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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나

김지나
128호 2017.11.23
등장인물여자1(70대) 여자2(5세)여자1과2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있다. 오후 네 시쯤 되었다, 둘 사이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날은 서서히 저문다. 여자1과 2는 하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여자1은 하드 아이스크림을 거의 다 먹었고, 여자2는 하드 아이스크림 윗부분을 할짝할짝 혀로 핥아 먹고 있다. 여자1의 말씨는...

등장인물
여자1(70대)
여자2(5세)

여자1과2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있다. 오후 네 시쯤 되었다, 둘 사이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날은 서서히 저문다. 여자1과 2는 하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여자1은 하드 아이스크림을 거의 다 먹었고, 여자2는 하드 아이스크림 윗부분을 할짝할짝 혀로 핥아 먹고 있다.
여자1의 말씨는 한국말의 표준어 억양을 쓰려고 노력하지만, 여러 가지 억양이 섞여 있다.

여자1
(하드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고 차가워하며) 드실 만 하세요?

여자2, 하드 아이스크림을 혓바닥으로 핥아 먹는다.

여자1
요것 참 요상스러운 게, 입에 들어가면 달아서 샤샤샤 하고 녹는 것 같으면서, 갑자기 순간 멀끔히 추워진단 말예요.

여자2, 하드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는다. 입 주위에 하드 아이스크림이 묻어있다.
여자1, 그런 여자2를 보고, 주머니 가방 안에서 물티슈를 꺼내 닦아준다.

여자1
요사이 꽤나 추웠어요.
(여자2를 빤히 쳐다보며)
또 오셔서 고마워요.
이렇게 만나니까 참 좋네요. 춥진 않으시죠?

여자2, 고개를 끄덕거린다.

여자1
네에, 예전 같았으면 이 정도 추운 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는데 말예요.
나는 내가 뱃속에 있었을 때부터 추운 걸 알았단 말이지요.
다 기억나요. 그래도, 어머니가 그 차건 열차 바닥에 배 안 닿게 할라고,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이고...

어디선가 기차 소리가 들린다.

여자2
기차!

여자2, 다시 하드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는다.

여자1
짐 보따리 싸가지고 만날 도깨비마냥 열차를 타고 이사를 다녔지요.
기억나요? 돌멩이가 잔뜩 있는 땅에 처음 갔을 때, 여기 이렇게 몰아놓고 우리가 여기서 어찌 사냐고 어머니가 우셨는데.
(여자2를 흘깃 쳐다본다.)
어머니가 명희야, 별 보러 가자, 하면 또 이사 가야 되는 구나 했어요.
(사이)
철컹철컹 쇳 냄새에, 춥고 고달프긴 했어도.
사람이 앞으로 걸어갈 때면 잘 모르는데, 기차는 옆으로 가니까.
뚫린 문으로 보이는 저 별은 거기 가만히 있고.
촘촘한 별들은 반짝반짝 손을 흔들고.

기차가 큰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손을 들어 흔든다.

여자1
그 풍경은 늘 같지요.

여자1, 벤치에 다시 앉아, 여자2의 입을 닦아 준다.

여자1
발에 채이는 돌 줍고, 척박해도 괜찮으니깐.
우리 가족 어디 한 군데 이불 펴고 살자 하는 게 소원이었는데 말예요.
그래도 땅 열심히 파서, 우리 다섯이 나란히 누우니까. 어머니가 요렇게 쳐다보시더니, 이쁘다. 이쁘다. 너희들은 꽃이야, 땅을 장식하는 꽃.
하고 말하셨던 게 생각나요.
(웃으며) 요즘엔 제가 하늘에 누워있답니다.

여자1, 여자2를 빤히 쳐다보다 하드 아이스크림을 한 입 물어 먹는다.

여자1
아니 글쎄, 여기는 그 흔한 게 쌀밥인데 (여자2에게 속삭이며) 맛대가리가 하나 없어요.
슈퍼에서 그 딱딱한 밥 사와서 렌지 돌려 먹으니까 편하긴 하드만..
옛날에도 그게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근데 또 편리한 것들은 참 정이 없어요, 정이.

여자1, 여자2가 하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얼굴이 묻히고 흘린 것을 물티슈를 뽑아 닦아준다.

여자1
(여자2의 손을 닦아주며) 여기 오니까 여자들 손이 어찌 하얗고 예쁜지.
(자기 손을 펼쳐보며) 여자들 손은 두툼해야 좋은 거라고, 일해야 되니까.
우리 시어머니는 맨날 나보고 손이 약해서 못쓴다고, 맨손으로 단련해야 된다고 했어요,
한 겨울에 맨 손으로 밭일하고.
철한이 그 놈은 맨날 나 못생겼다고 놀리고...

여자2, 여자1을 쳐다본다. 둘 함께 웃는다.

여자1
우리 며느리도 손이 안 예뻐요.

여자1, 여자2가 추울까 목도리를 풀러 어깨에 둘러준다.

기차가 지나간다.
여자1, 일어나 빤히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본다.
손을 들어 흔든다.

여자1
다음에는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로 태어나고 싶네요.
여자2
물고기?
낚시꾼한테 잡히면 어떡해.
여자1
그러면 어때요.
자유롭게 헤엄치다가, 잡히는 게 그 운명이면, 그렇게 살다가 가는 거지.

여자1, 여자2를 안아 자기 무릎에 앉힌다.

여자1
이그, 이러다 매느리한테 들키겠어요. 찬 아이스크림 먹였다고.
이제 그만 이리주세요.

여자2, 싫다고 한다.
여자1, 행복하게 웃는다..

여자1
그럼 조금만 더 드세요.

여자1, 주머니 가방에서 휴대용 카세트를 꺼낸다. .

여자1
아들이 사다줬어요. 며느리 몰래.
옆집 그 까만 청년이 한 번 들려줬던 노래가 있는데, 그게 자꾸 맴돌아서 잠두 안 오잖아요.
그래서 우리 쎄르게이한테 부탁했더니, 이거 사서 그 노래 담아줬어요.
(사이)
그, 세 번째 열차에서 얼어 죽은 우리 막내 이름이 아마 라이자였나요...
장미. 라이자.

여자1, 카세트를 만지작거린다.

여자1
우리 아들이 여기 와서 살자고, 오라고 불렀을 때,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몰라요.
돈 번다고 한국 간 내 아들, 죽은 줄만 알았는데.

기차가 지나간다.
여자1, 손을 흔든다.

여자1
달나라 가는 것처럼 가슴이 콩닥콩닥 뛰더라고요.
동네사람들이 우리 아들 부자 되서 고향땅 돌아간다고 좋아해줬어요.
잘 가라고 파티도 해주고.
그런데, 여기 올라고 고생 엄청 했죠. 뭐라더나, 나라 허락 받아야 한다고.
그, 비-자. 내가 여기 오는데 그게 필요하다나.
우리 어머니가 맨날 이야기 해주신, 그 고향땅 한 번 가겠다 싶던 게 서운해 많이 울었어요.
엄마가, 명희야, 너는 김해 김씨.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된다.
까레이츠 김아냐는 한국에, 김해 김씨, 김명희.
(사이)
김해 김씨, 김명희.
그래도, 다행히 어찌어찌 3년 만에 한국에 오긴 왔네요.
김해는 어딘지 아직 못 가봤어요.

여자2, 여자1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여자1, 가방에서 투명한 플라스틱 통을 꺼내 하드 아이스크림 남은 것을 소중히 넣는다.

여자1
근데 고향땅에 왔는데, 고향이 있는 건 아니데요.
고향이라는 건, 이 가슴에만 있는 건지. 어디에 있는 건지.
아들, 며느리는 돈 벌기 바빠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고.
여기는 영 사는 재미가 없어요.
며느리는 말이 너무 따박따박 해서는, 어디 말 한 번 붙이기 힘들어요.
서로 말도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집에서 서로 한국말을 해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라요.
서울말 써야 무시 안 당한다고 맨날 텔레비 켜놓고 배우고.
(사이)
그 때 옛날 엄마랑 살던 그 추운 파란 집에 가고 싶어.
이제는 아무 것도 없는 땅덩어리겠지만.
이리나 할머니랑.. 니꼴라이도 보고 싶고.
맛없는 두꺼비 감자는 왜 그렇게 먹고 싶은지.

여자1, 여자2를 손으로 토닥토닥 한다.

여자1
이 생에는 따뜻하고,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고생 없이 살아요.
행복하게.
저도, 늦게나마 따뜻하게 아주 잘 살았어요.
인생 한 번... 참 기네요.

여자1, 카세트를 재생한다. 여자1, 흥얼흥얼 노래를 부른다.

여자1
어머니도 잘 알다시피 나는 노래 부르는 게 참 좋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왠지, 가슴이 텅 비어있는 느낌이거든요.

해가 지는 듯, 노을의 푸르고 붉은 빛이 들어온다.
벤치에 놓인 플라스틱 통 하드 아이스크림이 녹는다.

여자2가 뒤척거린다.
여자1, 카세트의 노래를 끈다.

여자2
할머니 추워.

여자1, 여자2의 옷매무새를 잘 챙긴다.

여자1
그래요, 갑시다. 이제 돌아갑시다.

여자1, 여자2를 등에 업고 일어난다.

여자1
가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고.

여자1, 가방을 챙긴다.

여자1
(혼잣말로) 저녁은 뭘 해 먹이나.
여자2
물고기!
여자1
(웃으며) 그럽시다.
가는 길에 고등어나 한 마리 사가야겠네.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천천히 걸어간다.

호들갑 작가소개
간격의 경계에서, 시간의 무대에서.
어딘가 모르게 활기차고, 묘하게 슬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