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
박지연
150호
2018.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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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 비좁은 반 지하 집이다. 후덥지근하고 매캐한 공기가 방안을 채우고 있다. 살림살이들은 단출하다. 작고 기울어진 옷걸이, 챙이 헤진 중절모, 누렇게 변색된 선풍기, 수저 한 세트, 바닥을 태운 냄비 등, 죽은 노인의 흔적은 소박하고 외로워 보인다.
때 2018년, 여름
곳 오래된 빌라 촌, 반 지하 집
은성(26) 특수청소부 근무 1일 차 새내기
광수(55) 특수청소업체 실장, 업계 15년차 베테랑
무더운 여름, 비좁은 반 지하 집이다. 후덥지근하고 매캐한 공기가 방안을 채우고 있다. 살림살이들은 단출하다. 작고 기울어진 옷걸이, 챙이 헤진 중절모, 누렇게 변색된 선풍기, 수저 한 세트, 바닥을 태운 냄비 등, 죽은 노인의 흔적은 소박하고 외로워 보인다.
구석에 난 작은 창을 가로막는 쇠창살 사이로 빛이 조금 비친다. 이불 위로 햇살이 드리운다. 이불은 반쯤 걷어져 있으며, 그 아래 누군가 옆으로 누운 모습 그대로, 검은 핏자국이 그림자처럼 남아 있다. 핏자국의 머리맡에 인명용 한자 사전 한 권이 놓여 있다. 그 옆으로 무선 공책 여러 권이 뒹군다. 공책에는 단 한 글자, ‘방울 란(鸞)’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방역복과 마스크를 착용한 광수, 방을 둘러보며 한숨을 쉰다. 곧 락스 뿌려가며 핏자국을 걸레질한다. 현관 바깥에서 은성의 구역질 소리가 들려온다. 광수, 들은 체도 안 하며 청소만 하다가 공책들을 잠시 들춰 본다. 한자 사전 맨 첫 장을 펼쳐 목차를 살핀다.
은성, 괴로운 얼굴로 들어온다.
- 광수
- 다 했냐?
- 은성
- 예…… 죄송합니다.
- 광수
- 첫 날엔 다 그래. (공책들 가리키며) 이것들 정리해.
- 은성
- 예. (공책들 한 데 모으며) 어디에 넣을까요?
- 광수
- 쓰레기봉투 있잖아.
- 은성
- 예. (봉투 가져온다. 넣기 전에 공책 살펴보다가) 다 버리나요?
- 광수
- 그럼 가져가서 머리맡에 두고 잘래?
- 은성
- 아뇨…… 그래도 유품이니까.
- 광수
- 어차피 무연고자라서, 챙겨놔도 다 버리게 되어 있어.
은성, 공책을 봉투에 집어넣는다. 넣기 전에 공책을 한 권씩 한참 들여다본다.
- 광수
- (걸레질하다 말고) 뭐하니?
- 은성
- (공책 펼쳐 보이며) 전부 똑같은 글자라서.
- 광수
- 그래서?
- 은성
- 뭔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 광수
- 임마 우리 탐정 놀이하러 온 거 아냐. 청소하러 왔지.
- 은성
- (사이) 유품 정리업체이기도 하잖아요.
- 광수
- 받을 사람이 있어야 유품이지.
- 은성
- 그래도……
- 광수
- 생각보다 별 의미 없다. 사람들 남기는 거.
은성, 공책을 다시 덮으려다가, 손끝으로 글자를 천천히 매만진다. 광수는 침묵 속에 핏자국의 머리를 거의 다 지워간다. 생각에 잠겨 있던 은성, 광수의 눈치를 살피다가 한자 사전 가져와 들춰 본다. 목차에서 ‘방울 란(鸞)’ 찾는다. 사전의 맨 뒷장을 펼친다.
- 광수
- (핏자국의 손을 지우며) 너 글 쓰는 애지?
- 은성
- 예? 아뇨…… 아니, 예…… 뭐 아직 작가는 아닌데요.
- 광수
- 취재하러 왔지?
- 은성
- 아뇨…… 아니, 겸사겸사…… 어떻게 아셨어요?
- 광수
- 보면 알지. 가끔 연락이 와, 일 년에 한두 명. 현장 취재하겠다고. 와서 토악질만 하고 가거나. 어린 애들은 사진 몇 장 찍고 휙 가거나…… 취직한 놈은 처음이네. 너는 뭐 쓰니?
- 은성
- 이거저거…… (사이) 희곡이요.
- 광수
- 희곡이 뭐야. 나는 그런 쪽 잘 몰라.
- 은성
- 연극 대본이요.
- 광수
- 아…… 그래서 뭘 쓰고 싶니?
- 은성
- (사이) 희곡이요.
- 광수
- 장르 말고. 어떤 이야기 쓰고 싶냐구.
- 은성
- 아직 구상 단계라서요. 소재만 있고 줄거리는 아직……
- 광수
- 떠오르는 건 없어? 뭐 건져가야 할 거 아니야.
- 은성
- (사이) 왜 한 글자만 썼을까요.
은성, 봉투 속 공책을 다시 꺼내 바닥에 모두 펼쳐 놓는다. 사전을 손에 든다.
- 은성
- 모양새를 보니 한자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닌데, 되게 서투른데, 한 획 한 획 또박또박 힘 줘서, 이 공책들 전부 ‘란’으로 채웠어요. 방울 란이요…… 획수도 많은데 한 번을 안 흐트러졌어요. 이름인 것 같아요. 아주 중요한 이름이요. 여기, 이 책도 인명용 한자 사전이고요.
- 광수
- (핏자국의 가슴팍을 지우며) 누구 이름.
- 은성
- 가족 아닐까요? 아내이거나 딸이거나, 그 딸의 딸이거나…… 아. 손녀인데 아직 안 태어난 거죠. 이름을 지어주려 했는데, 딸은 찾아오지 않고요. 딸 기다리면서 손녀 이름을 쓰고 또 쓰고…… 기다리는 내내 혼자 연습한 거예요. 멋있는 글자로 선물하려고요. 와, 슬프다 이거.
- 광수
- 근데 왜 죽었을까?
- 은성
- (자신 없게) 안 찾아와서…… (사이) 아님 가족 말고, 그런 거 있잖아요. 못 이룬 첫사랑 같은거. 어머니가 그랬는데요. 초등학교 때 짝사랑하던 애가 평생 생각나더래요. ‘니들 다 키우면, 살 빼고 다시 찾아갈 거야’ 이랬어요. 이 할아버지한테 ‘란’이 그런 거예요. 한평생 그리운 사람. 그리움이 그리다에서 온 거래요. 그러니까 계속 그린 거예요. 기억 속에 얼굴은 다 흐릿해져서 찾지도 못 하고, 남아 있는 그 여자 이름이라도 계속 그린 거예요. 오 완전 멋있죠.
- 광수
- 첫사랑 못 찾아서 죽었을까?
- 은성
- (사이) 아니면 뭐 만나 뵙기로 한 은사님이라거나. 그게 아니면 개, 키우던 개……
- 광수
- 심심할 때 뭐하니?
- 은성
- 예? 저는…… 산책하거나, 뭐 읽거나, 보거나.
- 광수
- (핏자국의 사타구니를 지우며) 그냥 심심한 거 말고. 지독하게 심심할 때. 찾아오는 사람 없고. 찾아갈 사람도 없고. 약속 하나 없고. 기약도 없고. 집에 있자니 사람도 없고 개도 없고. 개밥 줄 일도 없고. 할 일이 제 밥 차려 먹는 것뿐인데 밥 다 먹으면 다시 할 일 없고. 꼭 그렇게 석 달. 한 해. 오 년. 십 년. 그래서 울고 싶을 만큼, 심심해서 울고 싶을 만큼 지독하게 심심할 때. (다리를 지우며) 오밤중에 미친 사람처럼 뛰고 싶은데, 다리가 쑤셔가지고 느릿느릿 굼뜨게 걷다 하늘에 뜬 달도 보고 하는데, 그래도 심심할 때. 어떻게 시간을 죽일 수 있을까. 뭘 하면 시간을 죽일 수 있을까. 내내 고민하고 걷는데, 길목에 누가 책을 내다버린 거야.
- 은성
- (집중해서 듣다가) 그래서요?
- 광수
- 들고 온 거지. 근데 웬 걸? 한자 사전이네.
- 은성
- 왜 방울 란일까요?
- 광수
- 나야 모르지…… (사이) 야. 네가 생각한 게 낫다. 나는 이런 쪽 잘 몰라.
- 은성
- (사이) 저도 모르겠어요.
- 광수
- 왜 쓰고 싶냐.
마침내 핏자국을 다 지운 광수. 걸레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 수도꼭지를 튼다.
- 은성
- (나지막이) 심심해서.
은성, 멍하니 허공을 보다가 귀에 걸고 있던 마스크를 손에 쥐고 크게 숨을 들이켜 본다. 또 구토가 치밀려 하지만 견딘다. 고요한 방을 둘러보다가, 펼쳐진 공책 위를 가만히 바라본다. 긴 사이. 문득 손끝으로 글자를 따라가 보는 은성. 한 획 한 획, 천천히 또박또박 힘을 준다. 총 서른 획이다.
은성, 빠르게 사전의 목차를 뒤져본다. 광수, 걸레를 털며 화장실에서 나온다.
- 은성
- 어떻게 시간을 죽일 수 있을까.
- 광수
- (이불 걷어내고, 깨끗해진 바닥을 보며) 뭐하니?
- 은성
- 획수가 많아요. (사이) 란이요. 사전에서 획수가 제일 많아요.
서서히 암전되며 막 내린다.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