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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면대 옆 세이렌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조소민

제211호

2021.12.09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과 2021년,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등장인물
선혜
세희 그리고 세이렌
시간대
이 희곡이 집필된 이후로부터 아주 먼, 혹은 그렇게 멀지도 않은 미래
불이 꺼져 창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빛에만 의지하고 있는 어두운 공간. 선혜의 욕실 겸 화장실이다. 세면대와 욕조, 변기가 무뚝뚝하게 자리 잡고 있다. 먼 데서, 젖은 발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철퍽, 철퍽, 철퍽, 그 간격이 마치 시계 침의 움직임처럼 느껴진다.

세희가 등장하여 스위치를 누른다. 무대가 밝아지고, 공간 속 물건들과 선혜가 확연히 드러난다. 늙은 선혜가 온몸을 기댈 수 있는 큰 의자에 푹 앉고서 세희를 본다. 선혜가 앉은 자리와 세희가 청소하고 있는 욕실은 형식적인 문지방으로 구분된다.

세희는 소매와 바지 끝단을 접어 올리고서 꼼꼼히 구석구석을 청소한다. 세희는 세면대에 올려져 있던 작은 산호가 담긴 유리 상자를 들어 올리다가 문득 그것을 물끄러미 보게 된다.

선혜의 말은 아주 느리다. 상대가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할까 봐, 일부러 본래 자신의 속도보다 느리게 말을 하는 것이 그의 버릇이다. 그의 대사에는 자주 온점(.)이 등장하는데, 이 온점이 존재하는 곳마다 그의 어미가 느려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선혜
세이렌이. 주고 간 것이지요.
세희
네, 어르신. 이 산호 말씀이시죠.
선혜
전에. 얘기한 적 있던가요?
세희
네. 세이렌이 왔다가 간 자리에 이게 있었다고 하셨죠.
선혜
이야기했네, 그래. 또 잊고서 얘기할 뻔했네요.
세희
또 이야기를 해주시면, 또 들으면 되지요. 거참, 처음 어르신 이야길 들었을 때 정신이 없어 갖고는, 어르신이 제 이름을 계속 중얼거리시는 줄 알았잖아요. 그래서 계속 ‘네? 네?’ 이러고만 있었죠. 얼마나 민망했는지. 제 이름 알고 계시죠?
선혜
그러믄요. 세희 씨 이름이 ‘세희’인 것, 알고 있죠.
세희
그냥 아줌마라고 부르시라니깐.
선혜
뭘요.
세희
어색해라. 이름으로 불리니까 남사스럽고 말야.
선혜
오늘이. 무슨 요일이었지요?
세희
화요일이에요.
선혜
화요일. 화성의 날. 이네요.
세희
우리가 있는 바로 이 별의 날이지요.
선혜
지구에. 계속 있었다면 좋았을걸.
세희
전 어릴 때 빼곤 지구를 겪어본 적이 없네요.
선혜
지구가. 그렇게 시퍼래지기 전에는. 정말 그렇게 알록달록하기두 했어요.
세희
요, 산호처럼요?
선혜
그러믄요. 고것들도 다 지구가 품어주던 것들이었으니깐요.
세희
산호가 아주 귀했다고 들었어요.
선혜
지구가 품던 것들은 원래 다 귀했지요.
세희
귀한 것을 주고 갔네요, 세이렌은?
선혜
그렇죠.
선혜가 잠시 가만히 입을 꾹 다물고 미소를 짓는다.
선혜
거참, 늙은이가 하는 이런 얘길 흰소리다 생각치 않고 들어주어 얼마나 감사한지.
세희가 고개 돌려 선혜를 보며 싱긋 웃어 보인다. 다시 청소에 열중한다.
세희
저희 어머닌요, 아버지한테 험한 소리만 듣고 사셨더래요. 입만 열면 헛소리, 허무맹랑한 소리만 한다구요. 저는 어머니가 좋아 보였거든요. 어르신도 제 눈엔 좋아만 보이는데요, 뭘.
선혜
그러니, 나를 좋게 봐주니 얼마나 감사한데요. (사이) 그러면 이놈의 흰소리 좀 더 해도 될까요.
세희
그럼요, 들려주세요.
선혜
세이렌이 우리 집, 내 집 화장실에 왔을 때. 세면대, 변기, 샤워기가 겨우 자리 잡은 그 좁은 화장실에. 그가 우뚝 서 있었죠. 제 키보다 딱 반만큼 작고, 눈동자 색은 잿빛. 그 눈빛은 흐려 보이면서도. 아주. 똑바로. 나를 보고 있었어요.
세희는 들고 있던 산호를 선혜의 곁에 둔다. 그리고 욕실 한 편에 우뚝 선다. 이후 선혜의 서술에 따라 세이렌의 행동을 하기도 하고 대사를 읊기도 한다. 즉, 이제부터 세희는 한동안 세이렌으로 분한다.

조명 빛이 천천히 바뀐다. 산호의 색과 아주 가까운, 오렌지와 핑크 사이의 오묘한 빛이 선혜의 집을 물들이고 이로 인해 산호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보이게 된다.

처음보다 조금 더 가까워진 젖은 발소리가 잠깐 찾아온다. 철퍽, 철퍽, 철퍽. 선혜는 발소리에 집중하는 듯 가만히 있다가, 소리가 멎자 다시 대사를 잇는다. 선혜의 대사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현재의 세희를 향한 서술과, 과거 세이렌과의 대화를 왔다 갔다 한다.
선혜
세이렌이 했던 말 중에, 충격적이지 않은 말이라고는 없었지요. 세이렌이 사는 세상에는, 그러니까, 아주 깊은 바다요. 재앙 같은 시기를 살고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곳의 생명들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자 했다네요. 자기들이 태어났던, 조상들이 역사를 맞이했던 곳으로.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굶주리는 고통과 커져가는 재난을 끊어낼 수 있을 것 같았대요. 세이렌이 말하길 그곳은 바로.
세희
인간이 없는 지구!
선혜
세이렌이 속한 종족은 흰자와 검은자의 경계가 흐릿하고. 귀가 없고. 입은 크고, 손과 발은 개구리와 오리의 발을 섞은 것처럼 생겼어요. 사람이 보기에는, 동물보다는 사람에 가깝고. 또 사람 같다고 하기엔 요상한 생김새였어요.
세희
당연하지! 깊고 어두운 곳에서는 보고 듣는 능력은 쓸모가 없어. (주변을 경계하듯 몸을 낮추어 헤엄치는 시늉을 한다) 물살을 가르고, 진동을 느낄 수 있는 몸이 좋은 몸이지.
선혜
그날은, 며칠째 건조한 먼지가 사람의 세상을 뒤덮던. 기분도 몸도 바짝 말라가던 날이었지요. 평소보다 더 눈이 따갑고, 목구멍이 근질근질하던 날. 집으로 돌아와 손을 씻으려고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세면대 옆에 세이렌이 서 있었어요.
세희가 몸을 곧게 펴고 선혜를 똑바로 쳐다본다.
선혜가 그와 눈을 맞춘다.
선혜
꿈인가? 어디서 어떻게 온 걸까?
세희
물길을 타고, 배관을 타고.
선혜
50년! 50년을 넘게 그는 자신이 사는 곳에서. 제가 살던 집의 화장실까지 당도한 거예요. 세이렌은 그들의 작전이 유효한지 실험하기 위해 파견된. 군인이랬어요. 여기서 ‘작전’이란, 인류를 바다 끝으로 유혹하는 것.
세희
(관객을 향해 검지를 들어 보이며) 그리고, 바다에 적응하여 진화하기 전에 멸종시키는 것.
선혜
세상에. 믿겨지나요? 대체. 어째서?
세희
우리는 몸에서 이끼가 돋는 개체와, 비늘이 돋는 개체가 있어.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이 벗겨지고, 새로운 이끼나 비늘이 돋아나는데, 떨어져 나간 피부 조각이 떠다니다 뭉쳐지면 새로운 개체가 만들어져. 그런데 이상해. 만들어진 아이들이, 얼마 안 가 모조리 숨을 거두는가 하면, 점점 몸에서 자라야 할 것들이 자라지 않고, 비늘과 이끼가 뭉쳐지지도, 제대로 엉겨 붙지도 못한 채 아래로 툭, 툭. 떨어지기만 하잖아. 애들이고 어른이고 아픈 곳이 많아져.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발견하게 된 거야. 바위에 앉아있던 어린아이가, 하품을 하려고 큰 입을 벌리는데.
선혜
입속으로 들어가는, 수상하고 작은 덩어리 하나.
세희
그게 인간이 바다에 빠뜨린 물건에서 나온 덩어리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냈어.
선혜
정확히는 빠뜨린 게 아니라. 내다 버린 것이겠지요.
세희
어떤 것은 딱딱하고 어떤 것은 흐물흐물해. 입이나 아가미 안으로 쉽게 들어갈 만큼 작지만, 쌓이면 몸을 꼼짝 못 하게 할 정도로 견고하고, 녹지도 증발하지도 않아.
선혜
세이렌의 이야기를 듣고. 바로 전날 고이 묶어 내다 놓은 재활용 쓰레기봉투가 생각났어요. 그것들이로구나. 한 거죠.
세희
인간이 바다와 육지를 장악한 후, 놀라운 속도로 우리는 병들어갔어. 이전의 평화를 되찾으려면, 이전의 상태를 되찾아야지.
선혜
그렇구나. 그래. ‘인간이 없는 지구’.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서 있던 세희가, 편하게 다리를 뻗고, 벽에 기대어 앉는다.
선혜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선혜
그가 머물었던 며칠간 저는. 세이렌에게. 많은 질문을 쏟아냈어요. ‘너희는 무슨 재미로 살아?’
세희
각자마다 다른 재미로 살지.
선혜
사람 말은 어떻게 할 수 있게 된 거야?
세희
언어 체계를 익혔지.
선혜
너희들 전부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거야?
세희
50년 넘게 요 근방을 헤엄쳤다면? 할 줄 알겠지.
선혜
다른 사람들도 마주친 적 있어?
세희
나는 몇 명 본 적 있어. 그들도 나를 봤을지는 모르겠네.
선혜
나 말고는 아무도. 세이렌을 봤을 리 없다고 확신했어요. 한 명이라도 그를 발견했다면, 그는 무사했을까요? 그럴 리 없었어요.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겠죠. 그가 무사히. 나의 화장실까지 도착했을 리 없죠.
세희
선혜. 물을 틀어도 될까?
선혜가 허락의 손짓을 보인다.
세희는 수도꼭지를 돌린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세희는 물을 만끽하며 눈을 감는다. 다음 대화의 시작과 함께 물 소리는 배경음악처럼 작아진다.
선혜
바닷물이 아닌데도. 괜찮아?
세희
메마른 공기보다는. 위로 올라올수록 눈이 따갑고, 목이 근질근질하더라.
선혜
나도 그래. 요즘 특히.
세희
왜 그렇다고 생각해?
선혜가 눈에 띄게 주춤한다.
선혜
인간이. 지구를 망쳐서. (세희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고개를 떨구며) ‘우리’ 탓이지.
세희
선혜 네가 죄책감을 가지는 거야?
선혜
아무래도. 그렇게 되는 것 같아.
세희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 그냥, 계속 이 일을 함께 이야기했으면 해서.
선혜
나랑?
세희
너랑.
선혜
있지. 궁금한 게 있어.
세희
이 일과 관련된 거야?
선혜
그럴지도 몰라.
세희
물어봐.
선혜
너는 왜 동족의 지시대로 하지 않아?
사이
선혜
원래대로라면, 난 너한테 잡혀서, 없어졌어야 했는데. 아냐?
세희가 거의 드러눕다시피 자세를 늘어뜨린다.
세희
다수의 의견에 섞이지 못하는 사람. 너희들 말 중에 그런 뜻의 단어가 어떤 게 있지?
선혜가 가만 고민을 해보다가 입을 연다.
선혜
반항아. 부적응자. 음. 이단아.
세희
응. 이단아라서 그래.
세희가 선혜를 향해 빙그레 웃는다.
선혜는 그 웃음에, 조금 머쓱하여 주제를 전환하려 한다.
선혜
어떤 걸 먹고 살아?
세희
우리가 있는 곳보다, 조금 더 위쪽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그으. (인간의 언어로 그것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떠올려 본다. 떠오른다.) 산호. 산호를 먹어.
선혜
산호.
세희
주황빛의.
선혜
코랄.
세희
그렇지. 코랄.
사이
세희
점점, 내려오는 산호가 줄고 있어. 아이들 먹일 것조차 부족해. 잘 먹여야 잘 사는데. 아이들이 잘 만들어지지도 않지만. 겨우 태어난 아이들도 배를 곯아서 오래 살지 못했어.
선혜
아이들이. 많이 죽었어?
세희가 천천히 선혜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세희
얼마나 죽었는지, 숫자가 궁금해? 아니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사이
선혜가 세희의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떨군다.
세희
숫자로는 말할 수 있어. 죽을 때마다 기록을 해놨으니까. 하지만 그럴 때마다 쌓이는 절망은. 표현할 수 없어. 그 어떤 언어로도, 말해줄 수 없어.
세희가 샤워기 물을 끈다. 배경음악 같던 물소리도 멎는다.
세희
무슨 재미로 사냐고 물었지.
선혜는 여전히 세희를 보지 못한다. 소침한 채 고개만 끄덕거린다.
세희
어느 순간, 우리에겐 어떤 재미로 살 수 있을지 생각하는 건 사치가 되었어. 태어났으니까, 살아남는 거야. 그렇게 된 거야.
선혜가 지레 기가 죽은 것과는 무관하게, 세희, 그러니까 세이렌의 모습은 상대에게 화가 나거나 불만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되려 여유가 있다. 다만, 아무 표정 없는 모습이 공허하다.

짧은 사이, 가상의 시간이 흐른다. 좀 전보다 더욱 가까워진 발소리가 울린다. 젖은 발의 걸음이 바로 옆까지 온 것처럼, 철퍽, 철퍽, 철퍽, 철퍽.
동시에 세이렌이 일어난다. 가벼운 체조를 한 후, 선혜에게 다가간다. 그 움직임이 발소리의 리듬에 묘하게 걸맞다.
세이렌이 서 있던 자리에 조명이 꺼져 까맣게 어두워진다.
선혜와 세이렌이 눈을 맞춘다.
세이렌
비폭력 지향자들이 승리했대.
선혜
이단아들이.
세이렌
우리가 애쓰지 않아도 너희는 어차피, 사라질 거야.
선혜
이곳. 지구에서.
세이렌
너희가 헤쳐 놓은 것들로 인해 잠식당할 거라고, 모두가 동의했어. 난 널 죽이지 않아도 돼.
선혜
그게 의미 있을까. 세이렌. 지금처럼 살아남는 게.
세이렌
선혜. 말했잖아. 태어났으니까, 살아남는 것뿐이야.
세이렌이 선혜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의 허벅지 위로 엎드린다.
선혜는 먼 곳을 바라본다.
얼마 안 가, 세이렌이 일어난다. 선혜의 손에 코랄이 담긴 유리 상자를 쥐여 준다.
세이렌
지구가, 다시 알록달록해질 거야.
세이렌이 돌아선다. 방금 조명이 꺼졌던 공간으로, 어둠으로 다시 들어간다.
먼 곳을 보던 선혜의 시선이 그 어둠을 향하는 것 같은 모양이 된다.
선혜
그러고. 제가 이렇게 늙기도 전에. 지구를 떠나야 했죠. 아직도 전. 세이렌에게 했던 질문을. 또 하곤 해요. ‘의미가 있을까.’ 대답해줄 이도 없는데. 의미가 있을까, 하고요. 지구를 파랗게 멍들게 했죠. 그리고 이곳. 화요일의 별. 화성으로 왔고요. 지구는 인간이 없는 곳이. 되었지만, 이렇게, 똑같은 인간들이, 다시. 다른 곳으로 온 거지요. 의미가. 있을까.
어두워졌던 공간이 밝아지고, 초반의 조명으로 돌아온다.
세희가 청소를 마무리하고 있다.
선혜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는다.
세희가 등을 펴며 일어나 에구구, 앓는 소리를 낸다. 눈 감은 선혜를 발견하고서 그를 흔들어 깨운다.
세희
아이고, 어르신. 끝났어요, 어르신.
선혜가 잠에서 깨어나, 으응, 하고 대답인 듯 신음인 듯 애매한 소리를 낸다.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세희가 말린다.
세희
마저 주무세요. 그만 나가볼게요.
선혜
에구, 미안해요. 세희 씨. 제가 또 잠들었나 봐요.
세희
참, 재밌을라치면 도로롱 잠드시니 제가 항상 애가 닳아요, 어르신.
선혜
미안해요. 미안해.
세희
어르신두. 저야 매주 오니까. 또 들으면 되죠. 또 해주실 거죠?
선혜
그러믄요. 그러믄요.
세희
가볼게요. 화장실 한 번 확인해보셔요. 제가 눈부시게 빤질빤질 닦아놨어요.
세희가 예의 바르게 꾸벅 인사를 하고, 선혜가 손을 가볍게 흔든다. 세희는 그대로 퇴장한다.
선혜는 세희의 말대로, 화장실을 천천히 둘러본다. 그리고 신중히 일어나 세면대 가장자리 위에 산호가 든 유리 상자를 올린다. 고작 몇 걸음 걷고도 힘에 부쳐 숨을 조금 가쁘게 내쉰다.
선혜
여기서는. 몇 년이나 살 수 있으려나.
젖은 발의 걸음 소리가 찾아온다. 먼 데서 오는 것 같다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가 다시 조금 멀어졌다가를 무작위로 반복한다.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조명은 또다시 산호의 색으로 바뀐다. 선혜는 구부정하게 서서, 산호를 그저 바라본다. 그대로 암전되지 않은 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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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민

조소민
종이 위에 극을 올립니다. 생태주의-비거니즘-퀴어 문학을 지향합니다. 기획자, 연극 드라마터그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대 속에 선 개인에 대해 자주 고민합니다. 무성애 문학집 『무루레터』를 출간했습니다. ssomdd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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