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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승 시간

김영희
135호 2018.03.08
외국 공항 내 패스트푸드점.남자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 햄버거 세트가 놓인 쟁반이 2개 있다.테이블 옆에는 캐리어와 배낭 2개가 있다.

외국 공항 내 패스트푸드점. 남자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 햄버거 세트가 놓인 쟁반이 2개 있다. 테이블 옆에는 캐리어와 배낭 2개가 있다.

남자, 햄버거에는 손을 대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 때 여자가 들어와 남자의 맞은편에 앉는다.

여자
감사합니다. 와 진짜 구세주세요.
남자
아뇨, 뭘.
여자
아니 햄버거를 입에 딱 무는 순간 배가 너무 아픈 거예요. 햄버거는 맛도 못 봤는데, 배는 너무 아프지. 캐리어에 배낭까지 짐은 또 한 가득이지.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다 놔두고 화장실에 가자니 누가 캐리어를 훔쳐갈 거 같고, 햄버거도 그냥 치워버릴 거 같고. 그렇다고 먹고 가자니 지금 당장 배 아파 죽을 거 같고. 그 때, 마침, 딱, 그 쪽이 카운터에서 주문을 하고 있더라고요.
남자
아, 예.
여자
그 가방, 여행친구에서 산거죠? 완전 새 거네. 누가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지 않아도 나 한국인이에요 써 붙이고 다니는 거네.
남자
아, 그래서 아셨구나. 아니 제가 막 카운터에서 몸을 돌리자마자 저기요 하면서 저 부르셨잖아 요. 그 다음에, 이것 좀 봐주세요, 이 말만 하고 냅다 화장실로 사라지셨고. 그래서 화장실 가셨 을 때 계속 생각했거든요. 난 비행기 탄 이후로 영어 밖에 안 썼는데, 내가 한국 사람인걸 알고 있다면, 원래 날 알던 사람인가? 내가 또 누구를 몰라보고 있나? 제가 사람 얼굴을 잘 기억 못하 거든요. 대학교 때 교양 수업을 같이 들었나, 토익 학원을 같이 다녔나, 계속 생각했죠.
여자
처음 보는 사이 맞을걸요? (짧은 사이) 아니면 뭐 어때요. 여기선 환승하시는 거예요?
남자
네.
여자
어디로 가세요?
남자
하노이요. 베트남.
여자
얼마나요? 돌아오는 티켓은 있어요?
남자
일주일 정도? 네, 왕복으로 끊었어요.
여자
베트남만 여행해요?
남자
네. 왜요?
여자
아. 그게 진짜 별건 아니고요. 그러니까. 진짜 별건 아닌데. 제가 라오스에서 오는 길이거든요. 라오스 돈이 조금 남아가지고. 혹시 라오스 여행하시는 거면 그냥 드리려고 했죠. 베트남 옆이 라오스니깐 혹시나 해서. 여행지가 같을 정도로 우리가 막 엄청난 인연은 아닌가 보네요.
남자
돈이 많이 남았나 봐요?
여자
아뇨. 조금. 진짜 조금요. 만 낍, 이만 낍 정도? 길거리에서 생과일주스는 사 먹을 수 있는 정도 에요. 왜 큰 돈이 아니어서 실망했어요? 아니 한국에 가져가서 버리는 돈 되는 것 보다는 낫잖아 요. 생판 모르는 여행자한테 주스라도 사주는 인심 좋은 사람 되면 기분도 좋을 거 같고.
남자
잘 보관해 놨다 다음에 또 여행가면 그때 쓰면 되잖아요.
여자
다시 안 갈 거예요.
남자
왜요. 여행이 별로였어요?
여자
아뇨. 여행은 좋았는데. 그래도 다시 안 갈 거예요.

남자, 여자의 눈치를 살핀다. 여자, 콜라를 마시며 감자튀김을 만지작거린다.

여자
음. 혹시 라오스에 나중에 가게 되면요. 그쪽이요. 저 말고 그쪽이 라오스에 간다 면요. 음, 그 나라 수도가 비엔티엔이라는 곳이에요. 비행기를 타고 가면 일단 그 도시로 가게 될 거고, 당연히 여행자 거리에서 숙소를 구하겠죠.. 여행자 거리에 호스텔이 엄청 많지는 않은데, 거기 있 는 호스텔 중 하나에 제가 책을 놓고 왔어요. 슈테판 츠바이크의 낯선 여인의 편지라는 책이에요.
남자
그 책을 가져다 달라 고요?
여자
아뇨, 아뇨. 일단 들어봐요. 호스텔에 여행자들이 책을 놓고 가잖아요. 영어, 프랑스어로 된 소 설책들 사이에 조용히, 심지어 책 제목도 안 보이게 뒤집어 꽂아 놓고 왔어요. 얇은 책 한권인데, 그 책 첫 장에 제가 어떤 말을 써 놨어요. 내가 왜 여행 왔는지에 대해. 내가 어떤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지에 대해. 그러니까. 제가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요. 그냥, 그냥 누군가 한 사람한테는 말하고 싶었어요. 이런 글을 쓴 사람이 누군지 몰랐으면 좋겠지만, 왠지 나라는 걸 알리고도 싶고, 그런데 내가 아 는 사람들은 내가 그 글을 썼다는 걸 평생 몰랐으면 좋겠고. 그냥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어요. 그게 다에요. 그쪽이 라오스로 안 간다고 하니까, 우리는 처음 본 사이고, 앞으로도 볼 일이 없을 것 같으니까, 말하고 싶더라고요.
남자
제가 혹시 라오스에 가서 그 책을 찾고, 그 글을 읽게 되면요?
여자
그 책,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없을걸요. 또 날 찾을 순 없잖아요. 그쯤 되면 내 얼굴 기억도 안 날걸요?
남자
말은 하고 싶고, 그래서 글은 썼고, 하지만 공개할 자신은 없다. 그냥 말해주면 안돼요? 어차피 몇 시간 후면 그 쪽은 한국으로, 저는 베트남으로 갈 거잖아요.
여자
한국 돌아올 거잖아요. 일주일 후에.
남자
평생 살면서 모르는 사이였는데, 또 만날 일이 있겠어요. 방금 말했잖아요. 얼굴도 기억 안날 거 라고. 같은 지하철을 타도 서로 몰라볼 걸요
여자
에이, 모르겠다.
남자
모르고 싶은 게 아니고요?

사이

여자
(배가 다시 아파온다.) 아, 저 진짜 죄송한데, 한 번만 더 부탁드릴게요. 배가 또 아파서. 화장실 좀.

여자,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한다. 남자,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여러 언어가 뒤섞인 공항의 소음이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