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
박민영
149호
2018.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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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이 켜지면 무대에 TV소리가 들린다. 여자가 TV 앞에 앉아 채널을 돌리고 있다.여자: 아, 힘들어. 볼 만한 것도 하나도 없네. 초인종 소리여자: (TV 소리를 줄이며) 누구세요?
조명이 켜지면 무대에 TV소리가 들린다. 여자가 TV 앞에 앉아 채널을 돌리고 있다.
- 여자
- 아, 힘들어. 볼 만한 것도 하나도 없네.
초인종 소리
- 여자
- (TV 소리를 줄이며) 누구세요?
대답 없이 초인종 소리만 급하게 반복해서 울린다.
- 여자
- 아, 누구야 진짜… (TV를 끄고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연다)
문이 열리자마자 이웃 남자가 들어온다.
- 이웃 남자
- 아가씨 미안해요. 좀 실례할게요.
이웃 남자 막무가내로 여자를 밀치고 집 안으로 들어온다.
- 여자
- 아니, 잠시만요! 아저씨 누구신데요?
- 이웃 남자
- 나 여기 옆집 사는 사람인데, 처음 보나? 하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사를 와도 인사 한 번을 안 오니까…
이웃 남자 말을 하며 싱크대로 가서 가지고 온 커다란 냄비에 물을 받기 시작한다.
- 여자
- (수도꼭지를 잠그며) 뭐 하시는 건데요?!
- 이웃 남자
- 우리 집에 물이 안 나와 가지고 내가 씻지도 못하고 라면 하나도 못 끓여 먹고 있어.
- 여자
- 그런데요?
- 이웃 남자
- (수도꼭지를 다시 틀며) 아가씨 말 참 정 없게 하네. 그러니까 이웃 간에 이런 건 조금 나누면서 살 수 있지 않나, 싶은 거야.
- 여자
- 제가 왜요? 물이 안 나오면 주인 할머니한테 말을 하셔야죠.
- 이웃 남자
- 아, 말이야 했지. 골백번도 더 했는걸.
- 여자
- 근데요?
- 이웃 남자
- 못 고치는 거래. 고칠 수가 없는 거라는 데 뭐 어떻게 해? 그래서 어쩔 수가 없지 뭐. 그래도 마침 아가씨가 이사 와서 다행이네.
- 여자
- 수도를 못 고친다는 게 말이 돼요?
- 이웃 남자
- 아, 그러니까 말이야.
- 여자
- (다시 수도꼭지를 잠그며) 아니, 아니, 아무튼! 그래도 저희 집에서 이러시면 안 되죠. 저도 물 다 돈 내고 쓰는 건데.
- 이웃 남자
- 여기가 아가씨 집이야?
- 여자
- (황당하다는 듯이 웃으며) 이제 이사 왔으니까 저희 집이죠.
- 이웃 남자
- (수도꼭지를 틀며) 집주인은 그 할머닌데, 여기가 무슨 아가씨 집이야. 아가씨나 나나 그냥 다 세 들어 사는 사람이지. 똑같이 남의 집에 얹혀 사는 처지에 서로 도우면 좀 좋아?
- 여자
- (수도꼭지를 잠그며) 아저씨 저 여기 이사 올 때 보증금도 내고 월세도 냈거든요? 저희 집 맞으니까 나가세요.
이웃 남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여자 싱크대에서 냄비를 꺼내 남자에게 내민다.
- 여자
- 빨리 나가시라니까요.
- 이웃 남자
- 나, 참 더러워서… (주머니를 뒤지더니 동전 몇 개를 꺼내 세며) 백 원, 백 오십 원, 이백 원… 이백삼십 원.
이웃 남자 여자의 손에 쥐어 주고 냄비를 뺏어 다시 싱크대에 놓는다. 그리고 다시 물을 튼다.
- 여자
- 이게 뭐예요?
- 이웃 남자
- 물 값.
- 여자
- 네?
- 이웃 남자
- 돈 냈으니까 아가씨 집이라며? 그럼 나도 돈 냈으니까 내 물이지.
여자 당황해서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동전을 보고만 있다.
- 이웃 남자
- 이백 삼십 원이나 냈으니까 이걸로는 안 되겠네. 잠깐만 있어봐, 다른 통도 하나 더 들고 오게.
여자가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남자 퇴장한다. 냄비에는 물이 계속 차고 있다.
그 때 주인 할머니가 냄비를 들고 들어온다.
- 주인 할머니
- 아니, 이 집은 문을 열어두고 있네. 내가 분명히 여기 동네가 험해서 문단속 잘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 여자
- 아, 할머니 안녕하세요.
- 주인 할머니
- 어, 그래요. 이사는 다 잘했나 보네.
- 여자
- 네… 그건 그런데요, 할머니 이 옆집에 사는 아저씨 혹시…
- 주인 할머니
- 김 씨? (싱크대에 놓인 냄비를 보며) 하여튼 성질도 급하긴. 김 씨가 벌써 물 받으러 왔나보네. 내가 먼저 말 해주려고 했는데.
- 여자
- 네? 알고 계셨어요?
- 주인 할머니
- 아아, 김 씨네 집에 수도가 망가졌는데 그게 뭐 그 집 하나만 고쳐서 되는 게 아니라 여기 저기 다 뜯어서 고쳐야 되나 보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것 때문에 아주 골머리가 썩었잖아. 근데 마침 아가씨가 같은 층에 이사도 오고해서 이 집에 사람도 들어왔으니까 좀 같이 쓰면 좋잖아? 괜찮지?
- 여자
- 아뇨, 그건 아무리 그래도…
- 주인 할머니
- (싱크대에 있는 냄비를 가리키며) 저, 저 물 넘치겠네!
여자 황급히 싱크대로 다가가 수도꼭지를 잠근다.
- 주인 할머니
- (집을 둘러보며) 확실히 여자 혼자라 짐도 별로 없고 깨끗하게 잘 해놨네. 혼자 사는 건 처음이랬지?
- 여자
- 아, 네… 대학 와서도 계속 룸메이트랑 지내서 제 집이 생긴 건 처음이에요.
- 주인 할머니
- 응, 그래, 그렇지. 이제 여기가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있어요.
- 여자
- 네… 감사합니다. (말을 하며 물이 꽉 찬 냄비를 들어 바닥에 내려놓는다)
- 주인 할머니
- 아이고, 아이고! 아가씨가 힘이 장사네, 아주. 그걸 그렇게 세게 내려놓으면 어떡해, 응? 바닥에 기스 나겠어! 우리 집 바닥이 비싼 돈 주고 한 나무 장판이라 기스 나면 안 되니까 뭐든지 살살, 응? 그냥 아주 살살 내려 놔야 돼. 의자 같은 것도 끌지 말고! 무조건 들어서, 알았지?
- 여자
- 네? 네…
- 주인 할머니
- 그래, 그래요. 이제는 여기가 아가씨 집이라는 마음으로 편하게… (집안을 둘러보다 화장실 앞에 서서) 아니 참, 화장실 문도 닫아 두지 말고 열어 둬야지. 안 그러면 화장실 벽에 곰팡이가 껴서 집이 낡아요. 그리고, 아직 별로 춥지도 않은데 벌써 보일러를 틀어놨네. (혀를 차며) 우리집 보일러가 좀 오래 돼서 이렇게 선선한 날에도 틀면 나중에는 아예 못 쓴다니까.
- 여자
- …
- 주인 할머니
- 아, 내 정신 좀 봐. 이거 갖다 준다고 온 건데. (냄비를 내민다)
- 여자
- 이게 뭐예요?
- 주인 할머니
- 아, 사실 이 층에 물 나오는 집이 여기 하나라서…
- 여자
- 네?
- 주인 할머니
- 이건 요기 옆 옆집 거야. 여기 두고 갈 테니까, 물 좀 받아 놔줘.
- 여자
- 아니, 할머니, 계약 할 때는 그런 말씀 안 하셨잖아요.
- 주인 할머니
- 응, 그랬나? 내가 분명히 한 것 같은데… 아이, 뭐 그런 거야 이제 이사 왔으니까 하나씩 천천히 알아 가면 되는 거지.
- 여자
- 그래도 미리 말씀을 해주셨으면…
- 주인 할머니
- 미리 말하면 뭐가? 아니 집에 비가 새기를 해, 전기가 안 들어오기를 해? 그거 물 좀 같이 쓰는 게 뭐 얼마나 그렇다고, 응? 물은 그냥 틀면 나오는 건데 옆 집 사람들이 가끔씩 물 좀 받으러 오는 게 뭐가? 뭐가 어때서? 막말로 우리 집 내놓기만 하면 살겠다는 사람이 줄을 선다고. 젊은 아가씨가 혼자 산다 길래 내가 싸게 해준 건데 그렇게 말하면 서운하지. 내가 우리 집을 또 아무한테나 내주고 그러질 않는다고. 아가씨가 사람이 되고 싹싹해 보이니까 계약서에 도장 찍은 거야. 이제 여기가 아가씨 집이라며? 원래 집이라는 게 그래. 여기 저기 조금 흠이 있고 그래도 그냥 ‘그래, 앞으로 내가 살 곳이다’ 마음을 딱 먹고 정을 붙이면 그게 내 집이 되는 거라고. 무슨 말인지 알지?
- 여자
- …
- 주인 할머니
- 그러니까 이것도 좀 부탁할게 (냄비를 싱크대에 내려 두고 나가며) 뭐 불편한 거 있으면 바로 바로 말해주고
- 여자
- … 네, 네.
- 주인 할머니
- 이제부터 내 집처럼 편하게 지내면 돼요.
주인 할머니가 나가며 밖에서 이웃 남자와 인사하는 소리가 들린다.
곧 이웃 남자가 다른 냄비를 들고 여자의 집으로 들어온다.
- 이웃 남자
- 이건 조금 작은데 그래도 뭐 없는 것보단 낫겠지. 그새 다 찼네. (새로 들고 온 냄비를 내려놓고 물이 꽉 찬 냄비를 들고 나가며) 아가씨 저 냄비에도 물 좀 채워줘요.
- 여자
- 아저씨, 잠시만요.
- 이웃 남자
- 에? 왜 그래요?
여자 이백삼십 원을 다시 이웃 남자에게 돌려준다.
- 여자
- 돈 다시 가져가세요.
- 이웃 남자
- 왜 갑자기? 아가씨 물이라고 눈에 불을 켜더니?
- 여자
- 아니요, 제 물도 아닌 걸요.
- 이웃 남자
- 나 이거 받아도 계속 물 받으러 올 건데?
- 여자
- …그러세요.
- 이웃 남자
- 아니 그 사이에 무슨 바람이 들었대.
이웃 남자 돈을 돌려받고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를 부르며 나간다.
여자, 할머니가 두고 간 냄비를 싱크대에 올려놓고 수도꼭지를 튼다.
그리고 다시 TV 앞에 앉아 TV를 켠다.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