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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봉사

김학성
137호 2018.04.05
봉사자1(40대, 여성): 사회복지단체 소속 봉사자. 수다스럽고 살가운 성격. 매년 독거노인에게 김장김치를 나눈다.봉사자2(20대, 남성): 대학교 졸업반. 실리를 중요시하는 성격. 봉사활동은 처음이다.할머니 변사체

등장인물
봉사자1(40대, 여성): 사회복지단체 소속 봉사자. 수다스럽고 살가운 성격. 매년 독거노인에게 김장김치를 나눈다.
봉사자2(20대, 남성): 대학교 졸업반. 실리를 중요시하는 성격. 봉사활동은 처음이다.


할머니: 변사체.

초겨울의 달동네.

방은 좁은 거실 겸 부엌과 미닫이문의 작은 방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문밖, 숨을 헐떡거리는 봉사자1과 봉사자2, 둘은 털모자며 털장갑에 두터운 점퍼까지 중무장을 한 채다.
잠시 숨을 고르고는 똑똑똑- 문을 두드린다.

봉사자1
어르신~ 어르신, 계세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봉사자1, 쿵쿵쿵- 계속해서 문을 두드린다.

봉사자1
날도 추운데 어딜 가셨을까.

문을 몇 차례 더 두드리다가 슬쩍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녹이 잔뜩 슨 문이 삐걱거리며 열린다.

봉사자1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 동네 어르신들은 어찌나 이렇게 문을 열어놓고들 사시는지. 이러다 도둑이라도 들면 어떡하려고.

자연스럽게 집안으로 들어서는 봉사자1, 장갑을 벗어 탈탈 털고는 어느 틈엔가 거실에 올라선다. 반상에 다가앉아 다리를 쭉 펴고 앉는다.

봉사자1
아고고고, 죽겠다.
봉사자2
보자기에 싸인 김치통을 한 손에 든 채 멀거니 문밖에 서있다.
봉사자1
얼른 들어오지 않고 뭐하고 섰어? (반상을 두드리며) 여기, 여기 두면 되겠네.
봉사자2
아, 네…….
봉사자1
아유, 이걸로 올해도 끝이다. 고생 많았네. 이 동네가 원체 높고 가파르다 보니 힘들지?
봉사자2
고생은요. 더 많이 나눠드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벌써 마지막이네요.
봉사자1
괜찮아, 노인네들 많이 자시지도 못해.
봉사자2
아직 이 위로도 집이 많은 것 같던데…….
봉사자1
연말 되면 구청에서도 이 동네 저 동네 돌면서 김치며 쌀이며 나누고 할 거야. 원 걱정도. 아유, 그나저나 집이 냉골이네. 냉장고도 굳이 필요 없겠어. 어르신 김장김치 쉴 걱정은 않으시겠네.

봉사자1, 주책 맞게 웃으며 다리를 주무른다.
봉사자2, 김치통을 감싼 보자기를 끄른다.

봉사자1
참, 학생은 올해가 처음이지? 젊은 친구가 이런 일 하기도 쉽지 않은데.
봉사자2
평소에 봉사활동이라는 거 한 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졸업하는데 봉사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 뭐, 겸사겸사…….
봉사자1
그래도 기특하네. 다른 편한 일들도 있을 텐데 이런 허드렛일을 다 찾아 하고.
봉사자2
(냉장고 열고 김치통 넣으려는) 기왕 하는 거 좋은 게 좋은 거니까요.
봉사자1
그래, 우리가 나누는 게 그냥 김치가 아니야. (김치통을 빼앗아 뚜껑을 열며) 정이야, 정!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앞집 옆집 뒷집 할 것 없이 서로 돕고 나누며 살았지. 어제 우리 집 반찬이 불고기였으면 옆집 반찬도 불고기가 되고, 오늘 뒷집 반찬이 닭백숙이면 우리 집 저녁도 닭백숙이 되고. 그게 다 정이라는 건데 말이야. 요즘 세상은 너무 각박해, 안 그래? 서로 노느기는커녕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니, 원. 자기는 정말 좋은 일 하는 거야.

봉사자1, 맨손으로 김치를 쭉 찢어 먹는다.

봉사자1
자기도 한입 할래?
봉사자2
괜찮아요. 저는 원래 김치 별로 안 좋아해서.

길게 찢은 김치를 둘둘 말아 봉사자2의 입 앞에 내민다.

봉사자1
에헤, 고생했는데 한번 먹어봐. 어른이 주는 거 자꾸 마다하는 것도 예의 아니다?
봉사자2
아뇨, 전-
봉사자1
(입에 들이밀며) 글쎄, 일단 먹어보라니 그러네. 얼마나 맛있게.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실랑이가 이어진다.
고개 돌리는 봉사자2의 얼굴에 김치 양념이 묻는다.

봉사자2
아…….
봉사자1
아이고, 어떡한다. 그러게, 어유, 고집도 참. 가만 있어봐. 휴지가, 휴지가.

봉사자1, 좁은 거실바닥을 뒤지다 닫혀있는 미닫이 방문을 열어젖힌다.

봉사자1
에구머니나, 깜짝이야!

좁은 방 가운데 할머니가 두툼한 이불을 덮고 누워있다.

봉사자1
(놀란 가슴 진정시키며) 어디 나가신 줄 알았더니 집에 계셨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기척도 없이 계시면 어쩐대요. 애 떨어질 뻔했네.

어느새 밝게 웃으며 방으로 들어서는 봉사자1.
봉사자2, 문밖에서 봉사자1을 채근한다.

봉사자2
저기, 주무시는 것 같은데 그냥 나가는 게…….
봉사자1
할머니~ 저희가 맛깔난 김장김치 가지고 왔어요. 일어나 보셔요.

봉사자1, 할머니 곁에 다가가 몸을 흔들지만 할머니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멀찍이서 말리려는 봉사자2에도 아랑곳 않는 봉사자1과 여전히 미동 없는 할머니.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봉사자2가 다가와 할머니의 코에 손을 가져다댄다.
할머니, 숨을 쉬지 않는다.

봉사자2
(놀라 봉사자1을 바라보며) 저, 저…….
봉사자1
왜 그런대, 무슨 일이야?
봉사자1
할머니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대더니 부산스럽게 방 안을 휘젓는다.
봉사자1
아이고. 아이고, 숨을 안 쉬시네. 이걸 어쩐다니. 이걸 어째.

그 때, 휴대전화 다이얼 소리가 방 안을 울린다.
봉사자2,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다.
봉사자1, 다급히 봉사자2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챈다.

봉사자1
미쳤어, 미쳤어!
봉사자2
(얼이 빠져) 뭐하시는 거예요. 얼른 신고해야죠.
봉사자1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 낮추며) 큰일 날 소리! 요즘 세상이 좀 각박해?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줘도 보따리 내놓으라고 야단인 때야. 우리한테 무슨 관계냐, 왜 들어왔느냐, 귀찮게 굴 게 뻔해. 좋은 일 하러 왔다가 괜히 말도 안 되는 누명쓸 일 있어? 그냥 조용히 나가자고.
봉사자2
그래도…….
봉사자1
(자리 털고 일어나며) 됐어, 됐어. 더 얘기할 것도 없어. 여기 있어봐야 우리만 이상한 사람 취급 받아.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얼른 나가자고.

봉사자1, 봉사자2의 손을 잡아채고는 방을 나온다.

봉사자2
(손을 빼며)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이것 좀.
봉사자1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우리는. 알겠지?

봉사자1, 재차 경고하듯 봉사자2의 손을 꼭 잡았다 놓고는 잰 걸음으로 집을 나선다.
봉사자2, 멀거니 할머니 누운 자리를 바라보다가 반상에 놓인 김치통에 시선이 간다.

봉사자1
(집밖에서 낮게 소리치는) 아, 얼른 오라니까 안 나오고 뭐한대!
봉사자2
잠깐만요!

봉사자2, 반상에 놓인 김치통을 보자기로 다시 감싸고는 집을 나선다.

봉사자2
이거, 챙겨야죠. 여기 둬봐야 쉬기밖에 더하겠어요? 마지막 김치인데 한 분이라도 더 드리는 게 낫죠
봉사자1
못 말린다, 못 말려. 참 요즘 청년답잖네, 정말. 저 위에 혼자 사는 어르신네 한 군데 더 있으니까 얼른 들렀다 가자고. (계단 오르며) 아이고, 아고고, 다리야.

집밖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소리, 멀어진다.
암전.

호들갑 작가소개
여전히 부끄러운 사람.
온몸으로 한심을 떠안고 사는 사람.
그럼에도 뚜벅뚜벅 걸어갈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