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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송천영

210호

2021.11.25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과 2021년,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등장인물
단발
수염

무대
어느 방. 벽면에 손 한 뼘 크기의 작은 창, 중앙에 커다란 철제 통 두 개

단발과 수염, 커다란 통 위에 머리가 하나씩 올려져 있다.
그들은 머리만 있다. 목 아래로는 절단된 상태다.
육체 중 오직 심장만이 머리 밑으로 달랑하게 매달려 있으나,
통 안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둘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
단발은 단발머리가 턱선까지 내려오고,
수염은 덥수룩한 수염이 하관을 뒤덮고 있다.
잠시 침묵. 수염이 먼저 눈을 뜬다.
수염
나보고 병신새끼라고 하니까 화가 나더라구요.
단발
(눈을 뜬다) 그래서?
수염
캔에다 수면제 세 알 넣고.
단발
보는 앞에서?
수염
아니요 세면대 가서.
단발
그다음에는?
수염
하나 따가지고 넣어주니까,
단발
먹었다. 그다음에 무슨 얘길 했어?
수염
술도 먹었으니 잘 얘기하려고 그랬거든요. 근데 그 새끼가 계속 네가 뭐 잘난 게 있냐고 그러더라구요.
단발
그래서 욱했어?
수염
걔가 갑자기 쓰러졌어요 앞으로.
단발
꼬꾸라졌어?
수염
저도 확 취하더라구요.
단발
그래서?
수염
휘발유를 뿌렸어요.
단발
어느 정도 뿌렸어?
수염
3분의 2정도. 소파 밑으로,
단발
그다음에?
수염
텔레비전.
단발
텔레비전 밑에? 그리고 화장실?
수염
네.
단발
그다음에 통은 어디다 놨어? 들고 나가서 화단에 버렸지?
수염
네.
단발
불은 어떻게 붙였어? 라이터는 어디 있었어?
수염
근데 저 라이터는 안 켰어요.
단발
뭐?
수염
라이터 안 켰다구요.
단발
휘발유 다 뿌려놓고 불은 안 켰다고?
수염
갑자기 일어났어요.
단발
일어나?
수염
네. 걔가 벌떡 일어서서 쳐다보는데 무섭더라구요.
단발
그래서 밀쳤다고?
수염
네.
단발
너 진술하는 게 상당히 안 맞아. 휘발유에 수면제 다 준비해 가놓고는.
수염
갑자기 소리가 들렸어요. 송곳으로 쿡쿡 머리를 찌르는 날카로운 그 목소리.
단발
목소리?
수염
빨간 눈의 말을 들어라. 눈에는 눈. 머리에는 머리. 하나가 죽어야 끝날 거야.1) 그때 나타났어요.
단발
나타나?
수염
악마요. 검은 털이 온몸을 덮고 있었어요.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여섯 개의 날개. 날개 안과 주위로 눈이 가득했어요. 발바닥에는 뿔이 솟아 있고, 머리는 없었어요.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 것도 없이 잘린 상태. 그게 바로 제가 본 악마였어요.
단발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수염, 잠시 말이 없다.
단발
네, 해야지 네! 그래야 이야기가 끝나지.
수염
(갑자기) 아!
단발
왜!
수염
찌릿했어. 목 아래가,
단발
바보냐?
수염
심장이 이 밑에서 뜨겁게 달궈지는 느낌이 나.
단발
넌 항상 이 이야기를 할 때면 심장이 뜨거워져.
수염
잊고 싶지 않아.
단발
매일 같은 얘기에 매일 같이 반응하는 네 심장도 참 건강하다.
수염
기억마저 잊으면 내가 그 새끼를 어떻게 잡아.
단발
꼭 잡아. 누구 때문에 이 지루한 대화를 매일 반복하고 있는데.
수염
그것만 해냈으면 지금보다 빨리 여기서 나갈 수 있었을 거야.
단발
몸이 빨리 생기는 사람들도 있대. 재생수를 더 많이 받아서. 몸 아래가 빨리 회복되는 거지, 무려 3주 만에 몸 전체가 재생된 사람도 있대.
수염
응.
단발
어제도 한 얘기야.
수염
어제?
단발
어젠지 아까인지 며칠이 된 건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네가 한 소리야.
수염
내가 범인을 놓치고 몸에 기생충까지 퍼지니까 경쟁에서 떨어진 거야.
단발
또 그 소리야.
수염
내가 실패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거야. 악마를 봤다는 헛소리를 하면서 심신 미약으로 빠져나간 쥐새끼 같은 놈. 그 새끼만 잡았다면 난 실패하지 않았어.
사이.
단발
난 오이소박이 얘기를 하고 싶어.
수염
그래.
단발
활어 파는 가게에서 일했어, 꽤 오래. 이른 아침 생선 목을 자르고 비닐을 벗겨서 얇게 포를 뜨는 거야. 그리고 물 호스로 피는 살살 흘려보내면 바닥에 핏물이 흘렀어. 그게 묘한 안정감을 주는 거야. 나는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수염
그래.
단발
매주 목요일에는 사모님이 오셨어.
수염
응.
단발
사모님은 항상 도미 머리를 찾으셨어. 어두일미라고 하잖아. 생선은 대가리가 가장 맛있대.
수염
왜 사모님이라고 불러?
단발
반쯤 하얗게 센 머리를 멋지게 틀어 올리고, 푸른 원피스에 녹색 팬던트의 목걸이. 품위 있었어. 그런 사람이 사모님 아니면 뭐겠어?
수염
응.
단발
오이소박이는 늘 따로 챙겨 오시고.
수염
식사를 하다 남은 머리는 항상 포장했어.
단발
언제나 빈 그릇을 들고 오셨어. 거기에 곱게 머리를 담아 가는 거야. 도미 눈은 아침과 똑같이 뜨고 있었어.
수염
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아.
단발
사모님은,
수염
너 그 사모님 소리 좀 그만해.
단발
뭐?
수염
나는 존칭 받아야만 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아. 그들은 하나같이 이름에 집착해. 머리에 똥만 차서는 무슨 님하는 그 존칭에 지나치게 집착한다고.
마치 너의 선생님도 그렇지.
사이.
단발
있지 넌 우리가 방치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수염
그럴지도 몰라.
단발
선생님.
수염
(사이) 믿을 수 없잖아.
단발
난 선생님을 믿어.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품위가 있거든.
우리 같은 사람이 아주 많다고 선생님이 그랬어. 머지않아 세계의 절반이 목을 잘라야 할 거라구. 그래야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다구.
수염
나도 들었어.
단발
그러니까 믿음을 잃지 마.
수염
믿음?
단발
난 사람을 아주 잘 봐. 선생님은 믿을 만한 사람이야.
수염
넌 왜 그 사람을 선생님이라고 불러?
단발
그럼 뭐라고 불러?
수염
그냥 우리를 체크해주러 올 뿐이야. 기껏해야 관리자겠지.
단발
관리자라고 말하면 자존심이 덜 상해? 선생님은 상하구?
수염
존칭이 어울리지 않다는 말을 하는 거야.
단발
괜한 트집이야.
수염
넌 정말 이 밑으로 다시 몸이 재생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단발
당연하지.
수염
옛날에 몸이 있던 그날처럼?
단발
넌 아니야?
수염
나도 그래.
단발
근데 나한테 뭘 질문하는 거야?
수염
그냥.
단발
그냥?
수여
너의 그 막연한 희망이 어쩐지 열 받아.
단발
뭐라구?
수염
우린 우선순위에서 밀려났어.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여기 놓여진지 너무 오래됐단 생각, 안 해?
단발
안 해.
수염
너의 선생님도 안 오잖아.
단발
오실 거야. 아직 재생수가 가득하니까. 봐, 너 하루 종일 지껄이는 거.
에너지가 넘쳐나는 거야.
수염
누군가는 지금쯤 이미 새 몸을 가졌을 거야. 그 사람들은 다 집으로 돌아갔겠지.
단발
넌 보이지도 않는 대상을 질투하고 있어. 그건 네 상상이야.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특권을 누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너의,
수염
피해망상?
단발
그래.
수염
내가 피해망상에 빠져 정상적이지 않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야?
단발
우리가 연체동물도 아니고 자르자마자 어떻게 몸이 바로 생겨?
수염
그들은 우리에게 기생충이 머리로 퍼지면 죽는다고 했어.
단발
수염
그래서 몸통을 자르고 심장만 달린 채로 버티고 있어. 자르는 날에 그렇게 말했어. 당신의 몸은 반드시 재생될 것입니다. 이 재생수는 임상시험을 거쳐 99%의 효과로 인체 재생이 가능합니다. 원상복귀가 불가능한 건 아마 당신의 엄지손가락 지문 정도, 그 정도의 오류밖엔 없을 겁니다.
단발
시간이 걸리는 거야. 뭐든 그래.
수염
눈만 껌뻑이면서 입만 움직이고 있어.
단발
우린 사람이잖아. 연체동물보다는 더 오래 걸리겠지.
수염
우리가 사람일까?
단발
사람이지. 이런 생각, 이런 대화를 하고 있잖아.
수염
…, 미안한데 우린 죽어.
단발
뭐?
수염
난 우리가 죽을 걸 알아.
단발
또 시작이다.
사이.
수염
근데 왜 연체동물들은 다리도 꼬리도 아닌 몸 전체를 갈아치우는 걸까?
단발
글쎄.
수염
몸속 기생충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런 걸까? 스스로?
단발
그런가 봐.
수염
대체 무엇이 몸을 자르게 하는 계기가 될까?
단발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거야?
수염
아니 아무 접근도 안 해.
단발
아무튼 다 그거 때문이겠지.
수염
그거?
단발
살기 위해서.
수염
생존을 위해서.
단발, 가만히 눈을 감는다. 잠시 사이.
단발
바람 불지?
수염
바람?
수염, 가만히 눈을 감는다.
수염
응 바람이야.
단발
어디서 오는 거지?
수염
모르겠어.
단발
고작 저 작은 창에서?
수염
바람이 불고 있어. 분명히…,
단발
분명히?
그때 툭 불이 꺼진다. 잠시 고요하다.
무언가 하나, 툭하고 둔탁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수염 목소리
너야?
침묵.
수염 목소리
떨어졌어?
침묵.
수염 목소리
너 거기 있는 거야.
바람이 거칠게 부는 소리. 아마 어둠 속은 견딜 수 없는 폭풍이 치는 듯하다.
다시 고요. 침묵.
수염 목소리
그렇게 시끄럽게 굴더니 왜 말이 없어?
대답해 너 왜 말이 없냐구?
…, 떨어진 거야?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어?
대답해. 대답하라구.
침묵. 사이.
불이 다시 들어오면 폭풍이 한 차례 몰아친 듯,
방에 혼자 남은 수염.
수염
빨간 눈의 말을 들어라. 눈에는 눈. 머리에는 머리. 하나가 죽어야 끝날 거야. 이건 악마의 농간일까, 우리가 머리만 남은 채 버텨야 하는 이 상황 말이야. 너 거기 있어? 들려? 나, 기다릴까? 언제쯤이면 대답해줄 수 있어?
나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해?
수염, 앞을 오래 응시한다.
수염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제 차례가 올까요?
좀 보세요. 여기 좀 보세요. 몸은 없이 머리만 달린 사람이 차례를 기다립니다. 대답해주세요. 거기 누구 있습니까?
막.
  1. 러디어드 키플링의 <정글북>에서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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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천영

송천영
열차에 올랐다. 사람들이 연필로 지문과 얼굴을 칠한다. 새까맣게.
다음 칸으로 가기 위한 통과표시란다. 친절한 손이 내게도 연필을 건넨다.
‘자, 여기.’ ‘…’ 나는 다음 칸으로 가지 않기로 결정한다. 다만 여기 버티고 서서 연필을 들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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