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검색

검색영역

로봇 상사

김병일
129호 2017.12.07
등장인물 매니저 K(로봇, 제조일로부터 6개월)201번 남자(35세)301번 여자(27세)어두운 무대를 향한 2개의 책상 위에는 각자 키보드 자판이 놓여있고 정장차림의 성인 남녀가 마치 초등학교의 짝궁처럼 나란히 앉아 반쯤 풀린 눈으로 쉼 없이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그 옆으로는 로봇(동작이 없으므로 쌓아올린 상자 등으로 형...

등장인물
매니저 K(로봇, 제조일로부터 6개월)
201번 남자(35세)
301번 여자(27세)

어두운 무대를 향한 2개의 책상 위에는 각자 키보드 자판이 놓여있고 정장차림의 성인 남녀가 마치 초등학교의 짝궁처럼 나란히 앉아 반쯤 풀린 눈으로 쉼 없이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그 옆으로는 로봇(동작이 없으므로 쌓아올린 상자 등으로 형상화해도 무방하다)이 감시하듯 몸체 위에 붙은 조명 불빛으로 작업자 둘을 서서히 번갈아가며 비추고 있다. 마치 감옥 시설에서 수감자들을 감시하는 조명탑의 조명처럼.

무대, 적막한 가운데 빠른 타이핑 소리만 들리고 자판 위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손과 다르게 남녀의
눈은 점점 반쯤 감겨 간다.
남자의 고개가 점점 떨구어지는 찰나, 옆에 앉은 여자가 로봇의 눈치를 보며 팔꿈치를 툭툭 치며
남자를 잠에서 깨운다.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는 남자. 손으로 침을 닦으며 자판 두드리기에 다시 열중한다. (사이) 초등학교 쉬는 시간을 알리듯 경쾌한 전자음이 울린다.

매니저 K
(여성의 밝고 경쾌한 음성) 자, 즐거운 휴식시간입니다. 다음 일과를 위해 모두 기분 좋게 밝은 에너지를 충전하세요.

로봇의 조명이 꺼지며 밝아지는 무대.
남자, 자리에서 일어나 로봇에게 가까이 다가가 전원이 꺼졌는지 확인한다.
전원 오프를 확인하고 화풀이하듯, 칠 듯이 주먹을 그러쥐었다가 내린다

201번 남자
(화가 난 듯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아이, 젠장할 고철덩어리. 꼭 마치 수감당한 범죄자 취급하면서 숨도 못 쉬겠어! 갑갑해서 살 수가 있나 이거 원.
301번 여자
(손거울로 화장을 고치며) 그래도 선배는 곧 있으면 190번대로 승급하잖아요. K55 섹터에서 2명이나 과로로 쓰러졌다네요. 그럼 2명이니까...199번이네요? 축하해요 선배. 난 언제 200번대로 승급하나. 어느 세월에 연금 받으면서 인간답게 살 수 있을지. 휴~ (손거울을 내려놓으며 자신의 미래가 갑갑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우리 팀 로봇 매니저는 빡세지도 않고 공과 사도 분명하잖아요.
201번 남자
(웃긴 듯 여자를 쳐다보며) 공과 사가 분명해? 네가 뭘 몰라서 그래. 내가 한 두번 겪어본 줄 알아? 만들어진 지 6개월도 안된 신참내기라 그렇지. 결국엔 조금 지나면...위엣 것들은 다 똑같아져. 로봇이든. 인간이든 그런데 넌 우리 둘 밖에 없는데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맨날 화장이니?
301번 여자
(무안한 듯 화장품과 손거울을 급히 내려놓고 어색하게 웃는다) 아이참...다...선배한테 이쁨 받으려고 그러는 거죠? 호호...호호..
201번 남자
(어이가 없는 듯 웃으며) 쳇. 자판만 두들기는 노예한테 이쁨 받아서 뭐하시게. 저 깡통로봇한테 잘 보여야지. 혹시 알아? 잘 보이면 나보다 승급이 빠를지?
301번 여자
(놀란 눈으로) 정말 선배보다 승급이 빠를 수도 있어요? 난 선배가 죽거나 퇴사해야 내가 승급되는 줄 알았는데. 하하하. (남자의 눈치를 보고 손을 저으며) 아이. 농담한 거예요. 호호.
201번 남자
(화가 난 듯) 야! 무서운 소리하지 마라. 안 그래도 하루하루가 지우개처럼 닳아 없어지는 기분인데... 그래도 우린 글쟁이들이니까 이렇게 편하게 작업하는거지. 그렇지 않으면 하수처리장에서 저 피도 눈물도 없는 로봇들한테 시달리다가 정말 과로로 저 세상 갔을지도 몰라. 그나저나 마감시한이 가까워오는데 작품을 아직도 완성 못 해서 큰 일이네. 또 벌점 먹는 건 아닌지.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초조하게 여자를 바라보며) 넌 작품 다 완성해 가니?
301번 여자
(여유롭게 웃으며) 네. 전 조금만 다듬으면 될 것 같아요. 이번 작품은 ‘세상에 혼자만 살아남은 남자’에 관한 이야기예요.
201번 남자
(질투가 나는 듯)오~ 꽤나 흥미로운 스토리인데...깡통 로봇한테 가산점 좀 받겠는걸.
301번 여자
(남자의 얘기를 듣다 말고 시계를 보며)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저, 금방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매니저님 켜지면 금방 다녀올 거라고 잘 좀 말해 주세요. 알았죠?
201번 남자
매니저님은 무슨... 알았어. 빨리 다녀와. 곧 작업시간 시작되니깐.

무대 밖으로 퇴장하는 301번 여자. 여자가 무대 밖으로 사라지는 걸 확인한 후 201번 남자는 조심스레
여자의 책상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아 모니터 화면을 보듯 무대를 응시한다. 잠시 후 자판을 마구 눌러댄다. 마치 여자의 글을 망쳐놓으려는 듯.
(사이)
일과 시작종이 올리며 무대 다시 어두워지고 로봇매니저의 녹음된 음성이 나온다.

매니저 K
(전과 다르게 남성의 단호하고 딱딱한 음성) 일과시간 시작합니다. 자리에 착석하여 업무에 집중하여 정해진 시간 내에 과업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합시다.

전원이 켜진 로봇매니저의 조명이 책상 위를 서서히 비춘다.
301번 여자의 빈 자리에 조명의 빛이 멈추자, 로봇매니저에게 다가가는 남자.

201번 남자
(고자질하듯 능청스럽게) 아, 301번이요? 뭐 자기는 어차피 글도 잘 안 써지고 포기하고 잠이나 자러 간다고 나가던데요? 요즘 애들은 참 당돌하고 포기가 빨라요. (비밀을 속삭이듯) 아 그리고 매니저님, 이런 말씀 안 드리려고 했는데... 입에 담기도 좀 그렇습니다만...쉬는 시간마다 301번이 매니저님 험담을 그렇게 하네요. 제조한 지 6개월도 안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깡통이라나 뭐라나... 공과 사도 구별 못하는 신참내기 상사라고... 에휴. 어쩌려고 저렇게 막 나가는지 원.

201번 남자,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주위를 살피며 로봇매니저에게 올려놓는다.

201번 남자
그리고... 저 이건 새로 나온 고속 충전 배터리입니다. 몇 달간의 급료를 모아서 구매한 겁니다. (90도로 인사를 하며)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201번 남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로 돌아와 앉자, 잠시 후 로봇 매니저의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무대로 들어와 자리에 착석하는 301번 여자.

301번 여자
(속삭이듯) 선배, 그거 알아요? 곧 K20섹터에서 새로운 로봇 매니저가 부임한다네요. 철저한 원칙주의 로봇이라는데...더 빡세지는거 아닌가 몰라요?

여자가 말하는 사이, 로봇이 비추던 조명 불빛이 점점 어두워지며 무대도 점점 어두워진다.

201번 남자
왜 이러지...빛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오류가 난 건가?
301번 여자
매니저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새로운 매니저가 부임하는 걸 거예요.
201번 남자
그래? 그럼 나는...아니 우린 어떻게 되는거지?
301번 여자
(한숨을 내 쉬며)별 수 있나요. 직장인이... 또 새로운 상사에게 적응해야지요.
201번 남자
(머리를 감싸며 고개를 숙인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무대 점점 어두워지며 암전. 막.

호들갑 작가소개
직장을 다니다가 문득, 잊고 있던 스무 살 즈음의 꿈이 떠올라
다시 글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 여기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는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