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한 사람의 몸으로 되살린 1988년 소호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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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은 정전처럼 불현듯 들이닥칠지 모른다. 지금 여기 한 줄기 조명 아래 두려움을 한껏 껴안은 그가 서 있다.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한없이 연약한 존재인 채로. 마이클의 과거와 현재, 사랑과 상실, 불안과 웃음이 무대 위에서 한 편의 모노드라마로 펼쳐진다.
한 통의 전화에서
시작된 기억
<크루즈>의 출발점은 한 통의 전화다. 원작자 잭 홀든(Jack Holden)은 런던의 스위치보드(Switchboard, 1974년에 설립된 영국의 LGBT+ 전화상담 및 지원 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중 한 남성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가 들려준 젊은 시절의 기억은 작품의 모티프가 됐고, 홀든은 이를 바탕으로 1980년대 런던 소호를 살아간 마이클의 이야기를 무대에 옮겼다.
마이클에게 1988년 2월 29일은 평범한 하루가 아니다. 1984년 HIV(사람면역결핍바이러스) 양성 판정을 받은 그는 의사로부터 앞으로 길어야 약 4년을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갈 무렵, 마지막 밤이 될지도 모를 외출을 준비한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삶은 그날로 끝나지 않는다. <크루즈>는 죽음을 눈앞에 둔 채 살아가는 마이클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작품은 마이클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그의 주변 인물들을 차례로 불러낸다. 연인과 친구, 가족을 비롯해 그가 만났던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마이클이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는지 드러난다. 특히 작품의 시작과 끝에는 스위치보드가 놓여 있다. 전화가 울리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장면이 반복되면서 마이클의 이야기는 그가 만났던 사람들의 삶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야기의 배경인 1980년대 런던 소호는 HIV에 대한 공포가 컸던 시기다. 그럼에도 클럽과 음악, 만남과 사랑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렇기에 <크루즈>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거운 이야기만 이어가진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음악을 듣고 춤을 추며 웃었던 순간도 함께 담아낸다.
한 배우가
그려내는 스물아홉 명
<크루즈>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한 배우가 스물아홉 명의 인물을 연기한다는 점이다. 다만 이 작품의 형식을 단순히 '1인다역극'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캐릭터가 바뀔 때마다 관객은 배우의 목소리와 말투, 몸짓과 시선을 통해 지금 어떤 인물이 등장했는지를 알아차려야 한다. 여기에 과거와 현재의 시제 전환, 공간 변화까지 함께 따라가야 한다. 한 사람이 여러 인물을 연기하는 만큼 각각의 인물이 얼마나 분명하게 구분되는지가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결국 그 변화가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 인물에서 다른 인물로 넘어가는 순간의 속도와 호흡, 몸의 변화가 장면의 흐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댄서이자 퍼포머로 활동해 온 킹키(김기현)와 연극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해 온 한민우가 더블 캐스팅됐다. 킹키는 아이브, 에스파, 청하, 화사 등의 안무에 참여하고 Mnet <스트릿 맨 파이터>, <보이즈 2 플래닛> 등에 출연한 댄서로, 이번 작품이 연극 데뷔작이다. 몸으로 장면을 쌓아 온 만큼 클럽 장면의 에너지와 인물이 바뀌는 순간을 어떻게 표현할지 주목할 만하다. 반면 한민우는 <맨 끝줄 소년>, <보이즈 인 더 밴드>, <포쉬> 등 연극 무대에서 경력을 쌓아 왔다. 안정적인 대사와 호흡으로 인물의 감정선을 쌓아가며 어떤 변화를 보여줄지 기대해 봐도 좋겠다.
한 장면마다
살아 움직이는 소호
<크루즈>에서 음악은 장면을 채우는 배경 이상의 역할을 한다. 전자음악부터 디스코와 하우스까지 당시 클럽 문화를 떠올리게 하는 음악이 곳곳에 등장하며 1980년대 소호를 재생시킨다. 존 패트릭 엘리엇이 작곡한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에 팻시 클라인의 'Crazy', 글로리아 게이너의 'I Will Survive', 엘비스 프레슬리의 'Always on My Mind', 페기 리의 'Is That All There Is?'와 같은 명곡이 더해져 인물의 감정을 대신한다. 음악과 조명의 변화는 장면의 속도를 바꾸고, 인물이 전환되는 순간에도 함께한다.
공간 역시 한정된 무대 위에서 계속 달라진다. 잭이 마이클로 변하는 순간 스위치보드는마이클의 집이 되고, 이어 올드 콤튼 거리의 술집과 클럽으로 공간이 바뀐다. 녹음실 '케이브', 가라오케 바, 클럽 '헤븐', 극장, 장례가 치러지는 성당까지 오가는 이 여정을 이끄는 것은 배우의 움직임과 음악, 조명, 소품이다. 마이클이 가발을 쓴 드래그 퀸 재키쉿으로 변신해 노래하다 가발을 벗어던지며 돌아오고, '탑건' 장면에서는 조명과 그림자를 활용해 매버릭과 마이클을 오간다. 한 배우가 여러 인물을 맡는 형식과 맞물려 관객은 장면의 변화를 따라가며 공간을 상상하게 된다.
제작사 노크씨어터(NOQ Theater)의 이남기 연출은 한 명의 배우가 어떻게 인물을 생성하고 공간감을 바꿀 수 있는지에 주목했다. 동시에 1980년대 영국의 HIV 위기를 오늘의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도 고민의 지점이었다. 코로나19를 지나온 현재의 관객에게 1980년대의 시대 감각을 어떻게 지금의 것으로 연결할 것인지가 이번 공연의 또 다른 핵심 과제다.
무대는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대본과 음악을 바탕으로 한국 제작진이 무대와 조명, 움직임 등 공연의 주요 요소를 새롭게 구성하는 논-레플리카(Non-replica) 방식으로 제작됐다. 한국 배우와 제작진의 해석을 더해 새로운 무대를 만드는 셈이다. 공연이 열리는 대학로 씨어터 쿰은 111석 규모의 소극장이다. 배우의 움직임과 호흡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만큼, 한 배우가 변해 가는 과정도 더 선명하게 만날 수 있다.
<크루즈>는 죽음을 예상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춤을 추고, 친구들과 밤을 보내며,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소소한 일로 웃음 짓는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일상의 장면들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이어진다. 결국 이 작품은 상실과 두려움 속에서도 곁에 있는 사람들과 웃고 사랑하며 함께하는 일이 삶을 이어가는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직, 삶은 끝나지 않았으므로.
- 사진 제공
- 노크씨어터
<크루즈>
- 일자 26. 10. 29 - 11. 8
- 장소 대학로 씨어터 쿰
- 연출 이남기 출연 킹키, 한민우 안무감독 박민지 무대디자인 조경훈 조명디자인 오채은 음향디자인 김승현 의상디자인 정준희 분장디자인 임혜린 프로듀서 정태건 번역·접근성 해인 드라마터그·제작 박형대 기획 어지영 홍보 강예진 제작 노크씨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