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가까이에
김한
154호
2018.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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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책 ‘폭력과 존엄 사이’를 읽는 중이다.리가 보는 것은 피와 살로 고동치는 삶의 어느 한 부분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세상의 악에 대한 무지는...’
인물
할머니(70대)
남자(대학생)
남자, 책 ‘폭력과 존엄 사이’를 읽는 중이다.
- 남자
- ‘우리가 보는 것은 피와 살로 고동치는 삶의 어느 한 부분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세상의 악에 대한 무지는...’
- 할머니
- 이따 냉면 먹을까? 점심에.
- 남자
- ‘세상의 악에 대한 무지는 나의 게으름 일 뿐’ 은유.
- 할머니
- 오랜만에 할미도 봤는데, 냉면 한 그릇 하자. 할미가 살게.
- 남자
- 아침 먹은 지 얼마 안됐잖아요. ‘연민이 내 삶을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만 남을 걱정하는 기술이라면 공감은 내 삶을 던져 타인의 고통과 함께하는 삶의 태도다’ 수전 손택.
- 할머니
- (엉덩이를 두드리며) 우리 손자, 언제 이렇게 컸나. 어려운 말도 잘도 해대고. 할미한테도 글 좀 알려주면 안되려나.
- 남자
- 할 게 있어서요.
- 할머니
- 바빠?
- 남자
- 네.
- 할머니
- 그럼 책 읽어줘. 궁금해 할미도.
- 남자
- 내용이 어려워서요.
- 할머니
- 그럼 냉면이나 먹으러 가!
- 남자
- 안 먹는다고요. 저 책 좀 읽을게요. 과제예요, 과제. 안 그래도 바쁜데...
- 할머니
- 과제가 뭐야?
- 남자
- 있어요. 억지로 해야 하는 거.
- 할머니
- 억지로 왜 해? 하지마, 하지마.
- 남자
- 해야돼요. 그나마 책이 재밌어서 다행이네, 뭐.
- 할머니
-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재밌으면 해.
- 남자
- 그러니까, 가만히 좀 있어주세요.
- 할머니
- 그려 그럼.
노트북으로 타이핑을 하는 남자.
- 남자
- ‘그래도 진실은 언제고, 반드시, 밝혀진다는 거, 나 그걸 알았네.’
- 할머니
- 그렇지!
- 남자
- ‘어르신들을 만나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을 한 세계를 본 것에 감사한다. 폭력과 존엄 사이를 눈물, 연민, 인식, 성찰, 화해, 신의로 채운 묵직한 생애 서사는...’
- 할머니
- 그렇지! 인생이 드라마야.
- 남자
- 쫌... 할머니, 간첩 조작 사건 알아요?
- 할머니
- 그게 뭐야?
- 남자
- 위안부에 대해 알아요?
- 할머니
- 그건 또 뭐래?
- 남자
- 세월호는요? 모르시죠? 하루종일 티비만 보시면서 뭘 보시는거예요?
- 할머니
- 드라마 보지, 드라마. 인생이 드라마라니까. 재밌어. 아침에 하는 것들 보면.
- 남자
- 네네. 그저 재미면 되는 거죠. 재미.
- 할머니
- 인생은 재밌어야해.
- 남자
- (타이핑 치며 건성으로) 네네. 좋죠. 재미. 아주 좋아요. 부조리한 세상에서 아픔과 싸워온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우리 할머니는 어떤 세상을 사셨나 몰라.
- 할머니
- 할미는 살았지.
- 남자
- 네?
- 할머니
- 살았다고. 할미는 그저.
- 남자
- 그저 사니까, 그저 그렇게 살아지는 건가.
- 할머니
- 살아지니까, 사는 거지. 뭐.
- 남자
- 저 과제 좀 할게요.
- 할머니
- 그려, 해. 과자.
- 남자
- ...
집 안을 돌아다니다 앨범을 가져오는 할머니.
- 할머니
- 요만 할 때는 할머니, 할머니. 하면서 할미만 쫓아 다녔었는데...
- 남자
- ...
- 할머니
- 지 형한테만 아이스게키 사준다고 지랄, 지랄을 했었는데... 기억나냐?
- 남자
- 제발요. 할머니. 나 과제 좀 한다니까. 이건 또 왜 가져와요?
- 할머니
- 누가 하지말라 그랬나? 나도 그림이라도 봐야지. 너가 글 안알려준다매.
- 남자
- 전에도 알려드렸었잖아요.
- 할머니
- 까먹었어. 기억도 배운 사람이 하는 거야.
- 남자
- 어릴 때 조금이라도 배우시지 그랬어요.
- 할머니
- 바빴어. 사느라.
- 남자
- 지금은요? 요즘 노인 학교가 얼마나 많은데.
- 할머니
- 얼마나 남았다고. 배운다고 달라지나.
- 남자
- 달라져요.
- 할머니
- 그러냐.
- 남자
- 네. 달라져요. 뭐라도 알아야 뭐라도 바꿀 수 있어요. 진실을 알아야 세상이 달라져요.
- 할머니
- 어려운 말도 잘하고, 장하네. 우리 손주.
- 남자
- 네...
- 할머니
- 할미는 그런 거 몰라. 배운게 없어서.
- 남자
- 핑계죠.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으면 할 수 있었을 거예요.
- 할머니
- 할미가 얼마나 바빴는데. 니 엄마가 너 낳고 일 나가버렸을 때도 요 갓 난 거 업고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서. 기억도 못 하나. 섭하게.
- 남자
- ... 그전에는요? 젊었을 적에는 뭐 하셨는데요?
- 할머니
- 그때는... 이리 저리 살았지.
- 남자
- 뭐 다 이리 저리야.
- 할머니
- 말해서 뭐 해? 다 지난 일을.
- 남자
- 할머니도 아픔이 있어요?
- 할머니
- 왜 없어.
- 남자
- 뭔데요?
- 할머니
- 말 못 해. 이미 지웠어.
- 남자
- 컴퓨터야 뭐야.
- 할머니
- (노트북을 만지며) 요게 컴터... 그거지?
- 남자
- 됐어요. 안 물어볼게요. 더 이상.
- 할머니
- 우리 손주 아는 것도 많고, 좋겠어. 할미도 그때 많이 알았더라면 좋았을텐데.
- 남자
- 말을 하겠다는 거예요? 말겠다는 거예요?
- 할머니
- 아는 게 좋은 것도 아니야.
타이핑을 하는 남자.
- 남자
- ‘살아낸 시간, 그것은 그의 재산이자 그의 독특함이다’ 장 아메리... 할머니.
- 할머니
- 왜?
- 남자
- 냉면 먹으러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