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의 영역
송지은
138호
2018.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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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두 영역으로 나뉜다. 간호사복을 입은 남자가 거의 쓰러지듯 접이식 의자에 앉는다. 다른 영역의 여자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 느릿하게 귀에 댄다. 통화대기음 울린다.
무대는 두 영역으로 나뉜다. 간호사복을 입은 남자가 거의 쓰러지듯 접이식 의자에 앉는다. 다른 영역의 여자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 느릿하게 귀에 댄다. 통화대기음 울린다.
- 남자
- (침묵) 여보세요
- 여자
- 여보세요?
- 남자
- 듣고 있어. 말해.
- 여자
- 어떻게 받았네. (사이) 미안해 전화해서. 많이 바쁘지.
- 남자
- 바빴어. 초저녁부터 의사 하나가 자살시도를 했어 (사이) 왜 전화했어?
- 여자
- 괜찮아?
- 남자
- 뭐가
- 여자
- 아니, 그 사람
- 남자
- (사이) 일찍 발견해서 살았어.
- 여자
- 오늘 정말 무슨 날인가 봐. 왜 초저녁부터 죽으려고 했을까.
- 남자
- (다른 사람에게) 괜찮으세요? 저는 사실 여러 번 봤어요. 이런 장면에 일일이 영향 받지 않으려고 해요. 처음 보셔서 어떡해요. 고생 많으셨어요. 하하하. 메리 크리스마스. 롤케이크 잘 먹을게요.
- 남자
- 왜 초저녁부터 죽으려고 했냐고?
- 여자
- 아니야. 물어본 거 아니야. 그냥 혼잣말이었어.
- 남자
- 참 누나는 자기랑 좀 멀리 있는 사람들의 불행에 관심이 많지? 오늘 병원에 기적이 일어났거든. 전신 마비 될 거라던 십대 환자가 나아서 퇴원했어. 모처럼 좋은 이유로 침대가 비워진 거야.
- 여자
- 가족들이 좋아했겠다.
- 남자
- 당연하지, 가족들이 좋아하지. 우리 가족의 은인이라고, 막 부둥켜안고 울었지. 늘 쫓기고 몰리다가 이런 날이면 모처럼 느긋하고 뿌듯해. 내가 인간이었구나 하는 생생한 기분이 들어. 배도 좀 고프고 커피도 한 잔 하고 싶고 그래. 그렇게 모처럼 여유가 있을 때, 모처럼 인간일 때, 끝장내버리고 싶은 거야. 그 의사 오늘 커피 맛있게 내려놓고, 컵에 따르지도 않고, 약 먹었더라.
- 여자
- 너무 안됐다.
- 남자
- 너무 안됐지. 의사고 환자고 세상 사람들 다 안됐지. 너무 안됐다는 얘기하려고 삼년 만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전화한 거야? 누나. 삼년 내내 나는. 누나는 진짜 사람이 편하다.
- 남자
- 할 말 없음 나 끊을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전화했어?
- 여자
- (다른 사람에게) 괜찮아?
- 남자
- (사이) 뭐가
- 여자
- (다른 사람에게) 기침은 멎었네. 목도리 잃어버렸다며? 아 가방에 있었어? 먼저 들어가 진호야.
- 남자
- (웃으면서) 진짜, 지겹다.
- 여자
- 불이 좀 났었어.
- 남자
- 뭐?
- 여자
- 불이 났었어.
- 남자
- 어디에?
- 여자
- 화실에. 저녁 수업 하고 있는데, 바깥에 불이 났다는 거야. 화실 애들이 놀라서 뛰쳐나가고, 일분 정도 만에 전부 다 아수라장이 됐어.
- 남자
- 전에 다니던 화실? 지금은 병원이야?
- 여자
- 응. 전에 다니던 화실이고 전에 입원했던 병원이야. 지금 잠깐 로비에 내려와 있어.
- 남자
- (사이) 괜찮아?
- 여자
- 나 니 말대로 편하잖아, 비현실적이고. 그 긴박한 순간도 뭔가 거짓말처럼 느껴져서, 어떤 큰일이 내 인생에 벌어지긴 벌어졌는데, 정작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서 우왕좌왕했어. 기침을 막 하 고 있는데, 웃긴 게 갑자기 네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 남자
- 누나! 누나는 인터넷을 잘 안 하지만, 우리나라 사이버 세상에는 그런 말이 있어요. 인실좆.
- 여자
- 인실좆?
- 남자
- (진지하게) 진리의 말이야. 저는 유래랑 상관없이, 그 말만 따로 놓고 좀 참된 말이라고 생각해요.
- 여자
- (웃으며) 인실좆이 뭐야?
- 남자
- 인생은 실전이야 삐-야. 여기서 삐-는 욕.
- 여자
- (혼잣말처럼) 좆만이?
- 남자
- 너무 거짓말 같을 때, 가까이에 너무 큰 고통이 있을 때 인생은 실전이야 좆만아를 떠올리면서 막 중얼중얼 일을 해요. 그래야 너무 생생하게, 너무 생생하게 이게 현실인 걸 알게 돼요. 내가 지금 살아있고, 내가 만지고 있는 덩어리가 사람의 살이라는 걸 나는 안다. 다 와. 와 봐라. 약간 이런 마음이 돼. 뭔지 알아요?
- 여자
- 인생은 실전이야 좆만아. 인생은 실전이야 좆만아.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계단 쪽으로 걸었는데, 내 경우에는 너무 쉬웠어. 바로 경비 아저씨가 나를 불렀어. 아가씨 여기예요! 여기로 와요! 나는 모르는 사람들이랑 손을 잡고 빛을 따라 계단을 내려왔어.
- 남자
- 근데 내가 언제 이런 얘기를 했어
- 여자
- 우리 처음에, 너 스물세 살 땐가. 머리 빡빡 밀고 다녔을 때. 귀여웠을 때.
- 남자
- 근데 나 지금은 안 그래. 변질됐어. 오염됐어.
- 여자
- 너 목소리는 똑같은데. 나도 똑같지 않아?
- 남자
- 다른 얘기 하자.
- 여자
- 다른 얘기 할게. 아까 뉴스에서 봤는데 다른 사람들도 다 살았대. 대피도 빨랐고 불도 바로 꺼져서 전부 다.
- 남자
- 꿈같은 얘기네. 그건 고맙고, 꿈같은 얘기네.
- 여자
- 미안해. 삼년 전에 너만 서울에 남겨두고 도망쳐서 너무 미안해.
- 남자
- 계속 해봐.
- 여자
- 서울이 버거웠어. 좁은 우리 속에 갇혀 서로 살을 짓뭉개면서 살아있다는 게 감당이 안됐어.
- 남자
- 계속 말해줘.
- 여자
- 입도 크고 눈도 커서 네가 버거웠어. 너무 생생해서 버거웠어. 더 말하기 어려워. 수치스럽다.
- 남자
- 더 말하기 어려우면 생각을 해. 누나가 좋아하는, 생각.
- 여자
- 무슨 생각
- 남자
- 이것도 실전이라는 생각. 지금 수치스럽다는 생각.
- 여자
- (갑작스레 거친 기침이 터진다)
- 남자
- 끔찍하게 불편할 준비도 해. 나 지금 가.
여자와 남자가 동시에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관객석을 바라보며 말한다. 남자는 삐딱하게 기대어 앉아있고, 여자는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다.
여자가 침묵하는 동안 남자는 천천히 옷을 갈아입는다. 멍하니 옷을 뒤집어 입었다가 바로 고쳐 입는다.
남자 뒤돌아 앉는다. 여자 다급히 전화 걸고, 통화대기음 울린다. 남자가 망설이다 다시 관객 향해 앉는다.
- 호들갑 작가소개
- 차돌처럼 단단한 사랑에 대해,
인간이 가진 작고 어둡고 아름다운
비밀들에 대해 쓰고 싶습니다.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