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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분의 천년

김은한
142호 2018.06.21
여러분과 만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짧은 사귐이지만 즐거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읽은 대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10분 희곡’이라는 대본인데요. 한 인물이 등장해서 10분간 자신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취업 면접 때 자기소개는 1분, 아니면 2분. 그러니까 이 대본의 1/10이나 1/5인데요. 그러니까 이런 부연설명을 할 시간은...
배우:
여러분과 만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짧은 사귐이지만 즐거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읽은 대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10분 희곡’이라는 대본인데요. 한 인물이 등장해서 10분간 자신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취업 면접 때 자기소개는 1분, 아니면 2분. 그러니까 이 대본의 1/10이나 1/5인데요. 그러니까 이런 부연설명을 할 시간은 없죠. 용건만 간단하게. 그러면서도 그 사람을 알 수 있게. 하지만 조직 운영에 필요한 요소들만. 인터넷으로 남을 모욕하는 게 취미거나 지독한 성적 취향을 갖고 있어도요. 조직이란 건 좋은 점만 바라보면 한없이 일하기 편하지요. 어렵지요~ 어렵다는 말로 퉁쳐버리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지만요. 저는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을 잘 안 믿어요. 어려우면 아무것도 안 하거든요.
배우:
3분은 제게는 좀 당연한 시간이에요. 컵라면을 기다리는 시간. 분리수거 내놓기 불편해서 그냥 편의점에서 사 먹는데요. 4분은 도저히 못 기다리겠거든요. 너무 길어서 매장을 어슬렁거리죠. 2+1행사 상품을 훑어보기도 하고, 왜 알래스카 연어 캔은 그렇게 퍽퍽한가 생각하기도 하고, 다들 참 초코를 좋아하는구나, 이 맥주는 세계 맥주라고 써놓고 사실 한국에서 만든 건가? 그렇지 거짓말은 안 했지. 세계 속의 한국.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요. 한 1분 25초 정도거든요. 그러면 할 게 없어서 컵라면을 보는데, 뚜껑이 제대로 안 다물려서 김이 새는 거죠. 삼각김밥으로 이렇게. 고정하고. 볶음면도 자주 먹어요. 근데 이건 물을 버려야 하는데 편의점에서는 국물 버리는 곳 냄새가 심하게 나잖아요. 물 버리는 곳은 따로 있으면 좋겠어요. 그렇지만 뭐, 인간의 역사는 곧 ‘쓰레기를 어디에까지 버릴 수 있나’의 문제니까요. 따로 있으면 쓰레기통이 하나 늘기만 하겠죠. 물 버리는 곳 입구가 아주 좁아도 어떻게든 쓰레기를 버릴 거 아니에요. 자잘한 얘기를 하면 연극이 아닌 것처럼 보일까 봐 이런 식으로 거대 담론을 끌고 와봤습니다. 아, 이건 농담인데요. 지문에 보면 ‘관객들 좀처럼 웃지 않는다. 조명이 어두워서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은 탓이다.’라고 쓰여있으니까 배우는 안심해도 좋다. 라고 쓰여있습니다. 굳이 말을 하는 이유는 이게 대사이기 때문인데요. 배우님, 시선과 침묵을 견디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하고 계시죠? (공연자는 자기 나름대로 대답한다)
배우:
제주도로 수학여행 갔을 때는 제대로 4분 기다리고 뚜껑을 열었는데요. 숙소 정수기가 고장이 나서 찬물인 거 있죠. 근데 냄새 안 나고 간이 맞으면 뭐든 먹을 수 있어요. 아, 근데 이건 초등학교 때 얘기거든요. 여러분이 보시는 것만큼 제법 살았거든요. 알고 보니 다섯 살이었다? 혹은 사실 인간이 아니었다? 천년 묵은 호랑이였다? 이런 전개 아니거든요. 지금부터 그런 방향으로 관객을 이끌어갈 자신 저한테 없거든요.
배우:
다시 다시, 10분으로 요약할 수 없는 제 인생이 있고 그건 선별되어서 이야기돼야 됨직한데요. 자기소개서를 쓸 때는 중학교 때까지의 역사는 없었던 셈 치잖아요. 제 취미와 특기가 본격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할 때가 10대 중반인데, 아깝긴 해요. 하기야 지금 제가 모든 과거의 합이기는 해요. 아닌가? 저는 아니지 않나요? 저는 사람한테 창조된 인물이고 그걸 배우가 연기하면서 마치 신에게 창조된 인물처럼 얘기하는 거잖아요. 신이 현실적이냐 아니냐는 얘기 안 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여기 쓰인 게 다고요. 천년을 살아도 무대에선 10분의 인생이죠. 축적된 과거나 그런 건 사실 없는 거죠. 근데 그게 실감 나야 되는 거잖아요. 조명이랑 음향도 받고, 문밖에 포스터도 붙어있는데, 근데 배우는 진실하게 거짓을 연기해야 하고, 여러분, 이 말이 마음에 걸리는 이유는 아마, ‘거짓’이라는 게 어감이 안 좋아서 그럴 텐데요. 그래도 가능하면 관객에겐 솔직하고 싶네요.
배우: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뭔가 의식을 갖고 의식을 거행하는 게 연극. 문제의식과 주제의식, 관객의 다양한 세계관을 관통하며 공통 감각에 도달해야 하는 건데, 그래서 아, 저 사람이 나구나, 저 사람이 우리구나, 해야 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의식하게 되는 거 있죠. 그러니까 이건 제 얘기가 아니라 작가의 얘기가 되는 거겠죠.
배우:
네 저는 지금 잠깐 작가인데요. 미안해. 잠깐만. 저도 들은 건데요. 동시대 연극 강연에서요.
배우:
아 근데 저는 그런 고민 안 해요. 생각해봐요. 삶의 모든 순간이 정해져 있고 거기서 대단한 애드리브를 할 수 없는 건데 그걸 제가 왜 고민합니까? 그냥 가끔 친구한테 불평하면서 할 일 하는 거죠. 끝까지 가보는 거죠. 강박에 시달리는 건 작가만으로 충분하잖아요. 저는 잠깐 쉬겠습니다.

무대 위에서 공연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한두 입 먹는다. 순대나 콜라, 건망고, 연극센터 앞에서 파는 닭강정 등 극장과 합의된 음식이라면 뭐든 좋다. 1분 정도 시간을 들여 맛을 음미해야 한다. 공연자가 리액션이 작은 사람이라면 굳이 클 필요는 없다

배우:
벌써 마칠 시간이 되었는데요. {공연자 스스로 아쉬워하고(아아~) 야유한다. (우우~)} 끝이 다가올수록 허둥대네요. 침착하기 힘들어요. 아마, 제가 여러분께 뭔가를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서 그런 것 같아요. 아니면 화장실이 급하던가. 왜 그렇잖아요. 집에 가까이 갈수록 소변이 더 마려울 때처럼. 이제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저는 제 시간을 모두 사용했고 보세요...이제 배우에게서...제가...떨어져나갑니다...연극이...삶과 분리되어 나갑니다...(이 장면은 충분한 여유를 두고 공연자의 신체를 가능한 최대한으로 사용해야 한다. 완전히 찢어져 떨어질 때까지. 한 조각도 남김없이 분리한다) 좀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면 좋았겠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10분은 후회하기에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짧은 시간이랍니다. 너무를 여러 번 발음하기에도 아까운 시간이에요... 자, 끝! (손뼉을 친다. 공연자. 같은 자세. 무언가를 잔뜩 기대하는 눈빛과 표정으로 관객을 바라본다. 서서히 암전)
호들갑 작가소개
누군가 꼼꼼히 읽어주신다면 기쁩니다. 희곡도 분명 기뻐할 겁니다.
빤히 바라보는 당신의 눈앞에서, 희곡은 자기 배역을 잘 수행하고 있나요?
아슬아슬하게 지속하고 있으니 또 뵙겠습니다.
아, 저는 순대를 좋아하고 포스트록을 들어요...서울 프린지 페스티벌에 참가했고......
사족 작은 소리로 계속 이어진다.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