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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희
152호 2018.11.22
너 저기, 우리가, 저기에 갈 수 있을까? 나 가다보면, 계속, 가다보면 도착하겠지. 너 배가 너무 느려. 이거 뒤로 가고 있는 거 아니야? 하나도 안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 전혀 저기에 가까워지고 있지 않잖아.

등장인물

너

나

장소

물 한가운데

너와 나, 힘들게 노를 젓고 있다.
너
저기, 우리가, 저기에 갈 수 있을까?
나
가다보면, 계속, 가다보면 도착하겠지.
너
배가 너무 느려. 이거 뒤로 가고 있는 거 아니야? 하나도 안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 전혀 저기에 가까워지고 있지 않잖아.
나
천천히, 아주 조금씩 가고 있어.
너
넌 어쩜 그렇게 급하질 않아? 너한테는 시간이라는 게 없는 것 같아.
나
어차피 저기는 항상 저기에 있어. 우린 천천히 가면 되는 거야.
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느리잖아. 더 이상 견디기 힘들 것 같아. 우리 빨리 가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잠시) 헤엄쳐서라도 갈래?
나
그러다간 얼마 못가서 어깨가 결리고 다리에 쥐가 날 거야. 노나 저어.
너, 점점 지쳐 가며 노 젓는 속도가 느려진다.
너
힘들어. 팔 아파.
나
그래놓고 헤엄은 어떻게 친다고 한 거야?
너
그건 사생결단이잖아. 죽기 살기로 헤엄치는 거지.
나
노를 그렇게 저어 봐. 죽기 살기로.
나, 더 열심히 노를 젓는다.
너
그렇게 하면 배가 뒤집힐 거야!
나
빨리 가고 싶다며.
나, 처음보다 훨씬 빠르게 노를 젓는다.
너
어, 어, 조심해. 뒤집힐 것 같아.
나
뒤집히면 물에 빠지면 되고, 물에 빠지면 헤엄치면 되지!
너
헤엄치면 어깨가 결리고 다리에 쥐가 난다며?
나
그래도 빨리 가고 싶다며! 더 빨리 저어!

너와 나, 필사적으로 노를 젓는다.

그러다가 배가 뒤집히고

너와 나, 물에 빠진다.

나
어, 어, 웁.
너
웁. 웁.

너와 나, 물속에서 허우적대다

문득 일어서니 발이 땅에 닿는다.

나
어, 이게 뭐지? 이렇게 얕은 물이었어?
너
이 정도 깊이면 헤엄은커녕 걸어가도 되는 거잖아. 어깨가 결릴 염려는 없어졌어.
나
그래도 조심하자. 다리에 쥐가 날 수도 있잖아.

너와 나, 걷기 시작한다.

하지만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다.

너
물에서 걷는 건 참 어렵구나.
나
그렇다고 헤엄칠 수도 없는 깊이야.
너
근데 우리 지금 여기에 왜 빠져 있는 거지?
나
글쎄, 배가 뒤집혔으니까.
너
그럼 우린 왜 저 배를 타기 시작한 거지?
나
그냥…… 저 배가 좋아서 보자마자 뛰어들었어.
너
나도.
너와 나, 계속 물속을 걷는다.
너
어? 저쪽 길가에서 누군가 손을 흔드는데? 이쪽을 향해서 뭐라고 소리치고 있어. 뭐라고요? 어쩌라는 거니? 저 사람. 우리한테 뭘 말하려는 거야? 우리보고 미쳤냐는데? 저 손짓을 봐봐. 머리 위에서 손가락을 빙빙 돌리고 있잖아. Are you crazy? 라고 했어. 분명히 들었어.저 사람 뭐야? 우릴 놀리고 있잖아. 어서 자기 쪽으로 오라고 하는데? 저 사람은 지금 벌써 도착해서 놀고 있는 거야? 우린 뭘 하고 있는 거지? 난 단지 저 배가 좋았을 뿐이야. 그래서 달려들었던 것뿐이야. 그뿐이라고. 근데 왜 내가 이런 패배감을 느껴야 하지? 왜 저런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거냐고!
나
그렇게 생각하지 마. 천천히 가든 느리게 가든, 저기까지 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너
너무 늦으니까 문제지. 아니, 늦는 건 둘째 치고, 도착할 수 있느냐, 싶은 거지, 이제.
너와 나, 하염없이 물속을 걷는다.
너
저기, 우리가, 저기에 갈 수 있을까?
나
가다보면, 도착하겠지.
너
그럴까? 근데 지금 우리 걷고 있긴 한 거니? 물속에서 걸으려니까 느낌이 안나.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건지. 내 다리가 움직이고 있긴 한 건지. 제자리걸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나
자꾸 딴 생각해서 그런 거야. 좀 조용히 걸어보자.
너
넌 내가 말하는 게 방해가 됐었구나.
나
아니야, 그건.
너
맞아. 내가 널 방해했어.
나
왜 그래? 너 지금 예민해졌어. 그러지마. 우린 같이 저 배가 좋았고 같은 배를 탔잖아.
너
그렇긴 그래.
나
그래서 친해졌고.
너
그렇지.
나
지금 이렇게 함께 배를 타고 또 같이 걸으면서 점점 친해지고 있지.
너
우린 사실 친한 편은 아니었어. 인사만 하는 정도였어.
나
그렇지. 우린 더 친해질 거야.
너
맞아. 저기에 도착하고 나면 우린 멋진 친구가 되어있을 거야.
나
꼭 저기에 도착해야만? 지금 여기서는 친구 아니고?
너
여기서도 친구지.
나
난 만약 저기에 도착하지 못하더라도 널 친구로 얻었다는 것에서 행복을 느낄 거야.
너
정말?
나
응, 정말.
너
그 정도라니 참 고마운 걸.
나
넌?
너
나? 솔직히 난, 네가 좋긴 하지만 너와 함께 꼭 저기에 도착하고 싶어. 저기에 도착해야만 나의 존재도, 우리의 관계도 확실해질 것 같아. 서운하니?
나
아니. 아니야. (잠시) 걷자. 우리.
너
그래, 계속 걷자.
나
그래, 언젠가 도착하겠지.

너와 나, 아무 말 없이 계속 걷는다.

너, 점점 속도를 내고

나, 점점 속도가 줄어든다.

너, 필사적이다.

결국

너, 먼저 저기에 도착한다.

나
어?
나, 계속 걷지만 저기에 도달할 수가 없다.
나
기다려 줄 거지?
너, 나를 바라보며 머리 위에서 손가락을 빙빙 돌린다.
나
뭐라고? Are you crazy? 라고?

너, 사라지고

나, 문득 걷기를 멈춘다.

-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