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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하채린

제212호

2021.12.23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과 2021년,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어두운 무대. 조명이 마치 그림자처럼 배우를 따라다닌다. 무대에는 오직 생생하게 말하고 움직이며 싸우는 배우가 존재한다. 등장하는 배우의 수는 자유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이 이끌어 나갈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이 등장해 서로에게 배턴을 넘기듯 때론 말과 말이 포개지며 진행될 수도 있다. 글을 쓰면서 느낀 활자의 속도를 줄바꿈을 통해 드러내 보았으나, 실제 발화하는 이에 따라 그 호흡은 달라질 것이다.

0

저어기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간다
자신의 온몸을 하얗게 부풀린 채
그의 발자국은 달의 속도를 남긴다
남몰래 미래를 앞당겨 보고 있는 기분이다

그의 흰 에서 나는 붉은 을 본다
내가 본 건 미래가 아니라 과거였나

1

음성일까요?
양성일까요?

그 자리에서 나는
항생제를 통째로 몸에 쑤셔 넣었어
너는 질문조차 할 수 없었지

양성입니까?
음성입니까?
내 말이 안 들려요?
내 말을 듣고 있나요?
뭔가를 듣고 있기는 한 겁니까?
여보세요!
도대체 어디를 보고 있어요?

어디에도 없는 너의 물음을 만들어 놓고는 너 라고 착각하는 나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시편에서 이 구절을 발견했을 때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어
그런데 눈을 감아도 열린 무덤은 닫히지 않아 절대로

도대체 어디를 보고 있냐구요!
구멍.
너의 목구멍 한가운데를 뻥 뚫어버린 구멍!

그 울음은 전부 어디로 갔을까
쇳덩이들 사이에서 너의 목구멍이 활짝 열리고 뭉개지기 직전까지 흘러나오던
그 날카롭게 비릿한 울음은
너의 내장은 한순간에 가루가 되었고
그러니 너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 되었고
땅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연기는 안개가 되어가고
벌써 저만치 흘러가버린 붉은 강물도 보이는데
너의 울음은 어디로 흐르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내 살이 된 너는
이제 내 안에서 울고 있는 거니
지금 이 눈물도 너의 것이니
7년이면 몸의 세포가 전부 바뀌어 버린다는데
나의 몸이 새 것으로 교체되는 동안
아직 너는 내 안에서 울고 있는 거니
이제 더 이상 너는 내가 되지도 않잖아
7년이 몇 번이나 지났는데
내 안엔 점점 더 많은 네가 흐르고 있어
죽은 너는 왜 죽지 않고 점점 더 날뛰어
내 피부를 뚫고 나오는 건
너일까 잔뜩 먹은 항생제일까

너의 비명이
작은 핸드폰 구멍에서 흘러나왔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뭔가가 달라졌을까
지금쯤 내 귀는 다른 걸 듣고 있을까
너의 비명이 아닌 다른 그 어떤
내 귀도 감미로움을 느낄 수 있었는데 말이야
단지 그 차이인 걸까
재수없게
내가 들었기 때문에
내가 보았기 때문에
아니잖아
내가 죽였기 때문이라고 말해
(도대체 왜)

나에게도 그냥 작은 구멍으로만 오지 그랬니
더 빨리 더 빨리
너의 살을 우리의 살로 만들기 위해
너는 빨리 살아야 했고
너는 빨리 죽어야 했고
네가 모여있는 곳으로 누군가는 들어가야만 했고
그게 나였을 뿐이라는 걸
난 영원히 모르고 싶어

빨리 잊는 법을 배웠어
손에서 핸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는 순간 정신을 놓고 말 테니까

(포클레인이라서 다행이었어요. 이 포클레인이 저 핏덩이들로부터 나를 보호한 거예요.)
네?
죄송해요. 뭐라고 물어보셨죠?
살아있는 동물을 / 피가 / 어떤 느낌 / 기억?
…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첫 발을 떼기도 전에 포기하고 돌아간 사람들을 따라갔어야 했나
그 사람들은 그때 그렇게 나가서 어디로 갔을까
이런… 좀 다른 삶을 살았을까
그때 나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
멍청한 생각

더 빨리 죽여야 한다는 명령과 광기만 남은 곳
뽀얀 옷이 시뻘건 옷이 되도록 움직이던 사람들의 비린내
서로를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듯 더럽게 쳐다보던 경멸의 눈빛
서로만이 이해할 수 있다는 듯 잠시 하나가 되던 눈빛
너의 팽창하는 눈빛들 사이로 떠돌던 그 쇠약한 눈빛들이
아무 때나 불쑥 나타나 내 앞을 가릴 뿐이야

거기서 내 두 손은 다른 생명체 같았어
나를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생명체
나 대신 고요히 광기에 사로잡힌 희생자
내 손이 조종하는 포클레인으로 드디어 처음 널 짓눌렀을 때
나는 내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인간인 게 처음으로 무서워졌어
옆에 있는 인간들도 무서워졌어
내가 하는 말
더 들을 수 있겠니

나중에는 내가 지금
영화를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유리창 너머로 너의 머리가 보일 때마다
언젠가 어디선가 본 장면
그러다 문득
화면을 꺼버리면 그만인데 이거 왜 안 끝나는 거야 이제 진짜 그만 꺼버리고 싶은데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큰일 날 뻔했어
빨리 잊는 법을 재빠르게 다시 배웠지

그곳은
오직 포클레인 움직이는 소리와 너 너 너
빨리 더 빨리
너의 비명
사라지는 소리
그게 전부

이 모든 순간을 지나온 몸이 아직 여기 이렇게 있어
믿을 수 있겠니
세포가 몇 차례 소멸되고 생성되는 동안
얼마나 달라졌을까 나는

7년이 몇 번이나 지나는 동안 나는
저 작은 화면들에서 끊임없이 너
구멍들에서 흐르는 너
너의 흔적을
아직 살아 있는 수많은 너를
피해 다녔어
계속해서 날아드는 네 날개가
하루종일 마지막으로 꺾이던 그날로부터
멀리
더 멀리
도망 다녔어

살점과 손톱 사이에 들러붙어 절대 안 빠지는
냄새를 달고
7년이 한 번 더 지나면 이것들이 전부 어디론가
사라질까
새것이 될까
다시 살아볼 수 있을까

살아있는 것들의 눈빛은 아름답다는데
아름다움과 섬뜩함이 같은 말이라는 걸 너에게서 배웠어

어딜 가나 보이는 이 살아있는 눈들이
어느 순간 너의 눈으로 돌변해
붉음 범벅이 된 네 얼굴이 날개를 펴고 갑자기 달려들어
이렇게나 생생하다고
말이 되나
말이 안 된다
그러니 생생할수록 이건 전부 꿈일 거라고
이 많은 눈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내가 아직 살아있는 건
이건 꿈일 거라고

2

검푸른 강을 만들며 소리 없이 멀어지는 시간이 있다
그 시간 속에 놓이기 전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오직
한 생을 전부 살아내는 것뿐이라고
어느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게 나를 완전히 다른 세계로 옮겨 놓고는
혼자 사라지는
퍼-엉

모든 것이 단지 악몽일 뿐이라고 속삭이는
깨지 않는 꿈은 이 생에서 너무나 멀다

3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나
라고 말해줘

꿈에서 깨어난다면 나는
아주 깨끗하고
하얀 새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는
그 작은 입에 물을 먹여 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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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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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글을 읽어줄 고마운 당신에게 무엇보다 큰 사랑을 드리고 싶습니다. chaerin1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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