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들
이주희
140호
2018.05.24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Ctrl + V, 붙여넣기해서 사용하세요
인쇄소 회의실. 인쇄소의 기계 소리가 들리다 멈춘다. 조명이 켜지면 빈 책상을 중심으로 작가, 편집자, 디자이너, 사장, 인쇄기사가 있다.
등장인물
작가
편집자
디자이너
인쇄기사
사장
독자
인쇄소 회의실. 인쇄소의 기계 소리가 들리다 멈춘다.
조명이 켜지면 빈 책상을 중심으로 작가, 편집자, 디자이너, 사장, 인쇄기사가 있다.
- 작가
- (주눅 들어 손가락으로 네모를 만들며) 곽이 좋지 않나요? 우. 유. 꽈아아악. 어감이 아주 딱 인데...
- 디자이너
- (들리라는 듯 혼잣말로) 곽티슈도 아니고 어감이 뭐가 좋아? (진중하게) 곽이란 말을 요즘 아이들이 알까요? 작가님, 상자 어떻습니까?
- 편집자
- 상자라고 하니 우유가 여러 개 들어있는 상자 같지 않아요?
- 작가
- (눈치보며) 휴- 그...그럼 우유 박스는 어떨까요?
- 디자이너
- 상자나 박스나 똑같은 거 아니에요? 그리고 아이들 책에 영어를 막 쓰는 건 좋지 않아요!
- 편집자
- 여러분! 대박! 저 쫌 천재인 듯! 케이스! 어떻습니까? 우유 케이스! 있어 보이지 않아요? 아, 영어는 안 된다고 했나.
- 디자이너
- 팩~~~! 우.유.팩. 팩! 입에 짝짝 붙는데 우유팩 어때요? 아, 이것도 영어네요.
- 사장
- (거드름 피며) 갑! 우유갑! 어때? 우리 때는 다 우유 갑이라고 했는데.
- 편집자
- (경멸하지만 아부하며) 사장님 말씀은 정말 좋은데 무슨 쌍팔년도 성냥갑도 아니고 갑이란 말은 요즘 애들이 잘 모를거에요.
- 작가
- (핸드폰으로 검색하며) 저기요. 제가 지금 인터넷으로 찾아봤는데요. 우유곽은 잘못된 표현이래요. 우유갑이 맞는 표현이라는데요.
- 사장
- 어 뭐야? 야! 편집! 뭐 쌍팔년도 성냥갑이라더니! 너는 책 편집자라는 놈이 이런 것도 찾지 않고 나를 개무시 했냐? 하여간 요즘 것들은 기본이 안 되어있어!
- 디자이너
- 엥? 처음부터 정해져있는걸 이 난리를 치면서 회의하는 중?
- 편집자
- (작가 핸드폰으로 곁눈질로 보며) 여기 인터넷 지식인들 다 개뿔도 모르는 것들이 아는 척 하는 거에요.
- 작가
- 아...아니. 지식인말고요. 여기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와요.
- 편집자
- 작가님 갑갑하시네! 작가라는 분이 문학적 표현 몰라요? 이래가지고 무슨 책을 내신다고...
- 인쇄기사
- (퉁명하게) 뺄거요? 말거요? (일동 어이없다는 듯이 인쇄 기사를 일제히 바라보며 침묵) 사람들 생각하고 있거나, 끄적거리며 괜히 바쁜 척 분주하다.
- 디자이너
- 그냥 우유를 확 빼죠.
- 작가
- 아...아니 이 이야기에서 우유를 빼면 안 되죠. 이게 스토리에서 얼마나 중요한...
- 편집자
- (작가 말을 끊으며) 작가님이야 자기 좋을 대로 써서 출간되면 끝이지만 회사는 아니에요. 계속 전화와요.
- 작가
- 우유 때문에 전화 올 일이 뭐가 있다고...
- 편집자
- 역시 작가님은 사회생활을 안 해 봐서 모르시네. 엄마들이 전화해서 우리 애는 우유를 못 먹는데 왜 책에 우유가 나오냐, 먹고 설사라도 하면 어떻게 책임 질 거냐고 그래요.
- 디자이너
- (벌떡 일어나며) 옳소! 맞아요. 작가님 이건 진짜 편집자 말이 맞아요. 어떤 날은 이런 전화 받고, 사과하다 보면 하루가 다 가요.
- 편집자
- (디자이너를 바라보며)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과하고...
- 디자이너
- (울먹이며) 내가 쓴 글도 아닌데 왜 내가 사과해야 되냐고!!! 작가님이 엄마들 전화 다 받아서 일일이 응대 하실 겁니까?
- 작가
- (죄인처럼 바닥만 보고 있다)
- 사장
- 야! 이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그건 니들일인데 니들이 받아야지 왜 우리 작가님한테 뭐라 그러냐?! 내가 니들 그러라고 월급 주는 거지. 회사에서 빈둥빈둥 놀라고 주냐? 작가양반! 그런데 내가 볼 때도 이거 우유 뭐 넣으나 안 넣으나 그게 그건데 베지밀! 베지밀로 바꾸는 게 어떻소?
- 편집자
- 사장님 베지밀은 특정 상표잖아요. 이럴 땐 두유라고 해야 됩니다.
- 디자이너
- 안 됩니다! 이미 우유 곽으로 작가님이 그림도 다 그리셨고 저도 디자인 끝낸 마당에 이제 와서 바꿀 수 없습니다.! 절대 안됩니다!
- 사장
- 하~! 저 새끼는 일하기 싫으니까 안된다네. 야! 너는 월급은 공으로 받을라하냐?
- 인쇄기사
- (퉁명하게) 우!유!통! (일동 어이없다는 듯이 인쇄 기사를 일제히 바라보며 침묵)
- 작가
- (더듬으며) 저...저기요. 이게 제가 그림 그리고 쓴 책이잖아요. (점점 속사포처럼 ) 제가 누구보다 잘 알아요.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별 것 아닌 우유지만요. 이 단어 하나를 고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소쩍새가 밤새 울었는지 몰라요. 그 날도 원고와 씨름하느라 하루 종일 굶다가 겨우 편의점에 갔는데, 운명처럼 우유라는 말이 제게 왔어요. (손가락으로 네모를 만들며) 하얀 네모난 우유 말이에요. 순수하고, 고귀하고, 완전무결한 우유. 우유꽈아아아악. 두유라고 생각 안 해봤을까요? 바나나 우유, 딸기 우유, 초코 우유, 검은콩 두유, 호두 두유, 아몬드 두유, 검은깨 두유까지 다 고민해봤어요. 그런데 우리 주인공이라면! 순수하고, 고귀하고, 완전무결한 우유꽈아아악을 고를 거에요.
- 편집자
- 아니 작가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하죠. 누가 들으면 작가님이 그깟 고귀한 우유꽈아아악 생각하시는 동안 우린 놀았는지 알겠네. 작가님이 처음에 갖고 온 원고 기억안나세요? 그 그지 같은(멈칫 놀라며) 아니 그런 부족한 원고를 몇 달 야근하며 다듬고 고치고 이만큼 만든 게 저에요. 말이 나와서 말이지. 맞춤법 하나도 제대로 못 쓰면서 뭐 순수하고, 고귀한 우유꽈아아악 좋아하시네. 사실 주인공이 우유 말고 햇살 담은 외간장이나 남해에서 갓 잡아 올린 멸치 액젓을 마신다고 해도 누가 알기나 알 것 같아요?
- 디자이너
- 여보세요들. 다들 말씀 이상하게 하시네. 작가님 글이든, 편집자 교정이든, 그거 제가 디자인 안했으면 그냥 덩어리에요. 키보드 틈에 낀 먼지 같은 글자 덩어리요. 그 먼지들을 몇 날 밤새고 디자인 해놨더니 뭐 서로들 다했다네. 이거 한 땀 한 땀 자간 맞추고, 그림 자리, 글 자리, 여백까지 퍼펙트 하니까 더는 못 고쳐요. 긴말 말고 우유까지는 그대로 가는 거고 팩! 곽! 갑! 딱! 한글자만 고치는 겁니다. 여차하면 이것도 안하는 수가 있으니까 알아서들 하세요!
- 사장
- 이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야! 이 책이 누구 책이냐? 이 책은 내 책이야! 내 책! 내가 돈 안대면 이게 책으로 나올 것 같아! 똥 닦는 휴지로도 못 쓰는 쓰레기라구!!
- 인쇄기사
- 에이 씨, 결국 나만 야근하게 생겼네! 니들이 아무리 떠들어봐라. 내가 인쇄안하면 책은 커녕 폐지로도 못 만든다구!!
- 독자
- (책을 후루룩 넘기며) 에잇! 피 같은 내 돈! 도대체 이렇게 더럽게 재미없는 책은 어떤 작자들이 만드는 거야? 안목도 없는 편집자가 재능 없는 작가를 갈궈서 뭐라도 싸질러 놨더니만 감각 없는 디자이너가 책이랍시고 꾸며놨네. 사장은 책이나 만들며 지식인인척 하는 졸부려나? 인쇄는 뭐 동네 문방구에서 복사했나? 왜 이렇게 저질이야? (책을 던지며 ) 하여튼 요즘은 개나 소나 책 만든다니까.
사람들 각자 딴 짓한다. 퇴근시간이 이미 지나 자꾸 시계를 보는 사람도 있다.
무대 어두워지고 인쇄소의 기계소리가 한참 들리다 멈춘다.
무대 밝아지면 책을 옆에 끼고 무대로 걸어오는 독자.
회의하던 사람들은 놀라기도 하고, 뭐라 변명하려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독자는 퇴장하고, 사람들은 그대로 굳어있다. 무대 위 책에 덩그러니 조명.
막.
- 호들갑 작가소개
-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책벌레입니다.
소금장수의 맷돌처럼 끝없이 이야기가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계속 꿈틀꿈틀 돌려보겠습니다.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