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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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남자(30대): 업무에 지친 회사원 복장
여자(20대): 화려한 색감의 패션
노인(60대): 검소하고 단정한 노신사 느낌, 배 나온 풍채 있는
버스정류장 벤치를 배경으로, 길바닥에 거미처럼 납작 붙어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냄새를 맡는 듯 무언가를 열심히 찾는 중인 남자. 마치 시력이 퇴화한 하등 생물처럼 눈을 아주 가늘게 뜨고 두리번거리고 있다. 왼편에서 안경 쓴 여자 등장,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으로 동영상 시청 중. 버스를 기다리는 듯 자연스럽게 정류장 앞에 선다. 계속 코를 바닥에 대고 냄새를 맡으며 무언가를 찾는 남자, 여기저기 엉금엉금 다니다가 마침내 서 있는 여자의 발, 다리 쪽에 다가가 냄새를 맡기 시작한다. 깜짝 놀라는 여자.
- 여자
- (화들짝 놀라 한쪽 이어폰 빼며) 어머! 뭐예요!
- 남자
- 선생님? 어머, 아니시구나. 죄송합니다. 제가 안경을 잃어버려서요. 제가 안경이 없으면 정말 하나도 안 보이는데, 분명 이 근처에서 안경을 떨어뜨린 것 같은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찾을 수가 없네요. 지금 안경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저 때문에 불쾌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 여자
- 네. 됐어요.
여자, 다시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을 보기 시작한다. 남자는 계속 버스정류장 주변 바닥을 더듬으며 안경을 찾고 있다.
- 남자
- (부지런히 바닥을 더듬으며 혼잣말처럼) 제가 정말 상황이 급해서요. 오늘 집사람 출산예정일이기도 하고요. 정말 빨리 병원에 가봐야 하는데, 그러려면 뭐가 보여야, 앞이 좀 보여야 버스를 탈 수 있을 텐데, 안경을 빨리 찾아야 할 텐데.
남자, 계속 장님처럼 실눈으로 바닥을 더듬는다. 여자, 아무래도 남자가 딱하다는 생각이 드는지 이어폰을 빼고 남자에게 말을 건넨다.
- 여자
- 여기 근처 바닥에 떨어뜨리셨다고요? (자신이 쓰고 있던 안경 한 번 만져 올려 쓰며) 저도 안경 없으면 코앞에 있는 것도 안 보일 정도로 시력이 안 좋아서 그 심정 잘 알아요. 엄청 무섭고, 답답하시겠어요. 같이 찾아드릴게요.
- 남자
- 감사합니다.
여자, 남자와 함께 바닥을 열심히 살피지만 소득은 없다.
- 남자
- 이게 어디 갔지? 분명 여기 근처인데. 저기 정말 죄송한데, 아까 안경 쓰신다고 하신 것 같은데, 만약 지금도 쓰고 계신다면 잠깐만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안경 쓰고 찾으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아서요.
- 여자
- 그건 좀. (잠시) 저도 안경 벗으면 장님이나 다름없는 처지라.
- 남자
- 금방 찾고, 바로 돌려드릴게요. 네? 아내가 병원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그래요.
여자,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말없이 안경을 벗어서 남자에게 씌워준다. (여자는 안경을 벗자마자 장님처럼 실눈을 뜨게 되고, 남자에게 안경을 씌워줄 때도 남자 얼굴을 손으로 더듬어 만지며 씌워주는 상황) 안경을 쓰게 된 남자, 눈을 번쩍 뜬다.
- 남자
- 찾았다! 고맙습니다. 앞이 아주 훤하게 보이네요. 덕분에 늦지 않게 아내한테 갈 수 있게 되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꼭 갚겠습니다.
남자, 여자에게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하고 신바람 나게 달려나가며 무대 밖으로 퇴장한다.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된 여자, 아까 눈이 보이지 않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바닥을 손으로 더듬으며, 이미 떠나고 없는 남자의 빈자리를 향해 소리친다.
- 여자
- 저기요! 여보세요? (반응이 없자) 어디 가셨지? 제 안경인데, (절실하게) 저도 안경 없으면 하나도 안 보이는데, 제 안경 돌려주셔야지요!
여자, 한참을 바닥을 더듬어 버스정류장 벤치에 불쌍하게 앉아 울기 시작한다. 점점 크게 소리 내어 운다. 암전.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 있는 여자. 너무 울어서 화장도 눈물에 번지고 지친 모양새. 여전히 장님처럼 앞을 볼 수 없다. 안경을 쓴 노인 등장. 무심히 버스를 기다리는 듯 섰다. 들고 있던 신문을 펴 읽으려다가 여자의 울음소리가 커지자 여자 쪽을 바라본다.
- 노인
-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 (여자에게 다가가며) 괜찮아요?
- 여자
- (노인의 목소리 방향으로 손을 더듬으며 찾아가며) 아저씨? 아저씨, 오셨어요? 안경 가지고 오셨어요? 제 안경은요? 얼른 돌려주세요.
- 노인
- 안경이라뇨?
- 여자
- 아저씨? (노인의 두툼한 배를 다시 만지더니) 아저씨, 아니네요. 누구세요?
- 노인
- 난 방금 막 버스 타려고 온 사람인데, 아가씨가 너무 서럽게 울길래. 아가씨, 괜찮은 거예요?
- 여자
- (다급하게) 저기 혹시 주변에 회사원같이 생긴, 안경 쓴 남자 없나요? 제가 지금 앞이 하나도 안 보여서요. (계속 울먹이며) 계속 기다리고 있는데, 올 생각을 안 하네요. 벌써 얼마를 기다리고 있는지 몰라요.
- 노인
- 그 나이 때에는 만남과 이별이 잦은 법이죠. 너무 상심 말고 얼른 기운 차리고 털고 일어나세요. (여전한 여자의 울음소리에 약간 멋쩍은 듯) 아, 늙은이가 집에 있는 우리 막내딸 아이 같아서 하는 말이니 오해는 하지 마시고요. 힘내시라고요.
- 여자
- (눈물을 삼키며) 분명히 올 거라 했는데, 안경을.
- 노인
- 아, 나도 안경 없으면 장님이나 마찬가지라 그 마음 잘 알죠. 기다리는 사람이 어디쯤 있나, 궁금한 거구나.
- 여자
- (절실한) 어르신. 저 좀 도와주세요. 아무것도 안 보여서 찾을 수가 없어요. 네? 제발요.
- 노인
- 쓰고 있는 안경이라도 벗어드려야 하나? 이 건 돋보기라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
- 여자
- (반색하며) 지금 안경 쓰고 계세요? 돋보기라도 괜찮아요. 잠깐만요. 잠깐만 써볼게요.
- 노인
- (약간은 난감하다는 듯) 하, 이거 참.
여자, 안 보이는 눈으로, 손으로 더듬어 노인을 더듬는데 노인의 두툼한 배가 만져지자 낙심한 표정으로 다시 묻는다.
노인, 안경을 벗어 여자에게 씌워준다. 노인은 눈을 껌뻑거리며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고 안경을 쓴 그녀는 눈을 번쩍 뜨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 여자
- 잘 보여요. 돋보기이긴 해도 보여요. 감사해요.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여자, 노인을 벤치에 앉히며) 잠깐만 기다려주시면 분명 누군가, 제 안경을 훔쳐 간 사람이든, 분명 누군가 와서 어르신을 도와드릴 거예요. (노인을 두고 떠나려는) 잠깐만 안전하게 여기 계세요.
- 노인
- 아니, (당황해서) 아가씨, 뭐, 뭐라고요? 아니, 아무것도 안 보이는 사람을 그냥 두고 가려 하면 어떻게 해요!
노인, 여자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어 허우적거린다.
- 여자
- 죄송해요. 어르신, 저한테 친절을 베풀어주신 건데, 그런데 저도 똑같이 당했어요. 정말 죄송해요. 조금만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누구든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여자, 노인에게 90도 허리 숙여 인사하고 재빠르게 퇴장.
- 노인
- 이 봐! 아가씨!
난처한 표정의 노인, 한숨이 깊어진다. 암전.
노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로 시무룩하게 벤치에 앉아있다. 남자, 주위를 살피며 등장. 노인을 발견하고 뜻밖의 반가운 기색이다.
- 노인
- 거기 누구요? 나를 아는 사람이요?
- 남자
- 저, 정종원이에요. 여수고등학교 2학년 3반 반장, 정종원이요. 선생님, 저 모르시겠어요? 꾀돌이 정종원.
- 노인
- 누구요? 여수고등학교 2학년 3반 정종원? 정종원이 누구지? 지금 내가 안경을 잃어버려서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답니다.
- 남자
- 선생님, 안경을 잃어버리셨다고요? 제 안경이라도 쓰시고, 제 얼굴 한 번 봐주세요. (자신의 안경을 벗어서 노인에게 씌워주며) 저 알아보시겠어요? 선생님.
- 노인
- (안경을 쓰게 된 노인, 눈을 번쩍 뜨며) 이도 저도 못 하고 참 난처한 상황이었는데, 고마운 젊은이구먼.
- 남자
- 웬걸요. 저도 어떤 마음 좋으신 분의 도움을 받아서 곤경을 벗어난 적이 있는걸요. (해맑게) 어때요? 선생님? 저 종원이 알아보시겠어요? (노인에게 안기려는 듯 두 팔을 내밀며) 선생님!
- 노인
- (남자 곁을 벗어나며) 미안하네. 젊은이. 자네가 누군지 잘 모르겠지만 분명 좋은 사람인 것은 확실하네. 미안하게도 나도 여기에서 안경을 도둑맞아 온종일 이러고 있었다오. 정말 미안하게 됐네.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시게나. 젊은이는 좋은 사람이니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걸세.
- 남자
- 선생님? 선생님!
노인, 퇴장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남자, 허탈한 표정으로 손으로 바닥을 더듬으며 열심히 기어 다니고 있다. 1막이 반복되는 상황. 안경 쓴 여자 등장,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으로 동영상 시청 중. 버스를 기다리는 듯 자연스럽게 정류장 앞에 선다. 암전.
- 호들갑 작가소개
- "영화감독 방재호입니다.
평소에는 인형처럼 가만히 잘 지내다가 가끔은 시를 쓰거나 영화를 찍습니다.
내가 만드는 이야기들을 통해 당신의 마음속을 유영하는 물고기가 되고 싶어요.
옮겨 적을 수 있는 작은 물 한 모금만 있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