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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함으로, 자유로운, 힘이 되는 희곡 쓰기

2022년 희곡 결산 수다회

허선혜

제229호

2023.01.26

일시:
2022년 12월 11일 오후 7시-10시

장소: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센터 2층 아고라룸

진행:
허선혜, 김연재(이상 극작가, 희곡운영단)


참여:
구지수, 김영화, 문서희, 박영영, 박예지, 이민규(이상 2022 희곡공개모집 참여 극작가)
희곡 결산 수다회의 전경 사진. 여덟 개의 일인용 책상이 동그랗게 둘러 배치되어 있다. 작가들이 각자 노트북이나 태블릿 등을 각자 책상에 올리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 벽에는 대형 프로젝터에 웹진 연극in의 희곡 페이지 하나가 영사되고 있다.

문서희 <A’(에이 아포스트로피)>

문서희
사람들이랑 다 같이 읽으니까 살아있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어요. <냉장고 속 여자들>이라는 글을 매개로 글을 써보고 싶었는데 계속 못 쓰고 있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작업을 시작했고요. 긴 분량으로 써서 다른 공모에 냈었는데 아쉽게 떨어졌어요. 그 후 이 공모에 맞춰서 분량을 줄여보는 작업을 했고요. 지금은 또다시 늘리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구지수
저는 이 작품을 ‘다시쓰기’라는 주제를 통해서 만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서사를 위해 소비되어 왔던 여성 캐릭터들이라는 인물 설정이 매력적이어서요. 각기 다른 시대에 만들어진 캐릭터들이 본인들의 절망을 분명하게 짚어내고 마지막에는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점이 굉장히 좋았어요. 상반된 의견을 갖고 있던 캐릭터들이 결국 ‘우리’가 되어 서로 손을 잡고 단단한 연대를 보여주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제일 좋았던 건 그들이 스스로를 ‘여자A’, ‘여자B’라고 명명했다는 점이에요. 타인이 붙여준 이름으로 정해진 삶을 살아왔을 그들이 서로에게 자신을 직접 소개하면서, 비로소 스스로를 긍정하고 주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허선혜
저는 작가님이 일부러 ‘여자A’와 ‘여자B’의 구분을 크게 두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사 속에서 ‘우리’라고 말하기도 하고요. 좋았던 대사는 ‘당신은 그 11분을 위해 태어난 게 아니에요’라는 대사였어요.
김연재
저는 처음에는 여자A와 B가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배우가 아니라 극 중 캐릭터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어두운 상자 같은 곳(냉장고)에 갇힌 인물들은 탈출을 시도하는데요. 이때 문을 통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날아서 탈출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질서를 뛰어넘는 것처럼 보였어요. 여성의 탈출, 해방은 왔던 길을 다시 밟아 나가는 것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완전히 뛰어넘어야 한다,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뜨개질, 실뜨기 같은 수공예, 가사노동이 여성 운동의 한 형태가 되기도 했잖아요. 그래서인지 다른 여성 캐릭터들의 흔적으로 보이는 주인 없는 옷들을 묶어서 탈출하는 행위는 강력한 연대, 저항의 의미로 읽혔고요. 최근에 <2022 코미디 캠프: 파워게임>에서 배선희 배우님이 <비행기술: 토미에 해방의식>을 공연하셨는데요, 이 공연에서 남성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남성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이야기의 필요에 의해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토 준지 만화의) 토미에라는 캐릭터가 나오거든요. 여성 배우인 배선희는 죽음을 통과해서 여성 캐릭터를 해방해 줍니다. <A’(에이 아포스트로피)>가 공연된다면 여성 배우가 과거에 자신이 연기했던 캐릭터를 해방시킨다는 맥락도 생길 것 같아요.
김영화
저는 이해는 하면서 읽었는데 냉장고라는 생각은 못 했어요. 지문 중에 ‘냉장고 팬’이 나오는 부분을 보고 알아차렸는데 그것이 나오는 마지막 부분이 제일 좋았어요. 계속 춥다고 했던 것도 그래서 그랬구나 싶고 해서요.
박영영
길게 쓴 걸 다시 줄였고 그걸 다시 늘리신다고 하는데, 그럼 여자들이 다시 플롯 속으로 들어가서 자기 캐릭터를 구한 다음에 주인공이나 작가에게 복수하는 이런 서사가 있는 것인지 궁금했어요.
문서희
길게 늘리는 작업에서는 결말부에 이 여자들이 냉장고를 탈출하는 게 아니라, 냉장고 뒤로 가서 아무도 이 공간에 들어오지 않게 망가뜨린다는 결말을 생각하고 디벨롭 하고 있어요. 만약 복수한다면 작가에게 복수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작가가 그렇게 쓰지 않았다면 태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이민규
저는 보면서 조석 작가가 쓴 웹툰 <죄송한데 주인공이세요?>가 생각났어요. 후기에서 작가가 이렇게 얘기해요. ‘이 만화가 끝나면 이 캐릭터들을 더 이상 못 보는데 너희는 그 안에서 잘 지내겠지’. 그 생각이 나면서 ‘내가 썼던 등장인물들이 지금은 뭐 하고 있을까? 등장인물로서 죽은 걸로, 죽지 않은 걸로 확정을 짓지 않은 인물이 있었는데 죽었을까, 살았을까’ 그런 생각이 같이 들었어요. 희곡 <인형의 집>을 재창작한 작업의 경우, 노라가 다른 선택을 하는 작품들이 많잖아요. 그 생각도 들었는데 ‘이야기에 결말이라는 게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박예지
저는 원작을 몰라도 작품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읽으면서 티키타카가 되고 몰입되는 순간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저는 대사 중에 ‘작품은 날 망쳐도 돼요?’라는 대사가 와닿더라고요. 여성 캐릭터 같은 경우,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로 쓰이고 매력적인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허망하게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들도 그 세계 안에서는 살아있는 사람일 텐데 내가 어쩌면 그를 망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싹하기도 했습니다. 읽으면서 A와 B가 어떻게 보면 한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품이 끝나면 그 세계 속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여자’들이 탈출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궁금해서 장막이 정말 궁금해집니다.
작가 문서희. 단발 머리를 가볍게 묶고, 빨간 후드티에 검은 가죽자켓을 걸쳤다. 양손을 가볍게 깍지 끼고 측면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음짓고 있다. 책상 위에 놓인 이름표에 ‘양찬경’이라고 쓰여 있다.
문서희

구지수 <달아나다>

구지수
<달아나다>는 산란계 농장에 대한 책을 읽은 후, 한 부품 공장에서의 제 경험을 떠올리며 쓴 글입니다. 분명 그 둘은 다른 장면인데도 머릿속에서 겹쳐지는 부분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 이미지들을 게으르게 내버려 두면, 제 안에 생겨나는 의문들을 완전히 소화해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작품으로 쓰기 시작했죠. 처음에는 배경을 육계 농장으로 할까도 고민했어요. 하지만 닭의 알을 먹는 것도 착취이자 폭력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 산란계 농장에 대해 쓰게 됐죠.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연대할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요.
문서희
저는 이 작품이 ‘인간은 왜 무언가를 통해서만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왜 인간은 식물처럼 최소한의 영양분으로 자생할 수 없을까?’라는 질문으로도 이어질 수 있을 것 같고요. 인간은 ‘약육강식’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데 그 피라미드 구조에서 인간이 맨 아래로 갈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인간들은 이것들을 외면하고 싶어 하는 것 같고요. 그런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김연재
인간과 닭들의 출입 방식이 흥미로웠어요. 주인공이 창문으로 들어온다거나, 닭들이 계사를 탈출해 멀리 뛰어간다던가. 제대로 몸을 누일 곳, 휴식하는 공간으로서의 집이 없는 존재들이 집에 어떻게 드나들고 있는가, 공간을 점유하고 거니는 방식이 흥미로웠습니다.
구지수
전 인물을 그릴 때 동물권에 대한 의식이 있는 사람이든 아직 그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든, 그 누구도 나쁘거나 과잉된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요. 동물에게 인간은 폭력과 착취의 주체이지만 동시에 가장 연대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니까요. 우리가 대화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평생 이 업에 종사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인물을 납작하게 매도하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많은 이들을 설득해나가고 싶어요.
박예지
작가님의 고민이 희곡에서 잘 드러났고 그런 고민들이 어려운 일인데 많은 생각이 들었겠다고 생각했어요. 작가는 중립적으로 인물을 다뤄야 하지만 그게 어렵잖아요. 작가가 사회적 이슈를 다룰 때는 본인의 태도가 확고한 상태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반대 진영의 인물을 그릴 때 고통스럽기도 하고 내가 내 손으로 내 입장과 반대되는 말을 써야 한다는 게 힘들 것 같은데, 오히려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아서 작가님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같은 작가로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작가 노트가 인상적인데 ‘나는 죽었잖아, 네가 써야 해’ 이 말과 함께 올라온 프로필 사진이 많은 생각을 하게 했어요.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됐던 것 같아요.
허선혜
‘미우’와 ‘셀라’는 나이 차이가 굉장히 많이 나지만 모녀 관계가 아니라 자매 관계예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구지수
저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미우’와 ‘셀라’를 나이 차이와 상관없이 자매로 설정했어요. ‘미우’는 ‘매실이 열리는 계절에 내리는 비’라는 뜻이고 ‘셀라’는 히브리어로 ‘쉼’이라는 뜻이에요. ‘셀라’가 푹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지은 이름입니다.
이민규
저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힘이 없는데 본능적으로 뛰는 닭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구지수
현실에서는 계사나 케이지의 문을 열어도 모든 닭이 우르르 뛰쳐나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요. 닭들의 다리가 부어있거나 부러져있는 상태이기 때문이죠. 마음만은 뛰쳐나가고 싶을 거라는 생각에 그 장면을 쓸 때 쾌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동시에 그럴 수 없는 현실이 떠올라서 고통스러웠고요.
작가 구지수. 진한 초록색의 티를 입고, 투명한 뿔테 안경을 착용했다.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긴 생머리를 늘어뜨렸다. 책상 위에 놓인 이름표에는 ‘광복’이라고 쓰여 있다.
구지수

박예지 <한여름 밤의 히치하이커>

박예지
이 작품에서 커다란 사건이 벌어지지 않고 캐릭터들의 감정 변화가 드러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요즘 선의를 선뜻 베풀기도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어렵다고 생각하는데요. ‘나중에 나에게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다른 사람도 그런 생각을 하겠지’라는 생각을 하게 돼서 씁쓸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나에게도 ‘미정’ 같은 어른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 작품을 썼습니다.
허선혜
저는 계절감이 느껴져서 좋았어요. 여름에 이 작품을 읽는 것이 감성적으로 좋을 것 같다는 생각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인물들의 만남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어서 좋았고요. 잠깐, 아주 약간의 위로를 건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로 갈 길을 간다는 게 참 쿨하고 느낌 있다고 생각했어요. 산뜻함이 좋았어요.
구지수
두 인물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그런 게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져서 좋았어요. 유쾌한 느낌을 가진 70대 여성이 평범하고 전형적인 지루함을 느끼는 20대 여성에게 주는 위로가 따뜻해서요. 이 위로의 순간이 한여름 밤의 배경과도 잘 녹아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영영
인물 쓰실 때 모티브가 있었나요?
박예지
‘미정’은 실제로 만난 사람이라기보다는 저의 판타지였어요. 조금 더 정확하게는 제가 되고 싶은 사람이에요.
김연재
‘유월’은 비를 싫어한다고 하는데 장마는 유월부터 시작되잖아요. 유월은 삶에 지치고 자신에 대한 미움이 강해 보여요. 그런데 ‘미정’은 유월이 싫어하는 비를 아름다운 바다로 만들어주지요. 내가 싫어하는 나의 한구석을 다른 사람이 좋아해 줄 때 우정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허선혜
‘미정’은 알고 보니 실존 인물이 아니에요. 지친 유월이 상상해낸 인물입니다. 이런 해석 어때요?
박예지
(하하) ‘미정’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도 괜찮고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져도 괜찮아요. 크게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읽어보신 분들이 다양한 생각을 전해주셨는데 ‘미정’은 미래의 나이가 든 ‘유월’일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해주신 분도 있고요. 저는 열린 해석이 좋아요.
문서희
아까 작가님께서도 얘기하셨지만 많은 서사에서 이런 식으로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일상으로 들어오고, 다시 나갈 때 그 일상을 파괴하고 나가잖아요. 여기서는 그 존재가 일상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해주고 나가니까 ‘자극적인 사건 없이 누군가를 따듯하게 변화시키고 나갈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고요. 그것을 ‘히치하이커’로 표현했다는 점이 좋았어요.
허선혜
미정이 ‘귤’을 주는 이유가 있나요? 한여름에 귤을 먹는다는 게 재미있는데요.
박예지
과일 중에 온기를 제일 잘 나누는 것 하면, 저는 그것이 떠올랐어요. 어디 가면 많이 받는 것 중에 하나가 귤이었거든요. 인사를 하면서 나누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과일을 선택했어요.
작가 박예지. 밝은 갈색의 머리의 끝부분에 약간의 웨이브가 있다. 옅은 하늘색의 니트와 분홍색 마스크를 쓰고 웃고 있다. 책상 위의 이름표에는 ‘설탕’이라고 쓰여있다.
박예지

박영영 <꿈에선 안경을 못 써>

박영영
제가 잠자는 것과 꿈꾸는 걸 어렸을 때부터 무서워해서 꿈에서 깨면 ‘살아서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했었어요. 저는 원래 살아있는 감각을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꿈을 꾸는 게 현실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현실을 긍정해보기 위해서 써봤던 것 같아요.
문서희
너무 불편하게 자서 몸이 이 사람을 깨우려고 꾸게 하는 게 악몽이라고 하잖아요. 여기서는 꿈이 너무 행복해서 계속 꿈속으로 가려는 캐릭터가 나오는데요. 나만의 세계가 더 좋고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캐릭터를 보니 살기 위해서는 어쨌든 이 현실로 와야 하는데 이 인물이 올 수 있을까? 걱정하게 되더라고요. ‘나는 엄마 없이는 못 사는데 엄마랑도 못 산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엄마’ 캐릭터를 보면서 우리는 가장 가까운 존재들로부터도 ‘부정’을 받는다는 걸 느꼈던 것 같아요. 쓰시면서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구지수
텍스트만 봐도 상상이 됐어요. 무대 위에서 어떻게 보여질까 궁금했어요.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느껴지는 꿈과 그렇지 않은 현실이 교차되어 이어지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꿈속에서 잡았던 손이 현실과 맞닿아있다는 것이 인물의 고통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고 생각해요. 읽을 때 끝나는 게 아쉬워서 다시 읽고, 다시 읽었어요.
허선혜
대사가 일상적으로 나오다 만화적인 말들이 툭 튀어나오곤 하는데 그런 것이 흥미로웠어요. 저도 꿈에서 사는 것 좋아하고 꿨던 꿈 또 꾸고 싶어서 다시 눕고 그런 적이 많아요. 저는 살면서 제가 상상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때가 많거든요. 그래서 더 공감이 더 갔어요.
김연재
저는 <꿈에선 안경을 못 써>의 검열 없는 자유로움에 매혹되었고, 박영영 작가님을 꼭 만나고 싶었어요. 극 중에서 ‘나’와 ‘누군가’는 섹스하던 중 집회의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하는데요. 작가가 이 말들을 “혁명놀이”라고 칭하고 있어서 깔깔 웃었어요. 지금의 한국을 사는 여성들은 거리에 나가 사죄하고 각성하고 제정하라고 외쳤지만 어떤 응답을 들은 경험이 없거든요. 그런 점에서 여성들에게 사죄하라, 각성하라, 같은 말이 사회 변혁을 이끌어내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권태로운 놀이, 혼잣말, 말버릇이 되어버렸다는 자조가 느껴졌어요.
오래 잠을 자고 글을 쓰고 자살에 실패하며 궁지에 내몰린 현실을 사는 이 여성은 꿈으로 도피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꿈에서는 안경을 못 쓰므로 실제로부터 멀어지지만 잔상, 착시, 착각이 선명해지고, 감각은 생생해져요. ‘나’는 꿈속에서 털이 많은 정체 모를 남성과 섹스하고 “혁명놀이”를 하고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하늘을 날고 자살합니다. 이 꿈속의 일들, 섹스와 혁명과 폭력과 비상과 자살은 ‘나’가 욕망하는 일이면서도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현실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폭력성은 억압되고 여성이 혁명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투쟁을 해야만 하며, ‘나’의 자살을 막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엄마(최전선에서 ‘나’를 억압한 주역이자 성차별의 최대 피해자. 거역하거나 저버릴 수 없는 또 다른 여성)이기 때문이니까요. 마지막에 엄마와 함께 스카이다이빙을 하러 가는 것, 그런데 그 스카이다이빙 사진이 대량 복사한 흑백 광고지라는 사실도 너무 좋았어요. 저는 이 작품이 2020년대 신자유주의 한국을 살아가는 20대 여자의 블랙코미디라고 읽혔어요. 여성이 출입 가능한 천국이 있다면 저는 박영영 작가님의 꿈속이 그곳일 것 같아요.
박영영
좋은 해석이에요. 의미가 좋은 것 같아요. 원래는 제가 친구 그림을 보고 난 뒤에 꿈을 꾼 것을 쓴 것인데요. 친구 그림은 색깔도 형태도 선명했거든요. 그런데 꿈에서는 안경을 손으로 눌러쓰는 행위를 해도 선명하게 상이 안 잡히는 거예요. 원래 남들도 꿈을 꾸면 선명하게 안 보이나? 생각하면서 쓰게 됐어요.
박예지
저는 읽으면서 꿈속의 누군가가 ‘엄마’는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를 계속해서 행복하게 해주려는 사람이 ‘엄마’인 것 같아서요. 하늘을 나는 꿈에서 저에게는 그 연결성이 느껴졌던 것 같아요. 꿈에서든 현실에서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려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봤던 것 같아요. 저도 꿈을 좋아하는데 되게 생생하게 꾸기도 하고요. 누구에게 쫓기다가 계속 뛰니까 몸이 뜨거워져서 깨보면 가만히 이불 덮고 누워있고. 저는 꿈을 이어서 꾸는 경우도 많고 해서 꿈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어요.
이민규
만약 원하는 꿈만 꿀 수 있다면 수면제를 먹는 게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근데 생각해보면 꿈을 꿀 수도 있고 안 꿀 수도 있잖아요. 마냥 수면제가 좋은 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꿈에서 보고 싶은 게 뭐고 하고 싶은 게 뭘까 생각이 들었는데 아이러니하게 꿈은 안 꿀수록 좋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안경을 써서 아는데 안경을 안 쓰면 봐야 할 것을 못 보는데, 오히려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못 보거든요. 꿈은 보고 싶은 걸 못 보고,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못 본다는 거니까 의지와는 상관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사에서 손잡은 느낌이 났다는 게 현실에서 엄마랑 손을 잡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하는데 그럼 이 인물이 자는 동안 현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고요.
김연재
꿈이 실제에서 멀어지는 거잖아요. 실제에서 멀어질수록 실감한다는 게 재미있는 거예요. 안 보이고, 이미지가 빈곤하고, 착각, 착시 같은 것들이 있는데 객관적 사실과 멀어질수록 생생하게 느껴진다는 게 재미있고 감각론적으로 해석될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영화
저는 마지막 대사 너무 좋았어요. 무대가 엄청 자세하게 나와 있는데 직접 연출을 하시는 건지 궁금했어요.
박영영
이게 공연으로 올라갈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읽을 때라도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구체적으로 써 놓은 것 같아요.
허선혜
왜 없겠어요.
문서희
보러 갈 때 친구랑 못 가고 따로따로 보러 갈 것 같아요. 다녀와서 ‘야, 봤어?’ 할 것 같은(웃음).
작가 박영영. 눈썹을 살짝 가리는 길이의 앞머리를 내리고, 뒷머리는 하나로 묶었다. 털모자가 눈에 띄는 검은 외투 안에 베이지색 니트를 받쳐 입었다.
박영영

이민규 <Outfluencer>

이민규
‘다른 손’에 맞는 게 뭘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친구가 『트렌드 코리아 2022』를 보고 있더라고요. 거기에 ‘가상 인플루언서’가 나왔어요. 그래서 그것을 모티브로 쓰게 되었습니다.
구지수
예전에는 대체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면 요즘에는 대체되는 일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읽어서 재미있었어요. 짧은 대사를 주고받는 것에서 느껴지는 섬뜩함도 흥미롭게 느껴졌고요.
박예지
저의 SNS,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버츄얼 아티스트’가 굉장히 많이 떠요. ‘이러다가 정말 인간이 사라지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도 해봤고요. ‘버츄얼 아이돌’도 많이 나오거든요. 그런 캐릭터를 보면 기분이 이상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늙으면 소위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고들 하는데 이들은 늙지도 않고 항상 최고의 상품 가치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누군가가 그것에 밀려나는 느낌이 더 많이 들어서 기분이 묘했어요. 이런 식으로 대체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큰 요즘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대면으로 만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네, 왜 그럴까.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그리고 우리는 어디까지 내어주게 될까 생각을 많이 해봤어요.
문서희
저는 여쭤보고 싶은 게, 보통 글을 쓸 때 기존의 무언가가 연상되지 않게 조심하잖아요. 근데 ‘지수’와 ‘리사’는 블랙핑크 멤버의 이름이기도 한데 의도를 하고 쓰셨나요. 그리고 후반부 대사 중에 죽음은 운명은 아니지만, 삭제된다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나오는데 왜 그런 대사를 쓰셨는지 궁금했어요.
이민규
등장인물 이름은 원래 블랙핑크를 생각한 건 아니었고요. 가상의 인물이니까 영어처럼 발음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리사’라고 이름을 붙였고, ‘지수’라는 이름은 여성의 이름을 생각하면서 아이돌 지망생이었으니 이름이 예뻤으면 좋겠다 싶었거든요. 우연히 겹치게 되었네요. 죽는다는 건 누구한테나 다 존재하는 건데 ‘삭제’되는 건 언제 삭제될지 모르니까. 죽게 되는 운명은 누구나 다 겪는 거니까 운명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김연재
‘블로거’, ‘인플루언서’만 보더라도 그 사람이 진짜라고 생각하기 어렵잖아요. 그 뒤에 누군가가 있을 것이고요. 삭제될 인간과 삭제될 운명의 AI 존재가 대화한다는 게 섬뜩했어요. 지금의 아이돌 산업이 생각나기도 해서요.
허선혜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런 깊은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것 같아요. 과학 분야에 지식과 고민이 있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단순히 ‘트렌드 코리아’에서만 나온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거든요. 담겨 있는 이야기가 가치가 큰 이야기였어요.
이민규
책에서 빌려온 것은 ‘가상 인플루언서’ 뿐이었고, 실은 ‘대체되는 존재들’이 더 큰 주제였어요.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이 연예인이고, 화가도 1등 자리를 빼앗기고 작가라는 직업도 사라질 것 같은데요. 컴퓨터가 더 체계적으로 잘 쓴다고 하더라고요. 이제 컴퓨터를 따라가지 못한다는데 그것에 대해 고민해보게 됐던 것 같아요.
박영영
글로 볼 때보다 낭독해서 읽을 때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약간 의문이 들었던 건 아이돌 팬이 아니어서 그런데 30, 40대 늙어가는 남자 아이돌들은 주름까지 좋아하는 팬들도 있어서 그게 성별의 차이인지 궁금했어요.
문서희
여자 아이돌은 계속 나이대가 어려지는데 남자 아이돌은 나이를 따지지 않고 좋아하시는 팬들이 많은 것 같아요.
박예지
소위 말하는 덕질에 있어서는 오히려 가상 인물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같이 나이 들어감’이나 내가 저 사람을 이만큼 오랫동안 알아 오고 그런 점들에 애착을 갖기도 해서, 현실의 덕질과는 조금 다른 결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2D 인물에 대해서는 실존 인물만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는데 왜 가상 인플루언서 같은 경우엔 아직 불쾌감을 느끼는 걸까 싶기도 하고요.
작가 이민규. 옅은 노란색 셔츠 차림이다. 그의 뒤편으로 프로젝터 화면의 하단이 조금 보인다.
이민규

김영화 <인형 뽑기, 주인공, 접근 금지>

김영화
저는 배우 작업도 하고 있는데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떼쓰듯이 쓴 작품이에요. ‘너네가 나 안 써주면 내가 나 쓸게’ 지금도 저는 제가 쓴 작품에만 출연하고 있거든요.
구지수
저는 읽으면서 여성들을 좌초시키는 말 중에 모호한 말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체 없고 모호하기만 한 말들,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이런 성의 없는 말들이 누군가를 무너지게 하기에는 충분하다는 것이 늘 절망스러웠던 것 같아요. 이 희곡이 그런 복잡한 마음들을 위로해주고 해소해줬어요.
문서희
이 글을 보면서 단편영화의 스크립트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왜 그렇게 느꼈을까 생각해보면, 이 공간이 무대 위가 아니라 내가 엄청 협소한 공간에 이 사람들과 같이 앉아서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지영’이 앞으로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을 자신이 쓰고, 자신을 위해 글을 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인물이 이후에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더 궁금해져요.
허선혜
저는 ‘지영’이라는 캐릭터가 선택받지 못할 만한 인물이 아니어서 좋았어요. 대차고 성격 있고 할 말 하고 감독 앞에서도 욕할 줄 알고 그런 캐릭터여서, ‘네가 그래서 그렇지’라는 인상을 전혀 주지 않아서 매력 있게 느껴졌어요. 궁금했던 게 있는데요. ‘지영’을 구원해주는 역할이 ‘영화’인데 작가님 성함이 ‘김영화’라고 되어있더라고요. 본명이신 건가요?
김영화
제 본명은 ‘김영화’이고요. 개명하기 전이 ‘지영’이었어요. 그때는 엄마 성이 ‘정’이어서 ‘정지영’이라는 필명을 썼어요. 제 스스로 과거의 나를 구원해주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그리고 ‘지영’이라는 이름이 이제는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됐잖아요.
김연재
우와, 너무 감동적이에요.
문서희
<중경삼림>에서도 ‘임청하’를 진짜 좋아하셨나요?
김영화
<중경삼림>에서 제가 좋아하는 컷이 정말 짧게 지나가는데요. <중경삼림>의 또 다른 여자 주인공 ‘왕페이’와 ‘임청하’가 잠깐 스치는 장면이 있어요. 인형 가게 앞에서요. 그 장면을 너무 좋아해서 작품에도 가져왔어요.
김연재
말들이 너무 리얼해요. 이 ‘지영’의 착하지 않고 못된 여자 같은 면이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키스할 때 안 불편해요?’ 이런 말들을 하는 것도 그렇고요.
박예지
인물 설명에 감독이 제일 밑에 있는 것이 좋았어요. 보통 중요한 순서대로 적잖아요. 그런데 ‘감독’이 맨 아래에 있어요. ‘지영’이 되게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안 만나도 된다는 것에서 산뜻한 정적이 저에게도 시원했고요. 마지막 지문에 ‘어디서 들은 대사 같은데?’라는 말은 너무 로맨틱한 거예요. 둘이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게 될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고요. 마지막에 ‘지영의 진짜 영화를 기다리며’ 하는 장면이 너무 인상적이었는데 말씀해주신 이름 이야기 들으니까 이렇게 멋있는 말이었다니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댓글 중에 ‘비옷’이라는 분이 ‘저에게도 영화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나 혼자 입고 있는 이거 벗고 같이 우산 쓸 텐데’라는 글을 보고, ‘아, 이 희곡은 이 댓글까지 같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서로를 알아보는 한 영화는 계속될 것 같아서 여성 창작자로서 많은 힘이 되는 글이었어요.
작가 김영화. 파란 LA 다저스 비니를 쓰고, 짙은 남색의 맨투맨과 빨간 체크무늬 목도리를 두르고 있다. 두 손으로 핫팩을 쥐고, 웃고 있다.
김영화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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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선혜

허선혜
극작가입니다.
연결되고 싶어서 글을 씁니다.
창작살롱 나비꼬리에서 다양한 만남을 위한 기획/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qeqe0321@naver.com
https://www.instagram.com/nabicor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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