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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구공삼 꿈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나수민

제211호

2021.12.09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과 2021년,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인물
이모
40대.
20대. 여자.
아들
10대.

밤.

이모의 집 거실. 둥근 테이블이 하나 있다.
나, 테이블 앞에 이모와 마주 앉아있다.
테이블 위에는 찻잔과 찻주전자가 있다.
이모, 나의 잔에 차를 따라준다.
딸이 있잖아?
이모
있지. 마셔 봐. 몸에 좋은 차야.
근데 왜…
이모
얼른 마셔 봐.
나, 찻잔을 내려다본다.
마시고 싶지 않아.
이모
몸에 좋다니까.
마시고, 싶지, 않아.
이모
몸에 좋은데도.
딸이 있잖아.
이모
있지.
이모, 차를 마신다.
나,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근데 아들도 있다니.
이모
놀란 것 같네.
놀랐지. 나는 몰랐으니까. 나는 이모한테 딸만 있는 줄 알았어. 왜냐하면… 왜냐하면… 딸이 있으니까. 딸이 있잖아.
이모
영주야.
그거 내 이름 아닌데.
이모, 나의 손을 잡는다.
이모
이 세상에 태어나 이뤄야 할 일이 딱 한 가지 있다면, 그게 바로 이거다. (사이) 아들과 딸을 갖는 것.
이모, 다시 차를 마신다.
사이.
하지만 이미 딸이 있잖아.
이모
아니지. 이미 아들이 있었지.
딸보다 먼저?
이모
딸보다 먼저.
사이
이름이 뭔데?
이모
(입모양으로만) ○○○.
뭐라고?
이모
(입모양으로) ○○○.
못 알아듣겠어.
이모
괜찮아.
몇 살인데?
이모
여섯 살 이상 스무 살 미만.
그게 뭐야?
이모, 인자하게 미소짓고 다시 차를 마신다.
왜 말하지 않았어? 아들 있다고.
이모
말했어.
말 안 했어. 언제 생겼는데? 누가 아빠야?
이모
(입모양으로) ○○ ○○○○ ○○.
못 알아듣겠어!
이모
봐. 난 이미 말했었어.
같이 살아?
이모
같이 살지.
이모 딸이랑도?
이모
(고개 젓는다)
그럼 딸은 어디 갔어?
이모
(어깨 으쓱인다)
버렸어?
이모
나갔어.
어디를?
이모
옥수수모래 사러.
고양이 키워?
이모
(인자하게 웃으며) 아니.
근데 옥수수모래가 왜 필요해?
이모
부드럽잖아.
그럼 사서 오는 중이야?
이모
아니. 나갔다니까.
안 돌아와?
이모
(어깨 으쓱인다)
사이
그럼 아들하고만 산다고.
이모
그런 셈이지.
이모 딸이 5살이니까 아들은 나이가 더 많겠네.
이모
여섯 살 이상 스무 살 미만이니까.
이모, 다시 찻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차를 채운다.
이모
영주야.
영주가 누구야?
이모
너도 마셔 봐.
나, 찻잔을 내려다본다.
이모
몸에 좋아. 따뜻하고. 향기롭고. 약간… 매콤하고.
매콤해?
이모
약간… 매콤하지. 몸에 좋아. 마셔 봐.
색깔이 이상한데.
아들, 찻잔을 들고 천천히 걸어 나와 이모 옆에 앉는다.
나, 아들을 빤히 쳐다본다.
이모, 아들의 찻잔에 차를 따라준다.
이모
알겠지?
아들
네.
이모
그럼 됐다. 바다 수영은 어땠어?
아들
넓더라고요. 탁 트여있고. 시원하고. 약간… 매콤하고. 좋았어요.
이모
그럼 됐다.
아들과 이모, 동시에 차를 마신다.
나, 그들을 보고 있다.
아들
안녕.
… 안녕.
이모
둘이 오랜만에 보지.
처음 보는데.
아들
차 좀 줄까?
많아.
이모
이쪽은 영주다.
아들
안녕, 영주.
아… (체념) 그래, 안녕.
이모
어때 보이니?
뭐가?
이모
내 아들.
아들, 나를 향해 인자하게 웃는다.
안 닮았어.
이모
나 닮은 건 딸로 족하지. 날 안 닮아서 좋아.
아들
엄마랑 저는 닮았어요.
안 닮았어.
아들
약간 매콤한 거 좋아하는 거. 그거 닮았잖아요.
이모
그래 그럼 됐지.
아들과 이모, 서로 찻잔을 부딪치고는 차를 마신다.
이모, 찻주전자를 들어 다시 차를 따르려는데 주전자가 비었다.
이모
어머, 이 약간… 매콤한 차가 벌써 떨어졌네.
아들
제가 갔다 올게요.
이모
아니야, 내가 갔다 올게.
가지 마, 이모.
이모
영주야, 이모 금방 갔다 올게.
이모!
이모, 찻주전자를 들고 잠시 사라진다.
아들, 차를 마시며 나를 본다.
나 역시 차를 마시는 아들을 본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옥수수모래 사러 갔다면서.
아들
응?
딸 말이야. 옥수수모래 사러 갔다던데. 곧 돌아올 거래.
아들
아니야. 오지 않아.
어떻게 알아?
아들
고양이가 없잖아.
사이
옥수수모래는 고양이 때문에 필요한 게 아니래. 그냥, 그냥, 부드러워서 필요한 거지.
아들
그래, 그럴 수도 있지만, 그래도 고양이가 없으니까 결국엔 오지 않을 거야.
사이
니가 내쫓았지?
아들
고양이는 원래부터 없었어.
고양이 말고 딸.
아들,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본다.
사이.
아들
왜 차를 안 마셔?
마시고 싶지 않아.
아들
왜?
색깔이 이상해. 대답이나 해.
아들
영주야. 바다 수영해본 적 있어?
나 영주 아니야.
아들
요 앞에 바다 있잖아.
거긴 초등학교야.
아들
난 거기서 바다 수영하는 게 제일 좋아.
딸 어디에 버렸어?
아들
바다에는 모래도 많고.
어디에 버렸냐고!
딸이 옥수수모래 포대를 어깨에 이고 들어온다.
사왔어. 졸라 무겁다. 이거 받아줄 사람?
아들
왔구나.
(발치에 옥수수모래를 패대기치듯 던지고) 졸라 졸라 졸라 무겁구나. 옥수수모래라는 건.
아들
그냥 모래가 아니니까.
(나를 보고) 안녕.
… 영주야.
엄마는?
아들
차가 없어서.
아, 그 약간… 매콤한 차?
영주야.
언니는 왜 차를 안 마셔?
영주야?
응.
너… 많이 컸다.
응. 나갔다 왔더니 졸라 금방 크네.
아들
남는 찻잔이 없네.
괜찮아.
버려진 줄 알았어.
누가?
네가.
아들
바다 수영은 해봤어?
아직. 금방 가봐야 돼.
어디 가
언니.
딸, 나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엄마가 나한테 그랬어. (입모양으로) ○ ○○ ○○○ ○ ○○○ ○○ ○○○○ ○○.
못 알아듣겠어.
나 그 말 듣고 정신 차렸어. 그래서 옥수수모래를 사러 나갔지. 근데 사방을 뒤져봐도 옥수수모래를 안 파는 거야. 정말 모든 곳을 돌아다녔거든. 코사마트 레몬마트 이마트 홈플러스 이케아 현대백화점 롯데백화점 더 현대도 가봤다. 근데 옥수수모래가 없어.
옥수수모래가 왜 필요한데? 고양이도 없잖아.
내가 옥수수모래를 어디서 찾았게?
모르겠어.
바다에서 찾았어.
아들
바다 좋지. 바다 수영하는 거 정말 좋아.
언니도 한 번 가 봐. 요 앞이야.
진짜로 갈 거야?
응.
안 가면 안 돼?
응.
왜?
고양이가 없잖아. 고양이를 찾으러 가야 돼.
고양이 없어도 되잖아.
아들
안 되지. 이젠 옥수수모래가 있잖아. 고양이가 있어야 해.
니가 가서 찾으면 되잖아!
아들
난 안 돼. 엄마 곁에 있어야 돼.
이모 곁엔 영주가 있으면 되잖아.
언니 난 엄마랑 같이 못 있어.
왜?
엄마가 나한테 말을 했으니까.
뭘? 대체 뭘! 나 진짜 못 알아듣겠단 말이야, 너희가 하는 말들 다 못 알아듣겠어! 진짜 모르겠어.
나, 아이처럼 엉엉 운다.
딸, 나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귀에 대고 소리친다.
난 이제 더 이상 너 때문에 시간 빼앗기기 싫어!
사이
라고 했잖아. 이제 알겠지?
사이
그럼 난 갈게. 안녕.
딸, 떠난다.
아들, 딸에게 손을 흔든다.
나, 딸이 떠난 자리를 보고 있다.
아들
영주야.
(아들을 본다)
아들
차를 좀 마셔 봐. 몸에 좋아. 따뜻하고. 향기롭고. 약간… 매콤하고.
나, 찻잔을 오래 본다.
아들
다 마신 다음에 바다 수영을 하러 가봐.
거긴 초등학교 자리인데.
아들
이젠 바다가 됐어.
몰랐어.
아들
나가보면 알아.
하나도 모르겠어. 여기는.
아들
괜찮아. 차를 마셔 봐.
왜 자꾸 마시라는 거야?
아들
기억하라고. (사이) 몸에 좋고. 따뜻하고. 향기로운 거. 이것만 기억해. 중요한 건 이게 다니까.
나, 찻잔을 다시 내려다본다.
그리고 천천히 찻잔의 손잡이에 손가락을 끼운다.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신다.
나, 차를 끝까지 다 마시고 찻잔을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아들
어때?
사이
맛있어. 약간… 매콤하고.
아들
매콤하지.
좀만 더 줘.
아들
안 돼.
왜?
아들
없으니까.
나, 빈 찻잔을 보다가
내가 여기 다시 온 게 몇 번째야?
아들
안 세어 봤는데. 네가 처음 왔을 땐 바다가 초등학교였지.
그럼 너는-
아들
(말 끊고) 이제 일어나.
왜?
아들
내가 여기 있을 거니까.
사이
나,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시는 안 올 거야.
사이
아들
그래. (사이) 나가면 바다 수영 꼭 해봐.
나, 뭔가 더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떠난다.
아들, 혼자 테이블에 앉아 찻잔을 보고 있다.
사이.
이모가 찻주전자를 들고 돌아옴과 동시에 모든 게 어두워지며 사라진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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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 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함께.
sajob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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