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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당신의 기억의 저장고입니다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윤소희

제211호

2021.12.09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과 2021년,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인물
I:
이상의 ‘나’
R:
현실의 ‘나’
무대
동굴 같은 곳. 어둡고 오래된 느낌이 난다.
I와 R은 서로 무대의 가장 먼 곳에 위치한다.
한쪽 벽에서는 기억이 영사된다.

1. 기억의 저장고

열차 소리가 들린다.
I는 바닥에 분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R은 어느 열차 칸에 앉아 있다.
R
내가 탄 열차는 아주 빨랐습니다. 창밖의 풍경이 쉴 새 없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내 몸은 이렇게,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렇게 빨리 달리고 있는데,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 있다니. 그 순간 알 수 없는 감각이 내 몸을 감쌌습니다. 나, 무언가를 잊어버리고 온 것 같아. (사이)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어, 다 잊고 그냥 책이나 읽기로 했을 때, 속이 메슥거렸습니다. 하늘도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사이) 급하게 변기에 머리를 쑤셔 박았을 때, 나는 아주 익숙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나, 어떤 기억을 잊어버렸구나.
I
(R과 동시에, 들리지 않게 중얼거린다) 이카로스, 너에게 이르거니와 반드시 적당한 높이로 날아야 한다. 너무 낮게 날면 바위의 습기 때문에 날개가 무거워지고 너무 높이 날면 태양의 열기에 날개를 이어붙인 밀랍이 녹아버릴 것이야. 늘 내 옆에 붙어서 날도록 해. 그래야 안전하니까.
R은 뒤를 돌아 구역질을 한다.

(자막) 여기는 당신의 기억의 저장고입니다.

R은 구석에 토를 하다 지쳐서 쓰러지듯 앉아 있다.

2. 이카로스

R의 기억이 영사된다.
멀미가 심해 검은색 비닐봉지에 얼굴을 박고 있는 어린 R이 보인다.
하늘이 노랗게 보이던 순간들, 억지로 잠을 청하던 순간들이 보인다.
스케치북에 달리는 열차, 우주로 날아가는 로켓,
지구에 서 있는 인간을 그리는 어린 R의 손.
텔레비전에서 천천히 지구본을 돌려보는 어린 R이 보인다.
어린 R은 자신이 있는 곳을 찾아내어, 지구본 위에 별표를 그린다.
어린 R은 지구본을 일정한 속도로 돌려본다.
별표가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어린 R은 점점 빠르게, 더 빠르게 지구본을 돌려본다.
지구가 움직이는 소리가 작게 들린다.
I
(소리 내어) 소년은 자기의 비행에 너무 자신을 가졌던 나머지 아버지의 선도에서 벗어나 하늘에 닿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높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글거리는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에 깃털을 붙였던 밀랍이 녹아내려 깃털이 삽시간에 빠지고 말았다. 이카로스는 두 팔을 허우적거렸으나 몸을 공기 위로 뜨게 할 깃털은 이미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카로스는 아버지에게 구원을 부르짖으며 푸른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했다.
I는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고 멈춘다.
I
나는 죽고 싶지 않아.
I는 바닥에 커다란 원을 그린다.
그리고 바닥에 그린 원을 천천히 살펴본다.
I
(원을 따라 돌며) 나는 내가 지구 위에 살며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지구가 질풍신뢰의 속력으로 광대무변의 공간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참 허망하였다. 나는 이렇게 부지런한 지구 위에서는 현기증도 날 것 같고 해서 한시바삐 내려 버리고 싶었다.1)
그때, R이 숨을 고르며 기억의 저장고 안으로 들어온다.
I와 R의 눈이 마주친다.

3. 경계에서

I는 R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뒤로 물러 기억의 저장고를 보여준다.
R은 바닥에 그려진 기억들에게, 그리고 I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I
(소리 내지 않고) 얼마 안 가서, 너는 사람이 지구에서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매우 실망했어. 얼마 안 가서, 너는 사람이 지구에서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매우 실망했어……
I가 R에게 손을 내밀자 R이 I의 손을 잡는다.
어린 R이 지구에서 내려 보려고 노력했던 순간들이 보인다.
풍선을 열심히 불어, 풍선 다발을 만들고, 그 풍선에 매달려 본다.
I
(소리 내어) 얼마 안 가서, 너는 사람이 지구에서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매우 실망했어.
어린 R이 놓친 풍선이 하늘로 올라가고, 어린 R은 그 풍선을 바라본다.
두 사람도 풍선을 바라본다.
I
하지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며 더 이상 그런 일에 실망하지 않게 되었어. 더 이상 멀미를 하지도 않았어. 너는 네가 멀미를 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어. 모든 것에 예민하던 너는 자라서 무엇이든 괜찮은 사람이 되었어.
하늘로 올라가던 풍선은 이내 터져 버린다.
I
그런데 나는 괜찮지 않아.
터져버린 풍선 조각이 어딘가에 떨어졌을 때, 거기에 어린 R은 없다.
I
나는 괜찮지 않아.
R
나는 괜찮지 않아.
지구가 움직이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두 사람 서로를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R은 이제 경계에 서 있다.
R
옛날에 아주 어릴 때, TV에서 <은하철도 999>를 본 적 있습니다. 사실 내용은 잘 몰라요. 그때의 나에게는 무언가 어둡고 슬픈 만화영화 같았습니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건,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넜다는 것뿐입니다. 내가 탄 열차도 저 높이, 저 멀리 나를 데려다줄 수 있다면, 그래서 내가 지구에서 내릴 수 있다면. 내가 지구에서 내릴 수 있다면. 내가 지구에서 내릴 수 있다면.
두 사람 원을 그리며 달리기 시작한다.
지구가 움직이는 소리가 너무 커서 목소리가 더 이상 잘 들리지 않는다.
두 사람 온 마음을 다해 달린다.
I
(열차의 속도를 느끼며) 여기는 경계선. 내가 탄 열차는 고지에서 다시 내려가지 않고 계속 높이, 계속 멀리 갈 거예요.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나는 저 높은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내가 잊어버린 곳. 내가 찾던 곳. 내가 가야 할 곳. 내가 있어야 할 곳. 나의 이상. 나의 꿈. 나의 세계.
I가 넘어진다.

4. 다시, 기억의 저장고

R은 넘어진 I를 쳐다본다.
I는 정신을 잃었다.
애써 상황을 외면하듯 R은 I의 분필을 찾는다.
그리고 바닥에 한 번 더 원을 그린다.
R
나는 죽고 싶지 않아.
I가 그러했듯이 R도 원을 따라 천천히 돌아본다.
R
나는 내가 지구 위에 살며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지구가 질풍신뢰의 속력으로 광대무변의 공간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참 허망하였다. 나는 이렇게 부지런한 지구 위에서는 현기증도 날 것 같고 해서 한시바삐 내려 버리고 싶었다.
R은 원 안에 가만히 서 있다가 두 발을 바깥으로 내디뎌 본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I도 그대로 쓰러져 있고, 기억들은 모두 바닥에 그려진 그림일 뿐이다.

그때, 누군가 묻는다.

(자막) 기억을 다시 잊어버리시겠습니까?
R
(사이) 네.
R이 여태까지 보았던 기억의 영상들이 뒤로 감기 된다.
R은 눈을 길게 감는다.
열차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R은 공허하다.
테이프가 빙글빙글 돌며 감아지는 영상이 보인다.
R
내가 탄 열차는 아주 빨랐습니다. 창밖의 풍경이 쉴 새 없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내 몸은 이렇게,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렇게 빨리 달리고 있는데,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 있다니. 그 순간 알 수 없는 감각이 내 몸을 감쌌습니다. 나, 무언가를 잊어버리고 온 것 같아. (사이)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어, 다 잊고 그냥 책이나 읽기로 했을 때, 속이 메슥거렸습니다. 하늘도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R은 다시 처음의 열차 칸에 앉는다.
열차는 계속 경로를 달린다.
그때, I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분필을 발견한다.
그리고 분필을 다시 쥔다.
암전.
-끝-
  1. 이상, 「날개」,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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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희

윤소희
글을 쓰고 공부하고 연극을 만들고 있다. 페이스북 @sohee.youn.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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