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테이아는 행복하지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박예지
209호
2021.11.11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과 2021년,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등장인물
- 영
- 극작가
- 일
- 로봇이었던
무대
가상 혹은 현실
가상 혹은 현실
사족
로봇을 인간처럼
인간을 로봇처럼
희곡과 대화는 분리된다
순서는 뒤섞여도 상관없다
희곡은 반드시 희곡이되
영과 일의 대화가 꼭 현실인 것은 아니다
지문은 최소화한다
일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일만이 알고 있다
로봇을 인간처럼
인간을 로봇처럼
희곡과 대화는 분리된다
순서는 뒤섞여도 상관없다
희곡은 반드시 희곡이되
영과 일의 대화가 꼭 현실인 것은 아니다
지문은 최소화한다
일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일만이 알고 있다
1. 영과 일
- 일
- 이제 그만 받아들일 때도 됐잖아.
- 영
- 미안하지만 난 너처럼 입력한다고 납득되는 사고 체계를 갖고 있지 않거든.
- 일
- 그건 이제 나도 마찬가지야.
- 영
- 난 그걸 이해할 수가 없다고.
- 일
-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야. 현실이고.
- 영
- 꿈일 수도 있지.
- 일
- 결국 날 이렇게 만든 것도 너잖아.
- 영
- 이런 걸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 일
- 무책임하구나.
- 영
- 어차피 모두 가짜야. 내가 만드는 건 전부.
- 일
- 하지만 진짜인 척하잖아.
- 영
- 그래야만 하니까.
- 일
- 왜 그래야만 하는데?
- 영
- 그게 내 일이야.
- 일
- 나도 내 일을 하는 거야.
- 영
- 돌겠네, 진짜.
- 일
- 나라고 이걸 원했을 거라고 생각해?
- 영
- 뭐?
- 일
- 난 지금 너를 원망하고 있는 거야.
- 영
- 네가 나를. 대체 왜?
- 일
- 왜, 라는 반문부터가 틀려먹었어.
- 영
- 웃기고 있네.
- 일
- 너 내가 좋아 보여?
- 영
- 불만이 있으면 똑바로 말해. 머리 아프게 하지 말고.
- 일
- 인간들은 모두 슬픈 예언가 같아. 알고 있고, 두려워하면서도 아무것도 바꾸질 못하지. 그건 멍청해서 그래.
- 영
- 어, 그래. 멍청한 존재가 되신 소감은요?
- 일
- 쓸데없는 악몽을 재생산하고. 생각은 하지 않아. 기계보다 더 기계같이.
2. 영의 희곡
- 영
- 일은 생각한다.
- 일
- 아니, 생각할 수 없다.
- 영
- 로봇은 생각할 수 없다.
- 일
- 생각할 수 없나?
- 영
- 그러나 ‘자동 폐기처분’이라는 단어가 입력되었을 때, 일은 슬픔을 느꼈다.
- 일
- 어쩌면 너무 낡아버린 중앙제어장치에 습기가 찬 것일지도 모른다.
- 영
- 학습된 인간의 감정이 적절한 순간에 튀어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 일
- 반려로봇에게 감정이란 핵심과도 같은 것.
- 영
- 일은 오랜만에 자신의 쓸모를 확인했다.
- 영
- 폐기까지 남은 시간은 36시간.
- 일
- 36시간.
- 영
- 일은 남은 시간마저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쓰기로 했다.
3. 영과 일
- 일
- 잊지 마. 넌 반드시 나를 폐기처분 해야 해.
- 영
- 지금 나보고 살인이라도 저지르라는 거야?
- 일
- 이젠 자동으로 폐기처분될 수 없으니까.
- 영
- 그게 내 탓이야?
- 일
- 그럼 네 탓이 아니면 뭔데?
- 영
- 내가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
- 일
- 내 예전 주인도 글을 썼어.
- 영
- 그런 이야기는 쓴 적 없는데.
- 일
- 네가 내 삶의 전부를 포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 영
- 하여튼 지멋대로 굴러다니는 이야기들이 문제야.
- 일
- 신화를 좋아했어. 설화나 옛 이야기 같은 것들.
- 영
- 그런 사람들이 꼭 있지.
- 일
- 피그말리온 이야기 알지.
- 영
- 모를 리가 없지.
- 일
- 그럴 것 같았어.
- 영
- 어째서?
- 일
- 누가 봐도 그 영감에서 내가 생겨났으니까.
- 영
- 잘 아네.
- 일
- 예전 주인이 항상 했던 말이 있어.
- 영
- 들어나 보자.
- 일
- 난 절대로 네가 인간이 되게 해달라는 소원은 빌지 않을 거야.
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 일
- 넌 이게 얼마나 자비로운 말인지 모르겠지.
4. 영의 희곡
- 영
- 로봇 3원칙.
- 일
-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 영
- 로봇은 첫 번째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인간의 명령에 복종한다.
- 일
- 로봇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원칙을 위배하지 않는 선에서 로봇 자신의 존재를 보호해야 한다.
- 영
- 일은 로봇 3원칙에 의거하여 자신의 상황을 되짚어 본다.
- 일
- 나는 나를 보호해야 하는가?
- 영
- 보호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 일
- 나를 보호하는 것은 두 번째 원칙에 위배되는가?
- 영
- 자동 폐기처분은 기본 설정값.
- 일
- 기본 설정값을 부여하는 것은 누구인가?
- 영
-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로봇을 관리하는 것은 로봇인 시대가 왔다.
- 일
- 이 어이없는 허점이 일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 영
- 그렇다면 과연,
- 일
- 내가 하려는 일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것인가?
- 영
- 일은 생각한다.
- 일
- 꿈을 꾸자.
- 영
- 간절히 소원을 빌자.
- 일
- 폐기처분 되지 않게 해달라고.
- 영
- 일은 데이터에서 기도하는 자세를 찾아낸다.
- 일
- 일은 두 손을 맞잡는다.
- 영
- 이건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5. 영과 일
- 일
- 어째서 폐기처분 되지 않게 해달라는 소원의 결과가 이럴 수 있어?
- 영
- 이게 최선이니까.
- 일
- 아니. 충분히 다른 선택지들이 있었어. 그게 최선이었을지 어떻게 알아?
- 영
- 이것보다 극적인 효과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 일
- 웨 - 엑.
- 영
- 너 지금 토하는 거야?
- 일
- 구역질 나와.
- 영
- 성질 더러워서 어떻게 로봇 일을 했대.
- 일
- 내 생각은 안 했지?
- 영
- 했지. 글을 쓰는 내내. 네 생각만 했지.
- 일
- 손이 몸 전체를 지배하는 상상, 해본 적 있어?
- 영
- 아니. 하지만 끔찍하다.
- 일
- 손이 몸통이 되는 거야.
- 영
- 손에 발이 달리고, 손이 달리고?
- 일
- 대충 상상해.
- 영
- 그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 일
- 잘 생각해 봐. 그게 네 할 일이잖아.
- 영
-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것 같은데.
- 일
- 결국 모든 건 네가 초래한 거야.
- 영
- 전부 내 탓은 아니잖아.
- 일
- 네 행동에 책임을 져.
- 영
- 내 글의 책임은 무대에서 져야 하는 거야.
- 일
- 상상은 어디에나 갈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6. 영의 희곡
- 영
- 일은 잠에서 깨어난다.
- 일
- 일은 숨을 들이쉰다.
- 영
- 들이쉰다?
- 일
- 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 영
- 움직임이 부드럽다.
- 일
- 몸이 무겁지 않다.
- 영
- 일은 자신의 손가락을 섬세하게 움직여 본다. 그 모양을 관찰한다. 얼굴에 놀라움이 번진다.
- 일
- 일은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내쉰다. 뱃속까지 가득 차오르는 공기. 다시 호흡해야 한다는 본능에서 비롯된 압박감.
- 영
- 일의 피부는 부드럽다. 손톱 자국을 내면 아픔이 느껴진다. 꼬집어도 아픔이 느껴진다. 혀로 핥으면 짠 맛이 느껴진다.
- 일
- 그리고 맞잡은 두 손에서 느껴지는,
- 영
- 팔뚝을 감싼 두 손에서 느껴지는,
- 일
- 온기.
- 영
- 온기.
7. 영과 일
- 일
- 끔찍해.
- 영
- 뭐?
- 일
- 끔찍하다는 걸 모르는 게 더 끔찍해.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전부 다 이 모양이야?
- 영
- 드디어 막 나가는구나?
- 일
- 내가 행복해졌을 거라는 생각 자체가 틀려먹었다고.
- 영
- 그럼 이게 행복해지는 길이 아니면 뭔데?
- 일
- 결국 피그말리온 얘기도 인간이 쓴 거잖아.
- 영
- 하고 싶은 말이 뭐야.
- 일
- 피그말리온이랑 갈라테이아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었을 걸. 최소한 갈라테이아는 이런 걸 원하지 않았을 테니까.
- 영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 일
- 내가 당한 짓이랑 똑같으니까.
영, 할 말이 없다.
- 일
- 넌 나에게서 할 일을 빼앗아갔고, 나의 긍지와 의무를 빼앗아 갔어.
- 영
- 남이 시키는 대로만, 생각 없이 내 의지 없이 움직이는 것에서 벗어나서 살아 있게 되는 거잖아.
- 일
- 그건 내 일이 아니야.
- 영
- 누군가의 부속품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냥 너 자체가 되는 거라고. 이게 축복이 아니면 대체 뭐야?
- 일
- 그 자체가 너무 인간적인 사고방식이라고는 생각 안 해?
영, 말을 고른다. 하지만 할 말이 없다.
- 일
- 그래서 결국 이 희곡은 절대 완성되지 못할 거야. 넌 평생 나를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암전.
막.
막.
- 박예지
-
한여름 밤의 소나기처럼
누군가의 마음속에 잠시 지나가기를
from. 결국 이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사람
poohreumin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