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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보다 뜨거운 오븐

김정인
136호 2018.03.22
때는 가까운 미래, 서울의 한 구청. 긴 대기의자, 서류를 작성할 수 있는 테이블. 테이블 위에 각종 서류들이 쌓여있고, 꼬리가 달린 펜이 있다.

등장인물
슬비: 여, 만 25세.
보라: 여, 만 31세.

무대
때는 가까운 미래, 서울의 한 구청. 긴 대기의자, 서류를 작성할 수 있는 테이블. 테이블 위에 각종 서류들이 쌓여있고, 꼬리가 달린 펜이 있다.

대사
- : 이전 말을 끊고 다음 말이 이어진다.
··· : 말을 흐린다.
말이 쓰여 있지 않은 대사는 인물이 의도적으로 침묵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대사 사이 빈 공간은 그 공간의 길이와 같은 길이의 침묵을 표시한다.
사이는 위의 표시가 쓰이지 못할 만큼 단절된 사이를 가리킨다.

본문

보라의 손에는 서류봉투가 하나 들려있다. 하지만 그녀는 서류 테이블의 ‘안락사허가신청서’(객석에서는 잘 보이지 않음)를 빤히 쳐다본다. 눈치를 보다가 손으로 들었다가 내려놓았다가 한다. 소리 없는 심각함으로 이 구청에 그녀와 신청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러던 중 이 세계를 깨고 슬비가 갑자기 등장한다.

슬비
저기요.
보라
(옆에 누가 있는 줄 몰랐다는 듯 화들짝 놀라며) 네, 네! 네? 네! (옆으로 비킨다.)
슬비
(안락사허가신청서를 하나 가져가며)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슬비는 신청서를 보라에게서 조금 떨어져 테이블에 둔다. 테이블 위 펜을 쓰지 않고, 자신의 필통에서 만년필을 꺼낸다. 다른 서류 하나도 같이 꺼낸다. 예전에 써둔 신청서. 꺼낸 서류를 보며 빠르게 안락사허가신청서를 작성한다. 보라는 슬비를 의식하며 자신도 신청서를 하나 꺼내 의자에 앉는다.

까톡!

보라는 화들짝 놀란다. 핸드폰을 꺼내기 위해 들고 있던 서류봉투를 의자에 내려놓는다. 핸드폰을 슬쩍 보더니 진동으로 바꿔 다시 넣는다. 들고 온 ‘안락사허가신청서’를 가만히 보다가 돌려놓기 위해 다시 테이블로 돌아간다. 슬비는 이미 서류를 다 작성했다,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보라가 본다. 슬비는 서류를 들고 떠나려는데.

보라
저기요!
슬비
(멈춰서) 네?
보라
아, 아니에요.
슬비
네.

슬비는 번호표를 뽑고 긴 의자에 앉는다. 보라는 신청서를 되돌려 놓지 못한다. 그녀는 어물쩍 슬비 곁에 앉는다.

사이.

슬비가 앉은 자리에서 보라의 서류봉투를 발견한다. 앞뒤를 살피더니 열어보려 할 때-

보라
(서류 봉투를 빼앗으며) 아! 아니! 저! 그거 제 거예요!
슬비
아, 죄송해요.
보라
아 그게, 이건 아니구요. 그러니까, 제가 들고 있는 건 다른 거고. 이것도 제가 들고 있긴 한 건데. 이건 혼인신고서- 아니, 이건, 그러니까, 사실 저 쪽에서 이미 번호표를 뽑았는데, 혹시나 해서 한 번 와 본거라. 하도 뉴스에서 총선 때문에 난리 길래. 사실은 이건 돌려놓으려고 했어요. 그냥 궁금해서. 근데 깜빡하고 의자에 이걸 두고 와서- (멈춤)
슬비
네.
보라
네. (부끄러워한다.)
슬비
사람 되게 많죠. 제 앞에 대기 인수가 25명이에요.
보라
네, 점심시간이라서. 제 앞에는, 한명 있었는데….
슬비
그럼 오래 안 기다리시겠네요.
보라
아뇨. 이미 지나가서….
슬비
아, 네.

사이

슬비
오늘은 내야 되는데 큰일이에요.

보라
왜요?
슬비
내일부터 출장 따라가고 주말에 올라와서요. 이번 주까지 접수고 월요일이 인터뷰라.
보라
아.

보라
그, 잘 안 해주지 않아요? 직장 있고, 나이도 어리면?
슬비
네, 벌써 두 번째예요. 그래도 인턴이라서요. 대학원가면 아마 조금은 쉬워지지 싶어요.
보라
이번에도 안 될까요?
슬비
요즘엔 쉽지 않대요. 근데 이번에 애국당이 이기면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고 해서요.
보라
그건 그렇죠.
슬비
만 24세가 될 때까지 기다렸는데, 작년부터 너무 어려워진 거 있죠. 정권이 바뀌어서.
보라
전 애국당이 완전 폐기할 줄 알았어요.
슬비
그래서 불안했어요?

보라
예?

슬비
안락사 허가 안 해줄까 봐요.

보라
예? 아니, 아뇨?
슬비
전 불안했어요. 뭐 65세 이상이나, 70세 이상이나, 옛날처럼 나이제한 걸어 놓고, 또 기다리라고 할까 봐요. 그럼 전 오븐에 머리 처박고 죽으려고 했어요.
보라
아니, 왜요?
슬비
지겨워서요.
보라
젊잖아요.
슬비
더 젊었을 때도 그랬어요. 25살까지 기다리는 것도 힘들었어요.
보라
조금 더 생각해봐요.
슬비
그 쪽보다는 생각 많이 했을 걸요. 한 10년 정도.

긴 사이. 어색한 침묵.

보라
저기 있잖아요.

슬비
네.
보라
저 사실 봤어요. 사유. 안락사 신청 사유. 미안해요.
슬비
아. 네, 뭐, 괜찮아요. 이건-
보라
저도예요.
슬비
네?
보라
저도 레즈비언이에요.

슬비
아, 그래서-
보라
네, 사실 그래서요. 얼마 전까지 몰랐어요. 근데 선보고 결혼에 대해, 미래에 대해 생각을 하는데. 아득한 거예요. 모르진 않았는데. 아, 그러니까. 괜찮을 줄 알았는데. 결혼해도요. 근데 아닌 것 같아요
슬비
저기-
보라
이제까지는 악착같이 살아야하는 줄 알고 그랬는데. 성공해야한다고 해서요. 성공 못하면, 그래, 우리나라는 안락사 허용 국간데. 망하면 자살해야겠다. 일단 될 때까진 살아보자. 근데 저 되게 잘했거든요, 정말. 죽기 살기로 하면 다 할 수 있다고. 죽을 각오로 뭔들 못하겠냐고. 진짜 잘 왔는데. 근데 죽을 각오는 살 각오가 없어지는 거던데요. 다 있는데, 그냥 다음 날 아침 눈 뜨기 싫을 때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눈 뜨기 싫을 텐데-
슬비
(다급하게) 저기, 미안해요.
보라
뭐가요?
슬비
저 레즈비언 아니에요.

사이.

보라
아, 아, 아네, 아니, 아, 실례했어요, 저는 분명-
슬비
그게, 요즘엔 이게 잘 먹힌- 그러니까 허가가 잘 난다고 해서요. 정말 죄송해요. 정말요. 정말 미안해요.
보라
뭐가요?
슬비
그냥, 그렇게 쓴 게요. 미안해요.
보라
아뇨, 뭘요. 그냥 제가 오해하고-
슬비
아니에요. 저도 절박했는데 그래도 아닌 것 같아요.
보라
네?
슬비
미안해요. 이용한 거요. 진짜, 이용한 거요. 작년에 떨어지고 정말 절박해졌거든요. 무슨 안락사가 청년 우대 청약 통장도 아니고. 소득분위, 학력, 나이, 전부 불가능한데. 사유까지도 별 게 없으니까. 전 절대 허가가 안 나겠다 싶었어요.
보라
사유가 뭐였는데요?

슬비
그냥, 그게 제 꿈이에요.

보라
허가 안 나겠네.
슬비
네.
보라
일단 살아 있는 게 더 좋으니 다시 생각해보라고는 못 하겠어요. 난 잘 모르겠지만. 꿈이면, 그냥 내요. 그거.

슬비
아니에요.

보라
제가 허락해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모른척은 해줄게요.
슬비
제 마지막 결정까지 거짓말이면 안 될 것 같아요.
보라
진짜로 쓰면, 꿈이라고, 허가 받기 어려울 텐데요?
슬비
음, 더 괜찮은 말을 발견할거예요. 꿈으로 퉁 치는 건 왠지 멍청하잖아요.

슬비
조금만 더 살죠, 뭐.
보라
그렇다고, 오븐을 택하면 안돼요.
슬비
네, 그건 또 싫어요. 유니크 하지 않잖아요.
보라
네, 아까울 것 같아요.

띵동-!

슬비의 번호가 호출된다. 슬비는 서류와 번호표를 버리고 일어선다.


슬비
치료 받아 봐요. 요즘 조울증은 그냥 감기잖아요.
보라
네? 네.
슬비
괜찮아요. 다 그래요.
보라
괜찮아요?

슬비

슬비는 출구를 향해 퇴장한다.
보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안락사허가서류를 서류 봉투 안에 넣는다.


끝

호들갑 작가소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음 놓고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사람.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