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검색

검색영역

제로의 영역

이민호
132호 2018.01.25
두 명의 배우는 같은 방에 있지만, 서로 보지 못한다. 카카오톡 (이하, 카톡) 이라는 가상공간과, 그리고 벽을 두드리는 소리 (실제로는 테이블 두드리는 소리)로만 소통하게 된다. 무대 곳곳에는 모니터가 배치되어 카톡 메시지를 관객이 직접 시청 할 수 있도록 셋팅 한다. 무대 조명 톤은 전체적으로 어둡다. 핸드폰 불빛과 최소한의 조명만...

두 명의 배우는 같은 방에 있지만, 서로 보지 못한다. 카카오톡 (이하, 카톡) 이라는 가상공간과, 그리고 벽을 두드리는 소리 (실제로는 테이블 두드리는 소리)로만 소통하게 된다. 무대 곳곳에는 모니터가 배치되어 카톡 메시지를 관객이 직접 시청 할 수 있도록 셋팅 한다. 무대 조명 톤은 전체적으로 어둡다. 핸드폰 불빛과 최소한의 조명만으로 운영하여 모니터 화면의 가독성을 극대화한다. 남자가 보내는 카톡 메시지 옆에는 1이라는 숫자가 옆에 항상 붙어 있다. 여자 메시지 옆에는 0 이라는 숫자가 항상 붙어 있다. 카톡 알림임은 관객에게 들리지 않지만, 남녀 모두 카톡 메시지가 도착할 때 마다 반응한다.
무대 배경은 창문 없는 고시텔의 작고 좁은 구석방. 벽은 없고 바닥의 노란 선으로 방 구획표시가 있고, 그 안에 가구들만 배치되어 있다. 좁은 방안에 침대와 테이블이 직각으로 겹쳐 놓여 있다. 테이블 밑에는 작은 냉장고가 있고 냉장고 바로 옆에 사람 1명 정도 들어갈 공간이 있다. 테이블 위에는 작은 TV가 놓여 있다. 테이블 구석에 수건이 아등바등 매달려 말라가고 있다. 바닥에는 개지 않은 게으른 옷과 뱀의 허물같은 벗겨진 양말. 그리고 검정비닐봉지와 술병이 지난밤 숙취처럼 어지럽게 방에 널려져 있다. 냉장고 옆 구석자리에 여자가 쪼그리고 앉아있다. 커플 액세서리가 붙어 있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고개를 폭 숙이고 있다.

※ “카톡 메시지”는 TV화면에 뿌려지고, 배우의 대사로도 구현되며
대본 전체가 디지털 대화, 아날로그 독백으로 구성 됩니다.
대본상 카톡 메세지는 [ ] 기호로 구별됩니다.
카톡 메시지는 필요에 따라 이모티콘이 추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남자 등장. 비척대는 걸음은 취기를 머금고 있다.

남자
어제 준거 같은데. 아니라고. 그럼 주면 될 거 아니야. 그거 얼마나 한다고 사람 무시 하냐 (문을 열고 들어간다) 내가 월세 밀리고 싶어서 밀리나. 알바비가 밀리는 걸 어쩌라고. 됐어 됐어. 내일 또 현금 서비스 받으면 돼. (불을 켜려고 하지만 형광등이 안 켜진다. 한숨) 그지 같은 고시원. 이래 놓고 돈만 받아 처먹어. 뭐하나 제대로 된 게 없냐.

어둠속에 가방을 던져놓는다. 잠꼬대 같은 혼잣말을 떠안고 침대에 쓰러진다. 취기가 너무 올라서 오히려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인다. 일어나 앉는다. 허허롭다. 가방을 뒤척이며 핸드폰을 꺼낸다. 여자 핸드폰의 커플 액세서리와 세트인 액세서리가 남자의 폰에도 붙어 있다. 카톡 메시지를 보낸다.

남자
[자?]
여자
(여자는 고개를 들어 카톡 메시지를 확인한다.) 아니. 잠이 안 와. [자. 자고 있어. ㅡ.ㅡ+]
남자
[보고 싶다]
여자
나도 [또 헛소리한다. 또 술 먹었지? 내가 술 먹고 연락하지 말라고 했어 안했어?]
남자
[당신 합격 기념으로 축하주 한잔 했지. 취하진 않았어. 딱 맥주 한잔만 했다.]
여자
[오빠는 인생이 온통 핑계고 변명이야. 그러니까 사는 게 그 꼴이지. 변명만 하면서 공부도 안하잖아. 난 벌써 9급 붙었는데 오빤 언제 9급 하려고..]
남자
내가 공부를 안 한 거냐? 못 한 거지. 대신에 돈 벌고 있잖아.
여자
[나 먹여 살리겠다고 입만 나불거리지. 한 게 뭐 있어? 공부는 그렇다 치고.. 집이 있어? 제대로 된 직장이 있어? 적금이라도 들어 놓은 거 있냐고? 오빠 계속 그렇게 살면 루저야. 쓰레기라고. ]
남자
(기가 막힌다) 야, 니가 그러면 안 돼지. 다른 사람이 다 그래도 너는 그러면 안 돼지

여자, 괴로운듯 테이블을 친다. 옆방에서 벽을 치는 소리와 중의적인 울림이다.

남자
(옆방을 향해 취기로 소리치려다가 참는다. 짜증 섞인 목소리로) 미안해요. (소리 안 나게 입모양만) 씨발. 지도 시끄러우면서.. 말 좀 몇 마디했다고 지랄이야
남자
[나도 잘 하고 싶어. 너도 알잖아. 하루에도 알바 몇 개를 뛴다고.. 주유소, 배달, 서핑, 편의점.. 이번에는 생동성 알바까지.. 정말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아.]
여자
[그건 오빠 정신력 문제야. 티비에서 보면 다 그런 환경 이겨내고 사시, 고시 다 패스 하더라. "하면 된다" 몰라? 오빠는 의지박약 이야. 절박함이 없어. 간절함이 부족해. 그리고 피곤하면 곱게 처자야지. 술 처먹고 이 새벽에 나 깨워서 술주정이나 하고 싶어… 휴~ 말을 말자]

여자 카톡 메세지는 자신의 싸늘한 메시지를 보면서 괴로워한다. 남자는 한숨 쉬고 참아본다.

남자
[나 이런 말 안하려고 했는데.]
여자
[그럼 하지 마.]
남자
[아니 들어야 돼. 네 고시원 월세 내주고, 만날 때 마다 내가 밥 사주고, 용돈 챙겨주는데 내가 땅 파서 주는 줄 알아?]
여자
[정~말 쪼잔 하다. 그거 몇 푼이나 된다고 생색 내냐? 내가 이런 남자를 5년 동안 만났네!]
남자
[너 말이 심하다.]
여자
[뭐가 심한데? 팩트잖아]
남자
[너 이제 막나간다. 너 9급 합격했다고 이제는 나는 안중에도 없냐?]
여자
[부모님이 선보라고 성화셔.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만년 알바생이랑 결혼이라도 할 줄 알아. 말 나온 김에 나도 말 좀 하자]
남자
[하지마. 듣고 싶지 않아.]
여자
[아니 들어. 그래야 해. 그동안 즐거웠어. 이제 우리 헤어지자.]

남자, 못 믿겠는 듯 핸드폰 화면을 다시 쳐다본다. 기가 차다.

남자
[장난이지?]
여자
[진심이야]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오빠 나한테 용돈 주면서 행복했잖아. 그 행복감으로 퉁쳐.]
남자
[이건 아닌 것 같다. 진짜 장난이지. 내가 5년 동안 피말려 가며 견딘 건 너 웃는 모습 하나보자고 그런 건데. 그게 큰 욕심이니?]
여자
[쪼잔 한데다 찌질 하기도 하네. 이번 시험 떨어지면 헤어진다고 했어? 안했어?]
남자
[나도 열심히 했어.]
여자
[그런데 안됐잖아. 이제 됐어. 끝났어.]
남자
[지은아 우리 이러지 말자.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여자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오빠. 이러는 거 어머니도 아셔? 아들새끼 개새끼라더니... 여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느라 공부도 안하고. 한심하다 한심해. 나 낼부터 선보기로 했어. 늦게 자면 피부 트러블 나니까 일찍 자야 돼. 오빠도 호구 짓 그만하고 정신 차려.]
남자
[나 진짜 아프다.] 씨발 이건 아니잖아
여자
그치. 오빠한테 정말 몹쓸 짓한다. 이제 오빠 볼 면목 없어. 지금까지 뒷바라지 해줬는데 또 떨어졌어. 진짜 취업하면 그때 그 돈은 갚을게. 그리고 어머님이 나 그렇게 미워하고 반대하는지 여태 몰랐어. 나 정말 못나고 못 됐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운다)
남자
[지은아 사랑해.]
남자
사랑한다고
여자
(들리는 듯) 나도 사랑해
남자
(여자와 소리가 겹친다.) 왜 대답이 없어. 나 벌써 차단 해놓은 거야. 너 없이 못 살아.
여자
(남자와 소리가 겹친다) 나도 사랑해. 그리고 정말 미안해. 나도 오빠랑 연락 끊기면 숨 막힐 것 같아. 난 오빠 없으면 난 아무 것도 아니야
남자
(여자와 소리가 겹친다) 사랑한다고.. 제발. 이렇게 사랑한다는데.. 왜. 왜. 내 메시지도 안 봐. 왜 안보냐고. 나한테 사랑한다고 한마디도 못 해주냐. 그래 나 버리고 다른 새끼 만나면..(사이)
여자
(남자와 소리가 겹친다) 그동안 오빠 괴롭혀서 미안해. 더 괴롭힐 것 같아서 떠나는 거야. 오빠도 좋은 사람만나. 그런데 오빠 없으면.. 죽을 것 같다.
남자
죽여 버릴 거야.

남자가 흥분한 상태에서 칼을 꺼내려고 냉장고 문을 연다. 냉장고 안에서 “카톡 카톡 카톡”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다가 메아리치듯 사라지고 정적이 흐른다. 냉장고의 온기 없는 불빛이 무대를 물들인다. 여자는 냉장고 옆자리에서 귀를 막고 고개를 숙이지만 그 실루엣만 보인다. TV 화면 속 카카오톡에서 여자의 메시지만 사라지고, 남자가 보낸 메시지만 남아 있다. 마치 여자의 메시지는 애초에 없었던 것 같다. 남자 냉장고에서 액정화면이 깨진 핸드폰을 꺼내든다. 여자 핸드폰과 같은 커플 액세서리가 붙어 있다. 남자가 깨진 핸드폰의 메시지를 확인한다. 그러자 TV 화면 속에는 남자 카톡 메시지 그 옆에 붙어 있던 숫자 “1”이 모두 “0”으로 바뀐다. 남자는 울지만 웃는다. 기쁘지만 슬프다. (막)

※ 사족: 제로의 영역은 0 (없다)과 1 (있다)로 구별되는 디지털이라는 화려한 그늘에 가려진 아날로그적인 감정.
그 무형의 가치들이 저평가 되는 가난한 디지털 시대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무대 장치 표현 때문에 지문이 긴 편이지만
실제 공연 러닝타임은 10분내입니다. 참조 부탁드립니다.

호들갑 작가소개
부끄러움 타는 호랑이는
일렁이는 객석의 어둠을 응시하며
순백의 무대 위에서 어슬렁거린다.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