) 밥 처먹으라고 몇 번을 말해! 지 해달라는 대로 돼지고기 등뼈 사다가 김치랑 지져놨더니 방에 쳐 박혀서 뭐하는 거야? 그 나이 먹도록 변변한 직업 없이 맨 장난감 조무래기만 사 들이고 아직까지 엄마한테...
김예술
(엄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미친 듯이) 삭제! 삭제! 삭제! 삭제! 삭제! 삭제! 삭제! 삭제! 삭제! 삭제! 삭제! 삭제! 삭제! 삭제! (일어나 문을 걸어 잠그고 돌아와 앉으면서도) 삭제! 삭제! 삭제! 삭제! 삭제! 삭제! 삭제! 삭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삭제! 삭제! 삭제! 삭제! 삭제! 삭제! 삭제! (숨을 몰아쉰다.)
서지성
(한참을 대꾸가 없자) 예술님? (귀를 쫑긋 세우다가 갸우뚱) 밥이요?
김예술
(둘러대며) 아...인간에게 지성은 밥만큼 중요하다는 거죠. 그나저나 말 나온 김에, 식사 하셨어요?
서지성
네, 뭐...대충...(과자 봉지를 집어 들고 포장 앞면을 읽으며) 얇게 저민 포테이토에 꿀과 사워크림을 섞어서 얹고 파슬리 가루를 뿌려서 오븐에 구워낸 간단한 브런치로...(남은 과자를 입에 털어 넣은 후 봉지를 휙 던지며) 예술님은요?
김예술
저도 뭐 곧...
서지성
뭐 드실 건데요?
김예술
음... 그냥 간단하게... (머뭇거리다) 프렌치?
서지성
(왠지 밀리는 느낌에 못마땅하다는 듯) 아... 간단하게 먹어서 프렌치?
김예술
정통 프렌치는 아니고... 한식과의 퓨전이랄까? 베이비 폭립에 매콤한 소스를 곁들이는 식으로...
서지성
저도 퓨전을 좋아해요. 레볼루션적이면서 리버럴한 게... (창문 바로 앞에서 트럭 과일 장수의 확성기 소리로 “토마토가 왔어요. 참외가 왔어요.”가 들리자 후다닥 일어나 창문을 닫고) 삭제! 삭제! 삭제!
김예술
(갸웃거리며) 토마토요?
서지성
아...그...(순간 번득인 듯) 밖에 파머스 마켓이 열리고 있거든요. 토마토가 보이기에 무심결에...
김예술
(피규어 손질을 멈추고) 파머스 마켓이라...(부럽다는 듯) 왠지 지성님은 창밖만 내다봐도 숨통이 트이고 힐링되는 그런 곳에서 사실 것 같아요. (자신의 방을 둘러보며 한숨 쉰 후 조심스레 말을 꺼내며) 우리 이제 이 10회 차 온라인 데이트 마치고 나면 실제로 만나서 인연을 이어갈지 결정해야 되잖아요? (기대에 가득차서) 그때 제가 지성님 거주하시는 곳으로 찾아갈게요.
서지성
(당황하며) 네? 아... 네. 근데 그 보다 제가 찾아뵙는 거 좋을 거 같아요. 예술님이 수집하시는 게 주로 조소작품들이라고 했죠? 작품들 언급하실 때마다 레트로풍에 미니멀리즘을 극대화시킨 팝아트 적일 거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꼭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요.
김예술
(난감한 표정으로 자신이 늘어놓은 피규어를 죽 바라보다가) 글쎄요... 전 예술 애호가랍시고 수집한 작품을 누구한테 보여주고 뭐 이러는 사람들 보면 좀... 괜히 과시하는 거 같고... 요즘 예술은 자본과 결탁하면서 부유함과 그에 걸 맞는 교양까지 갖추고 있다는 걸 남에게 강박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느낌이 없지 않아 참 안타까워요. 지성님은 이런 제 마음을 이해하실 수 있나요?
서지성
어... (머뭇거리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그럼요! 공감하고말고요. 요즘 예술계의 큰 문제죠.
김예술
역시 지성님! (표정 없이 입으로만 웃으며) 하하하하.
서지성
우린 정말 천생연분인가 봐. (표정 없이 입으로만 웃으며) 호호호호.

각자의 스피커에서 알림 소리가 난다.

김예술
(기다렸다는 듯) 이 소리는...
서지성
(역시 기다렸다는 듯) 온라인 커플 매니저가 제안하는 최적의 데이트 시간 10분이 지났단 신호죠!
김예술
(조심스럽게) 그럼 이제...
서지성
오늘도 데이트 시간 연장하고 싶긴 한데 그 동안 너무 바빠서 못 읽은 책도 읽어야 되고... 하지만 예술님 의견에 전적으로 따를게요.
김예술
(안타깝다는 듯) 저도 진짜 연장하고 싶지만 지성님이 책을 그렇게 읽고 싶어 하시는데 존중해드리지 않을 수가 없네요.
김예술, 서지성
(반색하며 동시에 일어나 컴퓨터로 다가가면서) 그럼...
서지성
Au Revoir. (*프랑스어 작별인사)
김예술
Adios. (*스페인어 작별인사)

김예술과 서지성 모두 헤드셋을 벗어서 내려놓고 컴퓨터로 가서 화면 어딘가에 손가락을 댄다.

온라인
커플 매니저
예술님과 지성님의 온라인 데이트가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오프라인 만남을 이어가시려면 보이는 화면에 연락 가능한 번호를 입력해주시기 바랍니다. 3초 내에 입력을 시작하지 않으시면 화면은 자동 종료되며 그 동안의 모든 데이트 기록은 삭제되고 다음에 접속하실 때 새로운 데이트 상대를 고르셔야 합니다.
김예술
(아무 것도 건드리지 않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방문 열고 퇴장하며) 엄마! 밥 줘!

서지성 역시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기지개 켠 후 침대에 누워 만화책을 집어 든다. 불이 꺼진다.

호들갑 작가소개
폭력과 기만 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색가.
광야에 길이, 사막에 강이 나서 풀 위에 솟아난 버드나무 그늘 아래 승냥이와 타조도 목을 축일 수 있을 날을 고대하는 나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