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껍질
Ctrl + V, 붙여넣기해서 사용하세요
등장인물
남자
가족1
가족2
늦은 밤, 강변.
빗소리 크게 흐른다.
조명이 켜지면 무대 위 덩그러니 놓인 벤치 앞에 남자가 서있다.
남자의 등에는 그의 가족들이 마구잡이로 뒤엉킨 채 매달려있다.
남자의 양 손은 매달린 가족들을 받치고 있으며, 가족1은 한 손에 우산을, 가족2는 한 손에 빨대가 꽂힌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들고 있다.
가족1이 우산을 펼쳐 들면 빗소리 확연히 줄어든 채 이어진다.
- 가족1
-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 꼭 산책을 나와야만 했어?
- 가족2
- 귀한 몸 상할라, 조심하려무나.
- 남자
- (기운 없이 중얼거리는) 숨을 쉬고 싶었어.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볕 한 줌 들지 않는 골방에 박혀 일만 했어. 숨이 막혀.
- 가족2
-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 그래. 오죽하겠니.
- 남자
- 맑은 공기를 마시는 일조차 내게는 사치인 거야?
- 가족1
- 어어? 조심해! 큰일 날 뻔했잖아! 발에 흙이라도 묻으면 어쩔 뻔했어. 가뜩이나 비가 와서 질척거리는 걸.
- 가족2
- 얘야, 왜 이렇게 축 처졌니. 그럼 못 쓴다. 당당해야지, 당당해야 하고말고. 가슴을 쭉 펴렴. 모름지기 가장은 그래야만 하는 거란다.
- 가족1
- (발버둥 치며) 축축해. 습해. 더워. 짜증나.
- 가족2
- 어휴, 땀 흘리는 것 좀 봐라. 목 탈라. 이것 좀 마시렴.
- 가족1
- 나도 더워. 물, 물!
- 가족2
- (부산스레 주위를 둘러보고는) 너에게만 특별히 주는 거란다.
- 가족2
- (아랑곳 않고) 너는 우리 집안의 기둥이잖니. 네가 힘이 들면 안 되지. 어여, 어여 쭉 들이키려무나. 다 네 몫이니.
- 가족1
- 나도! 나도 목마르다고!
- 남자
- (숨이 턱 막히는) 그만, 제발 그만!
- 가족2
- (계속해서 남자에게 컵을 들이밀며) 우리 걱정은 말고. 우리는 괜찮다. 괜찮아. 우리는 언제나 네가 걱정이란다. 일이 힘들진 않은지, 밥은 제때 챙겨먹고 다니는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늘 미안하구나.
- 가족1
- 목말라. 타들어갈 것 같아. 습하고 더워! (남자를 쏘아보며) 이게 다 너 때문이야.
- 가족2
- 모두가 너만 바라보고 있어.
- 가족1
- (두리번거리며) 무슨 소리지? 어? 저기! 달팽이야!
- 가족2
- 저런, 껍질이 부서져 버렸구나. (혀를 차며) 비가 와서 밖으로 나온 모양인데.
- 가족1
- 여기도 있어, 저기도! 꾸물꾸물 느리니까 사람들한테 밟히기나 하지. 한심해. 달팽이는 왜 저렇게 느린 걸까?
- 남자
- (멍하니 바라보며) 껍질, 껍질이…….
- 가족2
- (남자의 고개를 돌리며) 너는 신경 쓸 것 없단다. 달팽이는 원래 그런 거야. 그저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지. 어쩔 수 없는 거란다. 너는 할 일이 아주 많아. 이런 데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겠니.
- 가족1
- 평소에는 보이지도 않더니, 그러게 왜 괜스레 밖으로 나와서는. 미련하게.
- 남자
- 미련해……?
- 가족1
- 미련해. 이제와 꿈틀거려봐야 소용없지.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온몸이 말라비틀어질 텐데. 죽을 거야, 곧. (여기저기 기어가는 달팽이들을 보며 소리치는) 너희들도 조심해야 할 거야! 욕심 부리지 말고 얼른 집에 돌아가는 게 좋을 걸!
- 가족2
- 이제 그만 되었다. 비가 거세다.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 남자
- 미련해?
- 가족1
- (휘청거리며) 무슨 짓이야?!
- 남자
- 미련해? 미련하다고?! 답답해서, 그래서 숨 좀 쉬겠다는 게 그렇게 죽을죄야? 그래?!
- 남자
- 등껍질 때문이야. 이게 다 빌어먹을 등껍질 때문이라고. 저렇게 무거운 걸 등에 이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느려 터졌지. 그러니까 미련하다는 소리나 듣지!
- 가족2
- (남자의 어깨를 꽉 붙잡으며) 진정해라, 얘야! 이해한다. 그래, 다 이해해. (컵을 남자의 입에 밀어 넣으며) 일단 이 물이라도 좀 마시면서 흥분을 가라앉히렴, 응?
- 남자
- (바닥을 짓밟으며) 그래, 미련하게 이딴 걸 왜 등에 얹고서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등껍질 따위 없어도 살 수 있어. 더 이상 등신같이 사람들에게 밟히지 않아도 된다고!
- 가족1
- (남자의 등을 사정없이 두들기며) 미쳤나봐.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짜증나. 이게 웬 난리야. (우산을 고쳐 쓰며) 가만히 좀 있어, 떨어질 것 같단 말이야. 너 하나 때문에 다 무슨 고생이야!
- 남자
- (멈칫하며) 그래, 당신들 탓이야. 다, 다 이 짐스런 등껍질 때문이야…….
- 남자
- (비틀거리며) 후련하다. 이제야 후련해.
- 남자
- ……?
- 남자
- 등껍질이 없으면 마냥 홀가분할 줄만 알았어. 그런데,
- 남자
- 그런데 너무, 가벼워…… 너무…….
남자의 소리, 빗소리에 묻혀 가족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남자 크게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등에 매달린 가족들 쏟아질 듯하다.
남자, 크게 신음하며 가족들을 고쳐 업는다.
가족2, 남자에게 얼음물이 든 컵을 건넨다.
가족2, 두 손을 모두 사용할 수 없는 남자의 입에 컵을 들이민다.
남자, 사래 들려 입 안의 물을 모두 뱉어내며 기침한다.
가족1과 가족2, 끊임없이 자기 말만 쏟아낸다.
소리 점차 커지며 마구잡이로 섞여들어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으로 변해간다.
입안에 얼음을 가득 머금은 채 신음하는 남자, 참다못해 와그작! 얼음을 깨물어 부순다.
모두, 무대 한 쪽을 바라본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남자, 가족1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바닥을 세게 밟는다.
와그작! 달팽이의 등껍질이 부서진다.
남자, 미친 듯이 쏘다니며 바닥을 쿵쿵 내리밟는다.
와그작, 와그작! 부서지는 소리가 계속된다.
남자, 마구잡이로 무대를 휘저으며 모두를 털어버린다.
가족1과 가족2, 남자의 등에서 떨어져 바닥을 나뒹군다.
잠시 신음하다 쥐죽은 듯 고요해지면, 남자의 거친 숨소리와 빗소리만 계속해서 들린다.
긴 사이.
만끽하듯 숨을 크게 들이쉬는 남자, 그러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는 상체부터 시작해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일어서려 애쓰지만 계속해서 무게중심을 잡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진다.
남자, 다시 일어서려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넘어진다.
일어서다, 넘어진다.
다시 일어서다, 넘어진다.
남자, 반쯤 몸을 일으킨 채 두 팔로 바닥을 짚고서는 간신히 버틴다.
남자, 크게 휘청거리다 쓰러진다.
남자, 엉덩이만 삐죽 든 채 온몸을 땅에 처박고 있다.
이제는 껍질이 깨어진 달팽이마냥 간헐적으로 꿈틀거리기만 할뿐이다.
사이.
조명 줄어들며 한쪽에 내팽개쳐진 우산만을 비추면, 빗소리 점점 커진다.
암전.
찢어질 듯 울리는 빗소리가 얼마간 이어지다 별안간 뚝, 멎는다.
- 호들갑 작가소개
- 늘 부끄럽습니다. 앞으로도 한껏 부끄러울 예정입니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꾸역꾸역 써내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