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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닿기

2022년 희곡 결산 수다회

전서아

제229호

2023.01.26

일시:
2022년 12월 16일 오후 3-6시

장소:
서울연극센터

진행:
이홍도(극작가, 희곡운영단)


참여:
김민지, 김호야, 신지원, 이승혜, 일요, 전서아, 채윤(이상 2022 희곡공개모집 참여 극작가)

* 각자가 불리고 싶은 이름으로 명패 작성.
* 6작품을 각 25분씩 시간 분배하여 같이 읽고, (작품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 대본은 (작가와 진행자) 8명, 2번 이상 원하는 배역에 자원해서 읽는 방식으로.
* 작품의 순서는 읽은 작품의 작가가 다음 읽을 작품을 지목.

인사

전서아
서로 자기 소개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희곡 쓰고 있는 전서아입니다.
이홍도
사회 맡은, 웹진 연극in 희곡운영단 이홍도입니다.
일요
필명으로 일요를 쓰고 있습니다. 일요일에 태어났습니다.
김호야
<핑, 퐁핑, 퐁>을 썼습니다. 필명입니다.
김민지
<엉덩이 기억상실증>을 썼습니다.
채윤
<허리디스크가 낳은 이야기가 이야기를 한다.>를 썼습니다.
신지원
<8의 실내극>을 썼습니다.
이승혜
<어느 고백이 산화하던 날>을 썼습니다. 본명 같죠? 본명입니다.

신지원 <8의 실내극>

작가 신지원. 어깨를 살짝 덮는 단발에 앞머리를 내리고 검은 마스크를 썼다. 보라색 목폴라 위에 검은 가디건 차림이다.
신지원
이홍도
신지원 작가님의 <8의 실내극>은 2022년 가장 먼저 게재된 희곡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5월 11일에 게재되었는데, 그래도 4월에 가장 가깝게 게재하자는 의미였습니다. 또한 세월호 8주기를 의미하니, 2022년 게재를 시작하는 희곡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읽어보니 송년의 느낌도 있네요.
채윤
저는 여러 등장인물이 나오는 작품을 잘 못 쓰는데, 많은(5명) 등장인물이 나오는 희곡을 쓰신 것이 부러웠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지만, 많은 부분 할 수 있는 게 없고 시간은 흐르고 잊혀 갑니다. 기억하는 것만이 우리가 계속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희곡이 그렇게 기억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엔딩을 두 가지로 설정하신 점은 새로운 시도라서, 창작자들이 공연으로 만들 때도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해보게 되는 지점이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신지원
깔끔하게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어떤 부분은 다 얘기하지 않고 각자가 가져갈 수 있도록 열린 첫 번째 엔딩에서는 ‘너’가 많이 보이고요. 두 번째는 남아있는 만수가 많이 보이는 엔딩입니다. 제 입장은 남아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작가의 말처럼 두 번째 버전을 써서 (엔딩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전서아
두 번째 버전을 다 같이 읽었을 때, 소리로 직접 (희곡을) 들으니 어둠 속에서 파도처럼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엔딩이 희곡과도 잘 어울렸어요. 글로 읽었을 때보다 기억에 더 많이 남았습니다.
이승혜
저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몇 번 읽다 보니, ‘잠이 과연 뭘까?’라는 질문이 생겼어요. 이게 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부하는 사람의 폐해가 아닐까 싶습니다.

(일동 웃음)

어쨌든 잠이 왔잖아요. 남겨진 사람들에게 잠이 오지 않는 감각을 쓰실 수도 있는 건데, 잠이 오는 설정을 선택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이홍도
불면의 시간으로서 8주기가 맞물려서, 밤과 잠의 존재가 직관적으로 확 다가왔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정서가 유니크하게 느껴졌습니다. 예를 들면, ‘브로콜리 너마저’ 같은 밴드도 처음 미니앨범 EP가 나왔을 때 타이틀이 “목욕탕에서 질질 짜다 나온 것 같은 순도 100%의 감성을 가진 밴드”였어요. 노래랑 매칭이 안 되는 듯하면서 또 잘 어울리는 타이틀이거든요. 되게 웃기고 재미있는 부분과 동시에 진심이 있었어요. <8의 실내극>도 그런 것들이 대단히 많이 느껴졌어요. 보통 세월호를 연극에서 만났을 때, 이런 정서의 작품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저에게 있었습니다. 작가님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정서가 희곡에 담겨 있는데, 이게 읽는 이에게 치유를 주는 것 같아 대단히 인상 깊었습니다.
신지원
우선, 잠을 정서적으로 사용한 부분이 가장 컸습니다. 잠을 잔다는 게, ‘오는’ 거잖아요. 기억도 ‘오는’ 감각이고, 잠과 성질이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죄책감의 상징이기도 하고요. 기억이 떠밀려 오는데 잠을 자버리면 어쩔 수 없이 무력해지는 행위 같아서, 잠이 오는 설정을 선택했습니다. 항상 기억하고 싶고, 기억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면 자연스럽게 잠이 오니까요.
김민지
저는 남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혹은 불면이나 우울의 정서가 깊은 사람들을 달래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사실, 읽으며 세월호 사건만을 떠올렸던 건 아니라서, 작가님이 그와 관련된 의도나 노트를 따로 작성하셨는지 궁금했습니다. 저는 <8의 실내극>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버전의 엔딩이 더 좋았는데요. 차분한 방백으로 생각을 말하는 대사 다음에 ‘너’가 등장하는데 누군가가 등장해서 만수를 봐준다는 게 희망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남아있는 사람, 불면이 지속되는 사람에게 굉장히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는구나 싶었고 무겁게 그려질 수 있는 내용을 유쾌하게, 따뜻하게 잘 풀어내신 것 같았습니다.
신지원
세월호를 떠올린 건, 어쩔 수 없이 2016년이 저에게 굉장히 강하게 남았던 해였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불면에 찾아오는 존재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게 해결되지 못한 존재거나 아직도 마음속에서 남은 존재라고 생각해요. 그런 존재들이 찾아오는 밤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그게 저한테는 (세월호) 생존자 친구들, 유가족분들이었습니다. 각자의 존재들을 떠올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썼습니다.

김호야 <핑, 퐁핑, 퐁>

희곡결산수다회의 현장사진. 2명이 나란히 앉는 직사각형의 긴 책상 네 개가 정사각형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각 테이블에 두 명씩 총 여덟 명의 작가들이 둘러앉아 각자 태블릿이나 휴대폰, 인쇄물로 희곡을 보고 있다.
김민지
처음에 읽었을 때,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탁구대를 사이에 두고 나누는 대화가 참신하고, 종교시설이라는 설정도 흥미로워서 단숨에 읽었습니다. 민아와 성열이 각자의 추억에 대해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것, 특히 “가라아게였어”라는 대사가 확실히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과거를 기억하는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이홍도
아이구.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주셨습니다.

(일동 웃음)

저도 마찬가지고, 너무 직관적이고 하나의 사건과 큰 행동 안에서 딱 만들어지는 희곡이라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요소요소 재미있는 부분이 많아서 이게 원래 있는 말일까? 작가가 만든 말일까? 찾아보며 읽었게 되었습니다. 종교와 관련된 명칭도 그렇고요. ‘연근마켓’도 그렇고. 작가의 위트가 즐거웠습니다.
채윤
입으로 소리 내어 읽기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보는데, ‘이건 입으로 소리 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이홍도
맞아요, 되게 쫀쫀하죠.
신지원
대화할 때, 주고받기가 잘 된다는 비유로도 탁구를 사용하잖아요. 그래서 대화들이 정말 탁구를 치는 행위처럼 긴박하고 단순하지만 명쾌하게 붙어서, 단숨에 읽어버리게 되는 작품 중 하나였습니다. 너무 재미있게 읽고 또 공감이 갔어요. (극 중 인물들이) 회고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채윤
(극 중 인물들이) 정말 끝까지 가서 성열이 민아를 이 공간에서 끌어내려고 하거나, 아니면 민아를 다시 입단시키려고 하거나…

(일동 웃음)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은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김민지
제목인 <핑, 퐁핑, 퐁>처럼 대화에 리듬감이 느껴졌는데요. 그런 의미로 제목도 탁월한 희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리듬감 덕분에 더 재미있게 읽었어요.
김호야
사실은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경찰 공무원을 준비하고, 사이비 종교집단에 가입한 애인을 둔 분이 있어요. ‘사람은 왜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럴 이유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끝이 좋으리란 보장이 없는데, 사랑에 빠지는 것도 그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전서아
저도 <핑, 퐁핑, 퐁>을 처음 읽었을 때, 우리가 무엇을 믿고, 기다리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느껴졌어요. 당연히 리듬감도 너무 좋고, 종교―공무원 시험―사랑이라는 고리를 짧은 희곡 안에 일관되게 쓰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김호야
여기서 민아가 성열이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고백한 장면은 “가, 점심 메뉴 국수야”입니다.

(깨달음의 탄성)

왜냐면 국수는 빨리 가서 먹어야 하니까 얼른 가렴. (이라는 뜻)

(어오오오…)

아직도 널 사랑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누군가
하, 지독하다. 지독해.

(일동 웃음)

이홍도
말로도 드러나지만, 마지막 장면인 랠리에도 그 정서가 실려요.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계속 랠리를 이어가는 정서에서도 느껴졌습니다.
김호야
탁구대를 가져가서 나랑 같이 해볼 생각 없냐고 물었을 때, 기스가 너무 많이 나서 안 되겠다고 말하는 것도 너와의 추억이 너무 많지만 (관계를) 계속할 수는 없다는 그런 마음입니다.
채윤
탁구대가 기스가 많이 났다는 말이 마치 우리 관계가 돌이킬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해서 탁구 얘기구나, 관계 얘기구나 하면서 왔다 갔다 하는 그 재미도 있었습니다.
신지원
제목이 ‘핑퐁, 핑퐁’이 아니라 ‘핑, 퐁핑, 퐁’이에요. 쉼표를 이렇게 찍은 이유가 있으실까요?
김호야
두 사람의 마음이 잘 오가고, 소통이 잘 됐다면 ‘핑퐁, 핑퐁’이었겠지만, 아니었기 때문에 (엇박처럼) ‘핑, 퐁핑, 퐁’으로 제목을 짓게 되었습니다.

김민지 <엉덩이 기억상실증>

작가 김민지. 가슴까지 오는 어두운 갈색 머리를 단정히 늘어뜨렸다. 검은 니트 위에 베이지색 후리스 조끼를 입었다. 측면을 보며 두 손바닥을 들어 인사하듯 흔들고 있다.
김민지

영훈 역을 읽은 이홍도 작가가 질문한다.

이홍도
캐스팅하신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김민지
생각했던 이미지로, 은수는 차분한 느낌을 주시는 분이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엉덩이 기억상실증>이 낭독된 적이 없기에, 영훈은 현장에 계신 유일한 남성분인 이홍도 작가님이 읽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김호야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제목이 사랑 고백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너는 나의 엉덩이였어”라는 말을 (사랑 고백으로) 듣게 되네요. 제목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은수가 왜 영훈이랑 헤어졌을까? 무심해서? 시간이 지나서? 남자가 너무 이기적이어서? 궁금했습니다. 읽으면서는 공간이 달라지면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치과 대기실이나,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뛰는 상황, 건강검진 센터도 재미있을 것 같고요.
이홍도
저는 반대로 이 공간이 카페고, ‘사라지는 서울’이라는 전시가 배경이고, 창밖의 풍광들도 사라지고 있잖아요. 영훈도 ‘엉덩이 기억상실증’이라는 설정이 있고. 이런 것들이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소재들이 주는 절제되어 있고, 단단한 언어로 전달되는 방식이 시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카페를 배경으로 하는 연극을 쓰지 말라는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너무 쉽고 일상적이니까. <엉덩이 기억상실증>은 도시의 카페라는 공간이랑 맞물려 만들어지는 지점이 있어 좋았습니다.
김민지
은수와 영훈이 헤어진 이유는 열어두려고 했습니다. 왜 헤어졌는지는 모두가 다르게 생각할 것 같고, 어쨌든 헤어지기까지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헤어졌다는 상황이 중요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엉덩이 기억상실증>은 개인적으로 몇 년을 개발하며 쓴 희곡인데 그간 신기하게도 장소에 대한 의견을 주신 분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다만, 처음부터 이 희곡을 쓰려고 했던 이유는 일상적인 공간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극 중 은수의 직업이나 작업과 관련되어, 주변의 풍광이 사라져가는 모습으로 보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갤러리 카페를 설정했습니다.
김호야
갤러리 카페에서 그림이나 사진을 철거하는 과정이랑 맞물리면 잘 이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서아
저는 사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떻게 보면 일상적이고 당연한 말들이 오가는 것 같지만, (은수 역을) 소리 내어 읽어보니 너무 절절한 말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당연한 것이 사라진다는 것이 중요한 이야기구나. 작가님이 그래서 이런 (공간)설정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이홍도
<엉덩이 기억상실증>은 대단히 절제되어 있어서 읽는 사람들이 더 이입하게 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채윤
제목이 위트 있었고, ‘엉덩이 기억상실증’이라는 게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재미있었고,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좀 추상적인, 자기들만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사랑이라는 게 그렇고 그래서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사라진 게 사실 몸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이래”라는 대사가 와닿았습니다. 서로 알아차리는 시점이 달랐던 것 같아요. 알아차리고 돌아왔을 때 이미 떠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는 거고. ‘사라지는 서울’ 전시를 상상하면서, 사라지고 남아있다가 하는 이미지들이 엄청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사이에 사라지지 않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지원
근육은 제가 노력을 해야 길러지는 거잖아요. 쉬는 순간 사라지게 되는 것. 마찬가지로 관계에서도 근육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당사자들은 모를 수 있는, 영훈은 끝까지 모르는. 독자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절제된 어떤 진실이라고 해야 할까요. 정말 중요한 본질을 독자가 알게끔 제시해주는 희곡이라 굉장히 좋았습니다.
이승혜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만나고 헤어지잖아요. 나이가 들수록 그런 관계의 지속이 어려워지고. 그래서 잃어버린 사람들이 엄청 떠올랐습니다. 사람들이 사실은 죽을 때까지 자기 사람들을 다 지키면서 살진 못한다고 생각해요. 뭔가 내가 잃어버린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텍스트 사이들로 제 기억을 주입하면서 읽게 되는 희곡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나쁜지가 아니라, (극 중) 두 사람 모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어요. 영훈도 최선을 다했고, 자기가 깨달았을 땐 은수에게 굳이 구차하게 왔잖아요. 떠나버린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끝까지 잘했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홍도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저는 <엉덩이 기억상실증>을 퀴어 서사로 읽었거든요. 인물들이 서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외부를 대단히 신경 쓰고 있고 주고받는 선물이나 디테일을 퀴어 서사로 읽게 되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작가님께서 오늘 캐스팅하시는 걸 보고, 아니라는 걸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김민지
저도 사심위원분들이 작성해주신 평을 읽었기에,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느끼셨는지 궁금했었는데요. 의도는 없었으나, 사실 어떻게 읽히든 본질은 사랑하는 마음이기에 상관없습니다. 확대 해석 감사합니다.
이홍도
읽는 이가 (퀴어 서사로) 읽는 것에 자꾸 길이 들어서요.

(일동 웃음)

대단히 절제되어 있어서 서브텍스트를 자꾸 유추하며 읽게 되는 좋은 작품인 터라 누군가는 이것을 퀴어 서사로도 읽게 되었다고 너그럽게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민지
그럼요. 본인의 기억들을 넣어 읽어주셨다는 이야기도 해주셨는데, 제가 원한 것이 그런 부분들이었거든요. 참 감사합니다.

이승혜 <어느 고백이 산화하던 날>

작가 이승혜. 가슴까지 오는 검은 생머리와 시스루뱅이 눈에 띈다. 흰 목폴라티 위에 검은 가디건을 걸치고 동그란 팬던트 목걸이를 착용하였다.
이승혜
이홍도
분량은 짧은데, 엄청 강렬한 작품입니다.
김민지
저는 그동안 연극in에서 제시하는 ‘다른 손’이라는 주제가 ‘인간/비인간’의 구조로만 읽혀서 막연하고 어렵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언어학자와 사어(死語)라는 소재로 이렇게나 애틋한 관계성을 띠는 이야기를 담아주셔서, 주제를 다르게 볼 수 있었습니다. 사어라는 소재는 처음 접해봤는데요, 매력적인 이야기여서 현장감상 때도 흥미롭게 봤던 작품 중 하나였습니다. 작가님이 노래를 제시해주셨는데, 최근에 노래를 들으면서 다시 읽어봤습니다. 노래가 참 좋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어느 고백이 산화하던 날>이 제 취향에 가까운 희곡이었습니다.
신지원
발화되었을 때 재미있는 희곡이 있고, 또 눈으로 감상하는 재미가 있는 희곡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감상할 때 자기만의 호흡과 템포를 가지고 읽을 수 있는 틈이 있는 장르가 희곡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개인적으로 <어느 고백이 산화하던 날>은 제 호흡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또, 사어라는 소재가 희곡 (그 자체) 같기도 했어요. 사라지는 것, 어떻게든 스스로 살아남으려는 존재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발화해줘야 하고, 삶이 되어야지만 가치를 갖는. 세상에서 많은 것들이 이런 식으로 사라지는데, 사어에 빗대어 이야기한 것 같았습니다. 저도 사어라는 소재를 만난 게 처음이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소재를 만나게 된 것이 반갑고, 새로웠습니다.
궁금한 점이 있었다면, 희곡은 발화가 예정된 텍스트잖아요. (극 중) ‘여’의 대사 사이, 공백이 많은데 의도나 원리가 있으신지. 발화를 생각하신 부분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이승혜
저는 상실되어가는 어떤 것을 붙잡으려는 상당히 부조리한 시도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극 중 ‘여’의) 리듬은 뭔가를 받아쓰는 리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깨달음의 오오오…)

그래서 타이포그래피로 봤을 때는 줄임표가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가루처럼 보이길 바랐어요. 줄임표 때문에 읽기가 더 힘들어졌나 싶어서 비우는 게 발화할 때 더 나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김호야
그런데 줄임표가 있어야 모래알처럼 보인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공백만 있으면 시간의 사이처럼 보이게 될 것 같아요.
이승혜
그렇죠. 그렇죠.
채윤
약간 레제드라마처럼, 쓸 때는 줄임표를. 배우가 읽을 때는 공백을.
이승혜
두 가지 버전으로. 좋죠. 좋죠.
채윤
저는 너무 재미있게 봤습니다. 사어도 흥미롭지만, “그런데 난 살아있는데”라는 대사에서부터 사어가 죽은 말이지만 죽지 않은 말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부분이 제가 좋아하는 취향이어서 더 재미있게 봤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사어가 스스로 사라진다는 것을 공표하는 것이, 산화함을 공표하는 것이 죽지 않을 것처럼 들려요. 그러면서도 결국 죽을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슬퍼지기도 했습니다.
또 재미있었던 것은 ‘277232917-1’이라는 시간. 연극으로 올렸을 땐 어떨지 모르겠지만, 읽을 때는 그 시간만큼 갇혀있던 것 같은, 억겁의 시간을 함께 겪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지막(3장)에서 줄임표가 줄어, 오히려 말이 생겨난 것 같기도 했고요. 시간이 흘러 오히려 말이 더 생겨난 건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극 중) 언어학자 ‘131071’의 이름 뜻도 궁금했습니다.
이승혜
<어느 고백이 산화하던 날>의 언뜻 이상하게 생겼다고 감각될 수 있는 숫자는 메르센 소수1)인데요. ‘277232917-1’는 지금까지 발견된 소수2) 중 가장 큰 소수입니다. 약수가 1과 자기 자신밖에 없는. (웃음). 알아들으라고 쓴 건 아니고, 그냥 제 만족으로…
그리고 ‘131071’에 대해서라면, 주민등록번호는 여섯 자리로 시작하니까요, 제가 봤을 때 가장 사람같이 생긴 여섯 자리 숫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김호야
저는 뭔가를 읽을 때, 구체적인 것을 잡으려 하는 습성이 있는데요. 이게 무엇을 빗대고 있나?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언어학자와 사어라고 하지만, 실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겠구나. 왜냐하면 한 인간과 다른 인간이 만나면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서로 모르는 언어 세계거든요. 불통의 세계인데, 그래도 내가 너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하는 일이 필사인 것 같고. 다가가 같은 언어를 공유한 관계가 결국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느 고백이 산화하는 날>을 읽으면서 둘의 관계를 빗대고 있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승혜
그렇게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다른 손’이 비인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비인간을 대할 때 ‘사람 같은’ 부분을 찾게 되고, 결국 인간으로 회귀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럼 우린 다른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는 있는가?’라는 질문이기도 했어요. 김호야 님이 말씀하셨듯이 완전히 다른 언어와 다른 세계에 살잖아요. 그래서 닿으려고 분투하는, 그런데 흩날려 사라지는, 그걸 쓰고 싶었습니다.
일요
저도 질문드리고 싶어요. 시적인 텍스트여서 상상력을 많이 불러일으키는데, 무대에서 상연될 때 작가님이 염두에 둔 이미지가 있을까요? 어떤 구체적 이미지를 상상하시면서 썼을지 궁금해졌어요.
이승혜
기술이 허락한다면 1인극으로 올리고 싶단 생각을 가장 많이 하는데요, 그건 아직 제 머릿속에서만 가능한 것 같습니다(웃음). 그리고 무대 환경의 이미지는 사막과 종이, 그리고 연필의 사각사각 소리. <8의 실내극>에서의 파도 소리처럼 말이 되지 못한 글자들이 내는 목소리를 사방에 깔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일요
음향이 굉장히 중요하겠어요.
이승혜
공연을 하기 위해 썼다기보다는 일단 쓰고 어떻게 공연할지 생각해본 것 같습니다.
이홍도
저는 그러면서도 연출적인 텍스트라고 느껴졌습니다. 실험을 과감하게 시도하는 희곡을 오랜만에 보다 보니, 이런 작품이 희곡의 다양성을 넓혀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언뜻 이 작품의 스타일을 낯설게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 사무엘 베케트를 연상하게 하면서 전통적인 면을 가져가는 희곡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해피 데이즈>가 많이 떠올랐어요. <고도를 기다리며>, <엔드 게임> 등의 희곡처럼 극한의 상황에서 언어적 소통과 인물들의 관계 맺음이 끝에 다다른 느낌이면서, 동시에 베케트적인 것과 상반되게 따뜻하게 풀어지는 부분(결말) 또한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극 중에서) 관념어들이 맞물리고 연쇄하는 것이 (작가의) 유니크한 언어로 느껴지기도 했고요.
일요
영화 <듄>의 장면들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사막도 그렇고. 희곡―연극을 넘어서, 퍼포먼스나 공연으로 확대해서 넓힐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승혜
네. 항상 관심을 가지는 부분인데, 미술이나 전시와도 연결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일요 <71병동>

작가 일요. 어깨를 가볍게 덮는 머리는 파마기가 남아있고, 검고 둥그런 안경을 썼다. 노란 가디건에 주황색 손뜨개 목도리를 하고 있다.
일요
이홍도
<71병동>은 생활의 디테일이 느껴졌습니다. 5월 11일, 처음으로 게재된 작품 중 하나인데요. 기존 ‘다른 손’ 공모와는 다른 결을 보이면서도, 소중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이번 희곡 공모의 성격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처음 게재하게 되었습니다.
김민지
읽으면서 작가님의 삶의 경험치가 대단히 높을 거라고 생각했고, 음식물 쓰레기장의 냄새를 묘사하는 부분 등 굉장히 디테일한 설명들이 있어서 조심스럽지만, 경험을 바탕으로 쓰셨는지, 혹은 어떤 식의 자료조사가 이루어졌는지 궁금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령민’이라는 인물이 흥미로웠어요. (극 중) 령민이 냄새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에서, 삶에서 더럽다고 일컬어지는 것들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되었어요. 소, 돼지도 그렇고 인간도 그렇고. 냄새는 자연스럽게 동반되는 건데. 삶의 경험치로만 깨달을 수 있는 언어들이 령민에게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령민이 지혜롭게 느껴졌고, “몸이 일하고 내가 따라가요. 그 속도도 나쁘지 않아요”라는 대사도 참 좋았습니다.
일요
실제로 1박 2일 동안 부모님이 병원에 계셨고, 그때 딱 하루 병간호를 하고 나서 할 수가 없어서 앱으로 중국인 간병인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일하시는 걸 보고 령민 캐릭터에 영감을 받았어요.
김호야
전 성격이 착한 편이 아니라… (웃음). 지금 일요 님이 말씀하신 내용에 굉장히 공감합니다. <71병동>은 시간을 갖고 인생에 대해 지긋이 들여다보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빛나는 대목들이 있고, 그런 부분은 흉내를 낼 수 없는 것 같아요. (극 중) 손톱이나 생리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도 너무 디테일하고 공감을 많이 했어요. 다만 갈등 요소가 투입되면 더 흥미진진해질 것 같아요. 령민이 시종일관 착하고 지혜로운 현자 같아서, (령민과 영신이) 돌봄이나 급여를 두고 싸우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해봤어요.
일요
희곡은 이번에 처음 써봐요. 어린이책 작업을 주로 하는데, 제가 동화를 못 쓰는 이유가 그거 같아요. 갈등의 요소를 넣는 걸 힘들어하고, 말씀하셨듯이 대립 구조를 만들어 서사를 훨씬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부분을 잘 못 하는 것 같아요.
김민지
저도 갈등을 굉장히 힘들어하는 사람인지라, 방금 일요 작가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너무나 공감이 되는데요. <71병동>은 삶의 디테일이나 현장감이 잘 살아있기 때문에 굳이 표면적인 갈등 없이도, 어떤 이의 일상 한 장면을 바라보는듯한 느낌으로 볼 수 있어서 지금도 좋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음식물 쓰레기장 분류 작업을 사람이 직접 한다는 걸 덕분에 처음 알았어요. 그런 디테일이 너무 좋았습니다.
신지원
저도 말씀 받아서, 처음(5월 11일) 게재된 작품 중 하나여서 너무 반갑게 읽으며 시작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다른 손’이 주제임에도, <71병동>은 ‘같은 손’이라는 감각을 받은 작품 중 하나였습니다. 그게 어떤 감각이냐면, 결국에는 그 뒤에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 어떤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 뒤에 다른 이가 있다는 것. 제가 좋아하는 연출가가 이런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텍스트로 읽는 것 같았습니다.
돌봄 노동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 모두가 통과해야 하는 시간이고 경험인데 많이 다뤄지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해요. 그 삶을 굉장히 디테일하게 조명해서 읽는 사람이 간접 경험하게 하고 이입할 수 있게 하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저는 <71병동>에서 굉장히 큰 내적 갈등을 읽을 수 있었어요. 나와 내 자신의 싸움을 하는 엄청난 시간이라고 느꼈습니다. (극 중 영신의) 독백이 많잖아요. 그 시간을 견뎌내고 분투하는 현장감이 많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이번에 혜화동1번지에서 공연한 연극 <정희정>이 많이 생각났습니다. 돌봄 노동에 관한 이야기, 아이였다가 누군가를 돌보게 되는 순환하는 이야기였거든요. <71병동> 정말 좋았습니다.
이홍도
신지원 작가님이 (령민 역을 낭독에서 맡아) 너무 잘 읽어주셨던 것 같습니다. 읽고 난 후 말씀도 너무 잘 해주셨습니다.
신지원
너무 어려웠습니다…
누군가
깜짝 놀랐습니다. 캐스팅이 신의 한 수.
채윤
읽으면서 그 생각도 했습니다. 중국 동포분을 령민 역으로 캐스팅해야겠다. 당사자성에 대해서도 생각했고, 어떻게 캐스팅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요.
첨언하자면, 대사 양이 굉장히 많아서 극의 주제나 소재에 대한 관심도에 따라 재미있게 읽을지 아닐지가 갈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돌봄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가 이제야 나오고 있는 것 같아서 저는 굉장히 반가웠고, (극 중) 영신이 가족 중 본인이 프리랜서라 돈이 없어 시간(노동)으로 메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저도 부모님을 부양해야 할 상황에서 영신처럼 생각할 것 같아서 공감이 되었어요.
그리고 점점 태어나는 사람은 줄어들고, 100세 시대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될 문제 같아서 더 와닿았습니다. 단순하게 (령민과 영신이) 애틋하고 착하게만 읽히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미워지거나 영신의 마지막 독백에서는 정말로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키워준 사람과 키운 사람이 혼재되는 느낌. 우리가 더 알아야 할 이야기가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승혜
인물들 각각의 생활 양상을 상상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서로를 연민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자기가 알고 있는 엄마가 연약해지고 돌봄을 받아야 할 때, (영신이) 스스로 인간 말종 같다고 하는 부분도 있잖아요. 영신이 자신을 선하고 배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닌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채윤 <허리디스크가 낳은 이야기가 이야기를 한다.>

가 채윤. 검은색 목폴라의 소매가 손등을 덮는다. 허공을 보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채윤
이홍도
이번 희곡 공모 최고의 문제작.

(일동 웃음)

다들 어떻게 읽으셨나요?
김호야
영광입니다. 이런 작품을 낭독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재미있었어요!
이승혜
마치… 이야기의 창세기 같은…
(극 중에서) 계속 “묻힐 이야기”라고 말하는데, 그런데 계속 서로가 있음을 전제하고 하는 일이잖아요. 글쓰기는 혼자지만, 이야기할 때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게 되는 거니까. 오히려 더 영원의 가능성을 가진, 위트라고 할까요. 저는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이홍도
위트 그 이상이지 않을까요.
이승혜
어떤 표현을 해야 이 재미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홍도
정신이 혼미해지는…

(일동 웃음)

김호야
(극 중) 시소가 주는 역동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신지원
시소는 계속 전복되는 상징적 오브제로 느껴졌어요. 개인적으로는 혼자 읽었을 때와 다 같이 낭독했을 때의 감상이 굉장히 다른 희곡이어서,

(일동 맞아요, 맞아요)

극 중에서 말하는 ‘이야기’도 결국 발화되어야 하는데, 그런 희곡을 직접 듣게 되어서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제4의 벽을 깨고 관객에게 말을 거는 지점도 신선했고, 계속 전복되는 상황 속에서 어딘가로 탁 도착해버리는, 대단한 희곡이었습니다.
이홍도
결말을 어떻게 내려나 싶었거든요.

(일동 웃음)

채윤
저도 모르는 어디로, 도착했습니다.
이홍도
그러니까요. 마지막에 정서로 이해되어서.
김민지
아까 이야기의 창세기 같다는 말씀에 굉장히 공감합니다. 글로 읽었을 때와 낭독했을 때가 180도 달라지는 희곡이었어요. 낭독해주신 작가님들(김호야, 일요, 이승혜, 김민지)이 너무 잘 읽어주셔서 시소의 무게중심이 잘 느껴지기도 했고, 무대의 이미지가 가장 궁금한 작품이었습니다.
쓰는 사람으로서, 메타 연극의 성격이 강한 작품에서 개연성에 대해 이렇게나 재밌게 비꼬아주시니 인상 깊고, 감사했습니다. 특히, “개연성 하나 설명하자고 모든 지면과 스크린과 상상과 삶 속의 시간들을 낭비해야 돼”라는 대사. 정말 공감했습니다.
또 대사가 전환되고 비틀어지는 부분들이 지루할 틈 없이 꼼꼼하게 잘 연결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작가님께서 오랜 시간을 들여 쓰지 않으셨을까, 싶었어요. 작가님의 유머 감각이 작품 전반에 스며있는 것 같아서 작가님이 궁금해지는 희곡이었습니다.
김호야
저는 읽으면서 이렇게 등장인물에 공감해본 적이 별로 없거든요. (김호야 작가는 극 중 ‘여1’을 읽었다) 읽으면서 거의 나… 우와…

(일동 웃음)

어디로 튈지 모르게, 엄청 흥미진진하게 흘러가더라고요. 그래서 마음이 트이는듯한, 후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기분이 좋았거든요. 마치 들판을 하하하하하 달리는 듯한… 어디로 가지? 아 그래, 어차피 ‘말’인데, ‘이야기’인데. 뭐 어때. 그런 호탕함을 느꼈습니다.
이홍도
저는 작가 본인도 그런 고양감과 흥분감 속에서 작품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재미있게 쓰셨을 것 같습니다.
채윤
저는 읽으면서 쓰는 편이어서요. 쓰는 건 사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썼는데, 위기의 순간에 사람이 좀 호기로워지는 게 있잖아요. 저한테 없던 용기가 생겨나면서. 처음에는 정말 재미있게 쓰자 싶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디로 보내지지 않으면 죽을 글인데. 그리고 그때 한창 이야기가 사라지고, 코로나로 인해 연극도 사라질 것 같았습니다. 내가 쓴 글 속에서만이라도 (이야기를) 완전하게 두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간중간 제4의 벽을 깨는 설정은, 연극만이 갖고 있는 재미를 살려 보여주고 싶었어요. 저도 낭독하면 어떨지 궁금했는데, 너무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승혜
많은 고민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채윤
진짜 허리디스크가 올해 초에 터졌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누워만 있으라고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하지 말래요. 그래서 누워있는데, 삶이 이대로 끝나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입으로 말하는 것, 이야기를 하는 것. 그리고 병실에 있으니 옆에 계신 아주머니들의 이야기가 막 꽂히더라고요. 새벽에 화장실 창문의 바람을 떠올리면서, 처음엔 섹스를 떠올리며 쓰다가

(일동 웃음)

단순하게 체위를 연상시키며 직관적으로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어 시소를 설정했습니다. 그런데 글을 같이 쓰는 동료들이 ‘시소는 혼자 못 타지 않냐. 이야기도 혼자 할 수 없고’라는 피드백을 줘서.

(오오오오….)

그래서 체위에서 발화하는 사람, 무게중심까지 확장시키며 <허리디스크가 낳은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는다>를 쓰게 되었습니다.
한 책상에 전서아 작가와 이홍도 작가가 나란히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좌측에 앉은 전서아 작가는 검은 후드티와 검은 마스크를 썼고, 우측의 이홍도 작가는 밝은 회색의 맨투맨에 흰색 마스크를 착용했다. 두 사람의 뒤편에 있는 창 너머로 대학로의 풍경이 언뜻 보인다.
전서아, 이홍도

마무리

이홍도
마무리하기가 참 아쉽네요. 각자 한마디씩 소감 부탁드립니다.
일요
희곡과 연극은 제가 항상 동경했었는데요. 떨리고 수줍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왔는데, 역시 오길 잘했습니다. 함께 쓰는 분들, 창작하는 분들 만나서 정말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김호야
연극in에 실린 희곡을 보며, ‘아 희곡의 세계는 정말 다채롭구나’ 느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갇혀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낭독까지 함께하니, 세 번째 눈이 떠지는 느낌? 희곡에 대해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 것 같아 감사했습니다.
김민지
혼자서만 쓰다가, 이렇게 발화하고 낭독할 수 있는 귀한 자리를 갖게 되어 감사합니다. 기획해주신 연극in 측에도 감사합니다. 사실 ‘다른 손’이라는 주제가 제겐 조금 막연하고, 어렵게만 느껴졌는데요. 올해 ‘자기만족충만’과 ‘다시 쓰기’까지 주제로 확장되었잖아요. 현장 감상 때부터 느낀 거지만, 훨씬 다채롭게 재미난 작품들이 많아서 주제를 넓혀주신 것이 확실히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확장해주셨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입니다.
채윤
저도 쓰다 보면 혼자라고 느낄 때가 많은데, 같이 나누면 더 얻는 게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희곡은 무대 상연을 전제로 하는 글이다 보니 대화, 사람의 분위기를 통해 읽지 못하면 그냥 책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낭독하는 자리가 너무 귀합니다. 각자의 작품 세계까지 이야기할 수 있어서 더욱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신지원
같이 만나서 너무 반갑고,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희곡을 굉장히 사랑하는 사람이자 독자인데요, 새로운 희곡을 만나기 쉽지 않잖아요. 번역을 해서라도 외국 희곡을 만나야 하나? 하는 스트레스가 있었는데, 이 시간을 통해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독자로서도 인상적이고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이승혜
외부 피드백을 받는 일이 저에겐 정말 귀하고, 꼭 필요했습니다. 이런 자리가 좀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충분히 안다고 생각했는데 더 고민하지 않았구나, 하는 지점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언제 발화되어도 부끄럽지 않게, 더욱 최선을 다해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전서아
저도 작년 ‘다른 손’ 희곡 공모에 작가로 투고를 했었고, 올해는 사심위원으로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혼자서는 상상을 많이 하며 읽게 되었는데, 이렇게 직접 작가분들 만나서 듣고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어 좋았어요. 동료로서의 감각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홍도
작년 수다회가 끝나고도 정서적인 여운이 꽤 오래 갔었어요. 이런 자리가 드물다 보니… 더 많아지면 좋을 텐데요. 올해 수다회도 오늘 이후 많이 많이 생각하게 될 것 같습니다. 좋은 자리 만들어주셔서 다들 감사합니다.

[사진: 예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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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서아

전서아
연극 <이사공 이사오(240 245)>, <커튼>, <오르막길의 평화맨션> 등을 썼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쓸 수 있을지, 가만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jeonseo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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