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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병동

자기만족충만

일요

218호

2022.05.12

2022 [희곡]코너는 ‘다른 손(hands/guests)’, ‘다시 쓰기’, ‘자기만족충만’ 세 가지 주제로 진행됩니다.

‘자기만족충만’은 작가 스스로가 추구하는 사유 방식, 세계관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입니다. 만족스럽다고 느끼는 지점들을 충만하다고 느낄 때까지 끈질기게 탐구합니다. 오랫동안 고민해온 주제와 형식을 작품을 통해 관철시키는 작가중심적 작품들을 만납니다.
등장인물
영신
30대 후반 ~ 40대 초반 여성
령민
20대로 보이는 중국 출신 동포 여성
간호사

무대
시립병원 행복관 71병동 보호자 휴게실
전자레인지와 싱크대, 정수기, 분리수거 휴지통, 원형 식탁과 의자 두세 개와 벽에 붙은 벤치

한쪽에는 영신 어머니의 병실로 보이는 커튼 쳐진 공간.

1. 밤

영신, 보호자휴게실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다.
령민이 들어오자 영신 움찔해서 작게 인사도 아닌, 애매한 소리를 낸다.
영신
아.
령민
아, 네.
(중국동포 억양으로. 전자레인지 작동법을 몰라 머뭇거린다) 이거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심까?
영신
아, 예? 어… 어디 있지? 아, 이건가 보다. 이거요.
여기 누르면 돌아가요.
령민
아, 그러네요.
웅… 전자음 내며 작동하는 전자레인지. 잠시 후 띵! 소리 나며 작동 중지.
령민
(햇반 꺼낸다) 고맙습다.
영신
네. (후루룩 컵라면 먹는다. 먹으면서 등 돌리고 가린다)
령민
(영신의 위축된 모습에 살짝 코웃음하며) 편하게 드십쇼. 누가 안 뺏어 먹습니다.
영신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여기 취식금지라고 되어 있어서. (취식금지라고 붙은 표지판을 가리킨다) 여기서 먹으면 안 되나 해서요.
령민
아, 저 코로나 때문에 병원에서 붙인 겁니다. 전에는 없었슴다.
편하게 드시라요. 여기 아니면 먹을 데도 없습니다. 병실에서 먹는 것도 그렇잖슴까?
그짝도 환자가 금식이지요? 아닌가? 콧줄로 드시나?
영민
네. 네. 콧줄로 이렇게, 이렇게 넣어서 드리라고 하더라고요.
령민
예. 그렇게 코로 넘기는 분 옆에서 밥 냄새 풍기기도 미안합니다. 여기밖에 없습니다, 보호자들 밥 먹을 데가. 저, 이거 김치라도 좀 드셔 보실랍니까? 집에서 싸 온 건데 기래도 먹을 만합니다.
영신
(허겁지겁) 아, 아뇨. 다 먹었습니다.
(컵라면 찌꺼기 싱크대에 버리고 분리수거 하며) 예, 예, 맛있게 드세요.
령민
예, 예. 수고하세요.
암전

2. 오전

병상에 처진 커튼 뒤로 영신이 의식 없는 엄마에게 대화하며 무대로 나온다.
영신
엄마, 다 드셨어? 잘 하셨어요. 그러면 이걸 빼서 씻어 와야 하니까… 다녀올게요.
영신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
(통화) 아, 예. 팀장님. 예. 예. 아, 예. 잘 지내시죠?
잘 진행하고 있습니다. 예.
일정을 당기자고요? 아, 그건 좀…
처음부터 무리한 일정인데 제가 최대한 맞춰서 마감한다고 했는데요.
그런데 거기에서 3일을 더 당기시면… 이거… 음… 아니… 시사회 잡기 전에 말씀을 주셨어야 하지 않나요? 그러면 진짜 저한테 시간이 너무 없는데요. 팀장님… 아… 제가, 아뇨… 아… 그럼 일단 한 만큼이라도 보내고... 연락 드릴게요.

(통화 끊고) 아니, 미친 거 아니야?
무슨 번역을 자판기로 아나. 넣으면 바로 나오냐고. 그럴 거면 구글에다 넣고 돌리지 왜 나를 시켜. 아이, 씨. 진짜 지랄들을 한다, 지랄을 해!
이때 또 다시 울리는 핸드폰
(통화) 어, 오빠. 에… 어… 엄마… 그냥 그래. 크게 나아지진 않았는데 그래요. 더 나빠지지도 않았어. 아직 날 알아보거나 그러시지는 않는데. 눈 떴을 때 눈 맞추고 그러긴 해요. 입도 달싹거리고 뭐라고 하시려고 하는 것 같은데 말은 안 나와.
그래도 식사하고 배변은 정상이야. 가래도 없고.
응. 응. 대충 때웠어. 아, 잘 먹을게.
이따 주치의샘이 회진 돌 거야. 그럼 뭐라고 하나 들어보고 알려줄게.
어. 그래. 나중에 또 통화해.
끊고 발길 돌리려고 하는데 또 울리는 핸드폰
(통화) 아, 예 언니. 방금 오빠랑 통화했어요.
아뇨. 괜찮아요. 제가 있어야죠. 언니랑 오빠 출근하는데 어떻게 해.
프리랜서가 이런 게 좋은 거지, 뭐.
병원비 내가 크게 보태지도 못하는데 나는 노동으로 대신할게요.
간병이라도 내가 할 수 있게 해 줘요.

아뇨. 뭘 부쳐 줘요.
아, 참 네.
면회도 안 되는데 뭐 하러 와요. 나중에 퇴원하면 봬요.
지금은 내가 잘 모실게. 이따 영상통화 연결하든지 사진 찍어 보내든지 할게요.
네. 네. 들어가요.

(전화 끊고) 아유, 이거 씻으러 가다 말았지. 엄마 소변 누는 거는 시간이랑 양까지 재는데, 엄마 생리현상 체크하다가 난 화장실도 못 갔네. 방광염 생기겠다.
간호사
(목소리만) (병실 안쪽에서 영신을 부른다) 최점순 환자 보호자님! 최점순 환자 보호자님!
영신
아, 예. 가요.
암전

3. 저녁

병실 끄트머리. 영신이 보호자 침대에 걸터앉아 귀에 이어폰을 연결하고 노트북으로 영상을 들으며 번역 작업을 한다.
영신
(허리를 펴며) 아, 허리 아퍼.
등허리 좀 펴고 와야겠다. 잠깐 쉬었다 올게, 엄마.
영신이 휴게실 쪽으로 온다. 반대쪽 병실에서 휴게실로 오는 령민과 마주친다. 령민, 빈 물병 들고 오는 걸로 보아 정수기로 물병 채우러 온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 말없이 목인사.
령민
(정수기에 물을 채우며 영신에게 말을 건다) 그쪽은 가족분이 입원하셨습니까?
영신
(휴게실 벤치에 걸터앉는다) 네. 선생님도?
령민
아뇨, 저는 간병인협회에서 나왔습니다. 간병인으로 파견 나온 거죠.
영신
아…
령민
(영신 옆 한 자리 비우고 벤치에 앉는다) 예. 요즘은 앱으로도 매칭하고 그럽니다. 여기도 스마트폰 보고 집이랑 가깝길래 선택해서 왔습니다.
영신
전문 간병인이시군요.
령민
네. 벌써 한 5년 되어가니까요.
영신
아… 여기 시립병원은 자주 오셨겠네요.
령민
네, 그런 편이죠. 지금 몇 시나 됐나요?
영신
(손목시계 보며) 아, 지금 새벽 두 시 십오 분이네요.
령민
예. 에구, 애매하게 잠을 깼습니다.
영신
네. 저도 아까 엄마 소변 체크하느라고 일어났는데 잠이 안 와서 그냥…
령민
아무래도 불편해서 잠이 잘 안 오시죠? 처음…이십니까? 어머님이 입원하셨습니까?
영신
예. 예. 인지장애… 치매가 있어서 지금까지 요양원 계셨는데 3일 전에 연락이 왔어요. 어머니가 상태가 좋지 않다고. 그래서 응급차 타고 왔는데…
령민
요즘 코로나다 뭐다 해서 응급실도 쉽지 않죠?
영신
네네. 음압병실 없다고 24시간을 그냥 기다렸어요. 엄마 PCR 결과 나오고, 저도 보호자로 들어오려고 PCR 검사 받고… 이렇게 저렇게 해서 간신히 입원실 들어왔죠.
간병인도 이거 음성 확인증 있어야 들어오죠?
령민
예. 마침 저도 받아놓은 게 있어서, 폰으로 일 떴을 때 바로 들어왔습니다. 그전에는 일주일 또 대학병원 있다가 쉬고 있었는데…
영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죠.
령민
예. 아주 쉬운 게 하나도 없슴다. 그저, 그쪽 어머니는 병명이…?
영신
뇌경색이래요.
령민
아, 뇌경색. 에구구.
영신
예. MRI 결과 그렇대요.
령민
의식 있으시구? 말씀은 합니까?
영신
아니요. 워낙 치매도 중증이었는데 뇌경색까지 오셔서 알아보지도 못해요.
령민
맘이 안 좋으시갔어요.
영신
예예. 뭐… 그런데 사실 못 알아보신 지는 몇 년 되어서…
(분위기 바꾸어서) 병원 와 보고 놀랐어요. 코로나라서 의료관계자들이 수고 많으시다는 건 알았는데, 여기 간호사님들이랑 병원 직원들 대단하시더라고요. 코로나 때문에 일이 몇 배로 늘었을 텐데… 마스크 끼고 그 와중에도 체크할 거 하고, 환자들 보살피고… 진짜 병원 와서 보니까 존경스럽더라고요. 저 같으면 하루도 못 버틸 것 같아요. 어떻게 이 힘든 일을 매일 하나…
령민
매일 안 합니다. 이 사람들도 교대합니다. 잠도 자고, 다 그렇게 합디다.
영신
예. 그렇기는 해도… 선생님도 대단하셔요. 선생님도 젊은 분 같은데 이렇게 힘든 일을… 보통 간병인은 연세 좀 있는 분들이 하시던데 이 일을 하게 되셨어요?
령민
저는 이 일이 맞습니다. 다른 사람이랑 많이 부딪히지도 않고 환자분한테만 집중하면 되니까 괜찮습니다.
영신
아, 예. 아무래도 한 사람만 대하면 감정노동은 덜 하겠지만… 그래도 환자가 까다로운 분 만날 수도 있고… 육체적으로도 힘들지 않나요?
령민
예. 몸을 많이 쓰니까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돈도 정확하게 나오고, 새는 데도 없고…
하루에 12만원 받습니다. 근데 내가 다 갖는 거 아입니다. 고객은 12만 원 주는데, 업체에서 수수료로 4만 원 가져갑니다. 그래서 내 일당 8만 원입니다.
영신
수수료를 12만 원에서 4만 원이나 가져가요? 너무한데요. 아유…
령민
그래도 회사에서 거짓 없습니다. 정확하게 주니까 그거믄 되었습니다. 거기에 공기밥이나 햇반 제공받거나 하루에 일당 5천 원 더 받습니다. 한국 사람이면 1만 원 더 받고요.
반찬은 집에서 김치 같은 거 가져와서 먹고 하면 괜찮습니다.
영신
꼼짝 못 하고 외출도 못 하시고… 힘드시겠어요.
령민
안에만 있으니 돈 쓰러도 못 나가고 오히려 좋습니다. 돈 모으는 데 이만한 일도 없습니다.
영신
네. 저도 벌이가 괜찮으면 어머니한테 간병인 붙여드리고 싶은데 간병인 쓸 능력이 안 돼요. 병원비도 걱정이고… 엄마 앞으로 보험이라도 들어놓았는지 그것도 모르겠어요. 오빠네가 형편이 괜찮을 땐 그래도 요양원 비용이랑 다 부담했는데, 그집도 쉽지가 않아서요. 그나마 집에서 일하고 출퇴근 안 하는 제가 와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령민
무슨 일 하시는데요? 이런 거 물어보면 실례입니까?
영신
아, 괜찮아요. 번역해요.
령민
번역이요? 외국어 우리말로 옮기고 하는 거?
영신
예. 예.
령민
어느 나라 말이오?
영신
프랑스어…
령민
아, 프랑스어… 와! 멋있어요. 멋있는 일 하시네요.
영신
아, 뭐.
령민
아까 보니까 책도 보시고… 공부 많이 한 분 같아 보였어요.
영신
예… 그냥…
령민
저도 중국에서 고등학교도 나오고 전문학교도 배우다 말았지만, 아무튼, 여서 이러고 있습니다.
영신
예…
령민
나도 돈 모아서 한국에서 대학원 다니고, 공부 계속할 겁니다. 계속 돈 버는 거 그렇게 하려고 꿈을 이루려고 하는 겁니다.
영신
아, 예.
령민
언니라고 불러도 됩니까?
영신
아, 그냥… 나이도 모르는데 서로…
령민
그럼 뭐라고 부릅니까?
영신
예… 뭐…
령민
언니 너무 부럽고 존경스러워서 그럽니다. 나도 중국에서 제대로 배우고 대학에서 공부하고 그랬으면 교수도 하고 책도 쓰고 그런 멋있는 일 하지 않갔습니까?
영신
저 그냥 번역이나 하고 있는데요, 뭐.
프랑스어 번역 있어 보이지만, 번역일 많이 들어오지도 않고 번역료도 안 비싸요. 지금 영화 한 편 번역하고 있는데 이 일도 시간으로 따지면 편의점 알바보다 시급 안 될 거예요. 시간은 많이 드는데 돈은 얼마 안 되는… 그냥 그럴싸해 보이는 것뿐이죠.
령민
그렇지 않습니다. 외국의 말과 문화를 우리말로 옮겨서 전한다는 게 얼마나 근사합니까. 책에 이름도 박히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도 멋지고 말입니다.
영신
아, 예. 출판일도 하죠. 그것도 돈은 별로 안 되지만요. (자판기 쪽으로 일어나며) 커피 한 잔 드실래요?
령민
괜찮슴다. 그거 마시면 가슴이 벌렁거려서… 제때 못 자고 그러면 리듬이 깨져서 힘듭니다.
병원 스케쥴이라는 게 있잖습니까. 한밤중에도 체크한다고 깨우고 주사 주고. 새벽에도 찾아오고… 그때그때 번쩍 눈 뜨려면 잘 자야 합니다. 잠잘 수 있을 때 바짝 자야 합니다.
영신
예. 그럼 저는 한 잔 하겠습니다. 회사에 번역 마저 보낼 게 있어서…
그런데 선생님도 진짜 대단하세요. 저야 엄마니까 한다고 해도…
갇혀서 나가지도 못하시는데.
령민
갇혀 있기는 그쪽도 마찬가지 아입까.
영신
네.
령민
쉬운 일 하나도 없슴다. 돈 벌라는 데 쉬운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영신
네.
령민
제가 여기 와서 주방일, 가사도우미, 식당… 다 해 봤는데
저는 이기 제일 맞습니다. 아프고 힘든 분들한테 도움 드리는 것도 좋고.
영신
그래도… 그 힘들지 않으세요? 저는… 아직도 엄마 기저귀 가는 게 적응이 안 돼요. 그 냄새가, 손에 냄새가 배어요. 장갑을 끼고 해도… 손톱 밑에 그 냄새가…
령민
좋은 냄새는 아니죠, 뭐. 그런데 냄새는 거기, 거기가 심합니다.
음식물쓰레기장. 거기 가 보셨습니까?
영신
음식물쓰레기요?
령민
거기서 버릴 거랑 묻을 거 분류하는 데 사람이 해요. 이물질 같은 거도 걸러내야 하고.
내가 거기서 일주일 하고 나왔습니다. 머리가 딱딱 아파가지고. 집에 가서도 냄새가 계속 코 끝에 매달려 있더라 말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해서도 한 달을 못 채운 적이 없는데 거기 만큼은 도저히 안 되겠다 했습니다. 냄새가 사람 죽이겠구나, 한 거는 그 쓰레기 공장에서 딱 느꼈습니다. 그래도 여기는 냄새가 나도 사람 냄새 아입니까. 사람이 냄새도 나고 지저분하고 그렇죠. 돼지도 그렇고 소도 그렇고. 깨끗이 해주고 치워 주고 그러면 갸들도 냄새 안 나겠지만 어디 그럽니까. 사람도 별 수 없슴다. 사람도 똥 싸고, 오줌도 싸고… 그게 살아있는 기니까.
일이니까, 마음 잡기가 더 좋습니다. 감정을 안 섞어도 되니까.
말 못 하는 아기 돌보듯이 그렇게 하면 됨다.
영신
맞아요. 저도 어떨 때 엄마가 인형 같아요. 옷 갈아입히고, 닦이고, 눕히면 그대로 누워 있고. 콧줄로 음식 넣어 주고, 물 먹이고… 오줌 싸면 닦아 주고 똥 싸면 갈아줘야 하는 거 그것만 다르네요. 큭큭큭.
령민
거저 인형이죠. 숨 쉬고, 먹고, 싸고, 자고 그런 인형…
아, 참. 나 들어가 봐야겠어요. 할머니가 잠을 깊게 못 자셔요. 뒤척이는데 내가 옆에 없으면 찾아요. 가 볼게요.
영신
(혼자말. 속옷 빨면서)
휴. 나이가 들면 인생이 쉬워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려운 문제가 닥쳐요. 계속. 해결하면 더 어려운 문제가 나와요.
공부 많이 해서 좋아 보여요?
공부 많이 하면 뭘 해요. 대학원에서 박사, 꼴랑 세 명 있었는데, 셋 중에 성적도 제일 좋았는데… 나는 만년 조교만 하고… 진석이가, 교수가 된 건 진석이라고요. 교수님들한테 인사도 잘하고 아버지가 다른 학교 교수하는 진석이가 되더라고요.

번역료, 그거 장당 3000원. 10년째 그 가격이에요.
일 년에 책 한 권 번역할까, 두 권 할까. 번역료 권당 매절로 300 받아요. 연봉 1000만 원 되나 안 되나. 이렇게 삽니다, 제가. 왜 저를 부러워하십니까, 중국에서 온 아가씨. 저는 당신이 부럽습니다. 그 억척같은 생활력, 긍정적인 마인드,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나는 당신이 부러워요.

뭐, 어차피 당신이나 나나 힘 없고 돈 없기는 마찬가지겠지만요.

아이, 씨… 피 묻은 건 잘 지지도 않아. 이 와중에 생리는 참 꼬박꼬박도 해. 애 가질 일도 없는데 드문드문 건너뛰면 좀 좋냐고.
서서히 암전.

서서히 밝아진다.
(영신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졸고 있다)
령민
저기요.
영신
아, 잠시 졸았나 봐요.
령민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마요.
언니는 생각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생각을 꺼요.
영신
생각을… 꺼요?
령민
네. 할 수 있어요.
언니는 똑똑한 사람이잖아요.
똑똑하면 좋지요. 남들한테 무시도 안 당하고. 공부도 많이 하고.
그래도, 가끔은 생각을 꺼야 돼요.
몸이 먼저 움직이게 하면 돼요. 몸이 일하고 내가 따라가요. 그러다 보면 나중에 생각이 찾아와요. 천천히. 그 속도도 나쁘지 않아요. 한번 꼭 해보시면 좋을검다.
영신
(끄덕끄덕)
령민
어마니 기저귀 갈 때 그렇게 하시라요. 생각하지 말고. 옷을 벗기고, 엉덩이를 들고, 닦고, 또 닦고, 버리고, 갈아입히고… 순서에 맞게 하시라요. 그냥. 아무 생각 말고. 힘주고, 버티고, 들고… 힘주고, 들고, 옮기고, 당기고… 그렇게 하믄 그냥 됩디다. 냄새 난다, 싫다, 그런 생각이 들 겨를이 없슴다. 숭하다는 생각도 없고.
영신
(끄덕끄덕)
령민
저는 남자 환자 볼 때도 있습니다. 저도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합니다. 생각 안 하고. 그러면 환자들도 가만 있슴다. 처음에는 치욕스럽다고, 울고, 버팅기고… 그랍니다.
그런데 그라카면 내가 더 힘듭니다. 나도 순순하게, 환자들도 순순하게 힘 안 주고 그래야 내가 합니다. 서로 도와야 할 수 있습니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생각을 너무 말구.
그짝도 그렇게 몸부터 쓰시라요.
똑똑한 분이라 금방 배울 검다.
영신
(끄덕끄덕)
령민
먼저 갑니다. 잘 주무시라요.
영신
네. 주무세요.

4. 다음 날 새벽

간호사
(낮은 목소리로) 환자분 소변은 괜찮지요?
첫날 피가 고이던 거는 이제 안 보여요, 그쵸?

한 자세로 계속 있으면 욕창이 생길 수 있으니까요.
두 시간마다 자세를 바꿔 주세요.
이렇게 쿠션도 끼워 주시고.
영신
네.
간호사 선생님, 창문 잠깐 열어도 되죠? 환기 좀…
간호사
네. (퇴장)
영신
엄마, 아직 달이 있어.
동이 틀 것 같은데.
우리 엄마가 아기처럼 잠만 자.
아니야, 고양이야? 이제 깨어서 눈도 뜨고 내 이름도 불러 줘.

엄마가 아기가 되고
내가 엄마를 돌보네.
처음에 엄마가 치매인 거 알았을 때 진짜 힘들고 서러웠는데,
무섭고, 정말 대책 없었는데…
나를 못 알아보는데 당황하면서 웃는 그 표정, 내가 견딜 수가 없었어.

그런데 이제는,
지금은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사람이 이렇게 꺼져가는구나.
이렇게 죽어가는구나, 천천히.
거기서 더 치졸하고 인간말종 같은 생각.
돈 생각. 병원비 생각.
나를 어디다 갖다 팔 수도 없는데,
병원비를 감당할 수 있나.
나도 나이 들면 이렇게 될 텐데
나는 어떻게 하나.
나는 엄마처럼 아들, 딸도 없는데…
자식도, 친구도 없는 나는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이 무섭고 복잡해.

그런데 이것도 내가 먹물이라 그런 거야.
엄마는 내가 공부 많이 하고 책 쓰고 이런 일 한다고 좋아했잖아. 그래서 나도 이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인 줄만 알았어. 내가 잘난 줄 착각했고.
지금 보니까 공부만 많이 했지 내가 제일 못 살아. 돈도 제일 못 벌고.
그냥 나는 공부하고 책 보는 걸 좋아한 거였어. 집도 없이, 결혼도 안 했지, 돈도 없지.
아니, 뭐 후회하거나 뭘 탓하는 건 아니야. 그냥 그렇다고.
허탈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고.

무서워.
엄마 없으면 나 고아 돼.
무서워.

몸뚱아리…
엄마는 누워 있고, 안 움직이고.
나는 허리를 세우고 있고, 움직이고…
아, 너무 생각 안 하려고.
그냥 오늘을 살고, 엄마랑 살고, 지금을 살 거야.
사는 게 중요하니까.
그렇지?

먹자. 피딩 주머니 가져올게.
먹자, 우리 엄마 맘마 먹자.
기다리세요.
물 떠오고.
의자 일으키고.
콧줄에 연결하고…
주사기에 물 5cc…
서서히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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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

일요
일요일에 태어났습니다.
말과 말이 칼과 창처럼 예리하게 부딪치고,
때로는 뱀처럼 이어지는 희곡을 쓰고 싶습니다.
@ilyo_paperwo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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