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극작가들이 직접 꾸리는 코너로 희곡 읽기와 쓰기의 즐거움을 나눕니다.

허리 디스크가 낳은 이야기가 이야기를 한다. 자기만족충만

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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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희곡]코너는 ‘다른 손(hands/guests)’, ‘다시 쓰기’, ‘자기만족충만’ 세 가지 주제로 진행됩니다.

‘자기만족충만’은 작가 스스로가 추구하는 사유 방식, 세계관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입니다. 만족스럽다고 느끼는 지점들을 충만하다고 느낄 때까지 끈질기게 탐구합니다. 오랫동안 고민해온 주제와 형식을 작품을 통해 관철시키는 작가중심적 작품들을 만납니다.
등장인물
여1
호탕하고 또라이 같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바보 같다.
여2
여1의 소모적 기능, 그 기능을 넘어서는 인간.
남1
소심하고, 호불호가 심하고 이야기라면 다 좋아한다.
남2
남1의 소모적 기능, 그 기능을 넘어서는 인간.

무대 한쪽에 시소와 흙이 있다. 무대 중앙에 원고지 뭉치를 든 남1이 서 있다. 역시 원고지 뭉치를 든 여1, 뒤를 돌며 인사하고 걸어오다가 그런 남1을 못 보고 부딪힌다. 남1의 손에 든 원고지 뭉치가 떨어진다. 허리를 숙여 원고지 뭉치를 들려는 여1, 허리가 숙여지지 않는다.

여1
끄악, 전 못해요.
남1
왜 이래요?
여1
저 엄청난 사치를 부렸거든요? 올해 초에.
남1
(떨어진 원고지를 주우며) 올해 초라뇨? 아직 1월이잖아요? 그리고 무슨 사치요?
여1
허리 디스크로 병원에 입원했어요. 엄청난 사치죠.
남1
아프면 아픈 거지. 무슨 사치에요.
여1
아프고 나니까 늙어버렸어요, 순간에 확. 누가 돈을 내고 늙음을 사냐고요. 그러니까 엄청난 사치죠. 엄청난 사치.
남1
아, 그만 해요. 벌써 그 말만 3번째라고요.
여1
역시 민첩하네요.
남1
네?
여1
빠르다고요.
남1
그러니까… 예리하다고요? 그 말이죠? 지금?
여1
오… 오! 맞아요.
남1
(방백) 대체 저런 어휘 실력으로 어떻게 글을 쓸 생각을 했을까요?
여1
얼른 가자고요, 선생님이 기다리세요. 오늘까지 원고 제출이잖아요.
핸드폰 진동음 -

여1, 남1 동시에 핸드폰을 확인한다.
남1
(탄식하며) 아,
여1
(웃으며) 새 된 거죠, 우리 지금?
남1
그렇죠, 뭐… 낙동강에 오리알쯤?
여1
(장갑 낀 손을 호호 불며) 밥 먹었어요?
남1
예, 먹고 왔고요. 안 먹고 와도 먹고 왔어요.
여1
(비웃으며) 낄낄. 깔깔.
남1
(방백) 대체 장갑을 낀 손을 왜 호호 부는지, 그리고 그냥 웃으면 될 것이지 이상한 의성어나 의태어를 왜 일부러 소리 내어 발음하는지 전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다니까요…
여1의 웃음소리가 공간 전체에 울려 퍼진다. 점점 커지다가 이내 공간 너머로 멀리 사라진다.

남1, 귀를 막고 있다.
여1
(남1의 얼굴 옆으로 가까이 붙어서) 뭐해요? 미친 건가?
남1
(황급하게 귀에서 손을 떼며) 누가 할 소릴!
여1
뭐 방에 박혀 글만 쓰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여1, 두리번거리다가 뒤에 놀이터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달려가서 시소에 앉는다. 여1, 혼자 열심히 시소를 타보지만 시소는 한쪽 방향에만 쏠려있을 뿐이다. 여1, 남1을 본다.
여1
(시소 손잡이를 잡은 채로) 거, 시간도 붕 떴는데 이거나 탑시다!
남1
애예요?
여1
네, 저는 아직 앤데요.
남1
(팔짱을 끼고 뒤돌아선다) 됐어요, 전 안 타요.
여1
오, 어른이네. 부럽다. 어른이면 글 잘 쓰나?
남1
그건 무슨 개떡 같은 소리예요?
여1
낄낄, 난 애라서 글을 잘 써요.
남1
의외로 자신감 있는 편?
여1
그렇죠, 자신감은 있는 타입. 근거는 없고. 허공에 메아리만 울린 달까 뭐.
남1
올린 글 봤어요.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여1을 보며 말이 빨라진다) 재밌던데요? 허리 디스크 자체로도 재밌는데 그로 인해 가족의 소통의 부재가 드러나면서 (사이) 어? 근데 허리 디스크 진짜 걸렸다고 했… 그럼 가족 이야기도 진짜예요?
여1
에이, 뭔 소리예요! 당연히 허구죠.
남1
아니, 허리 디스크로 입원했다면서요. 올 초에! 그럼 허구를 가장한 실제지!
여1
내 진짜 이야긴 허리 디스크 그거 하나고 나머진 죄다 상상인데요?
남1
그래도! 아니 근데 뭐야 글이 좀… 아, 이건 이따 피드백 시간에 할 말이라
여1
좀… 가려져 있죠?
남1
(조심스럽게 엄지와 검지로 조금이라는 표시를 하며) … 좀? 정말 조금?
여1
그렇게 소심해서야!
남1
(엄지와 검지 사이 간격을 벌리면서) 조금 많이?
여1
사실 보수적이고 은근히 폐쇄적인 데다가 우아함을 강조하는 선생의 입맛에 맞게 굴려 보느라고 진짜 이야기는 넣지도 못했어요.
남1
(아쉬워하며) 진짜 이야기가 따로 있어요? (표정을 바뀌며 뒤돌아선다) 아니야, 아니야. 내 코가 석 자지.
여1
말해줄까요?
남1
(뒤돌며) 진짜 이야기요?
여1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5시간 비고 (손목시계를 보며) 우리 어디 갈 돈도 없는데 이야기나 늘어놓죠. 주 전공이니까.
여1, 시소 한쪽을 턱으로 가리킨다. 남1, 머뭇거린다.
여1
에헤이, 좋은 소스가 될 거예요, 장담해요. 이야기는 이야기를 부르니까.
남1
그게 목적은 아니에요.
남1, 시소로 가서 앉는다. 시소의 무게중심이 바뀌고 여1이 위로 뜬다.
남1
진짜 이야기가 궁금하니까, 독자로서.
여1
오~
여1, 잠시 멈춘다.
남1
(방백) 이 말은 진심이었어요. 이 친군 좋은 이야기꾼이거든요.
여1
그러니까요,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냐면요. (관객석을 향해서 방백) 잘 들으세요, 여러분도 이제부터 펼쳐질 어마어마한 이야기의 시작을 들으셔야
남1
(시소에서 내리며) 아니, 뭐야? 방백을 할 수 있었어?
여1
그럼 여기에 배우가 너뿐이야? 이 친군 좋은 이야기꾼이거든요. 다 들었거든? 어찌나 웃기던지. 아니 근데 니가 말하는 게 나한테 들리고 내 말도 너한테 들리면 뭐야? 방백이 아닌 거잖아. 이게 뭐야.
남1
그니까 이젠 듣지 마.
여1
아! 하긴 안 들으면 되지. (사이) 근데 너 왜 반말이야?
남1
반말 너한테 한 거 아니야!
여1
(고개를 끄덕이며) 그니까. (관객석을 가리키며) 왜 초면에 반말이냐고.
남1, 잠시 관객들을 얼빠진 채로 쳐다보다가
남1
(객석을 향해 소리친다) 그건 죄송해!
여1
“죄송해요”도 아니고 이게 뭐야.
남1
(객석을 향해 소리치며 허리를 숙이고 사죄한다) 죄송해요! (여1에게) 그래서 허리가 어쨌다고, 얼른 말해.
여1
오케이. 내가 환자복을 입고 병원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면서 거울을 보고 있었어.
남1
그니까 니가… 아니면 주인공이?
여1
(웃으며) 비밀.
남1, 빠르게 시소에 탄다. 남1이 내려가고 여1이 올라가자 여1이 움직여 다시 시소의 무게중심이 여1에게 머무르게 한다.
여1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화장실 창문 옆으로 희미하게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는데 춥더라고.
남1
배경이 겨울인가?
여1
어. 1월 1일 새해였으니까 한창이지. 그때 내가 늙었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남1
갑자기? 개연성 없어.
여1
야, 그렇게 접근하면 이 세상 모든 이야기들은 그 개연성이나 설명하자고 모든 지면과 스크린과 상상과 삶 속의 시간들을 낭비해야 돼.
남1
그건 맞아, 다그치듯 말하진 말아 줄래? 좀 무서워. 그래도 개연성은 무시할 수 없어.
여1
작가 나부랭이.
남1
사돈 남 말.
여1
무지개 반사.
남1
황금열쇠.
여1
(남2를 째려보며) 하여간 들어봐. 아프기 전으로 돌아갈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냥 세상 모든 걸 사랑하고 싶은 거야. 내일도. 오지 않은 미래까지 그냥 마냥 기다리고 싶어지더라.
남1
뭔가 슬퍼지네. 신판가.
여1
(조소하며) 바로 비틀어주지.
남1
미친.
여1
그때 딱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섹.스.
남1, 펄쩍 뛴다. 무게중심이 남자에게로 바뀐다.
남1
(주변을 둘러보며) 뭐? 선생이 안 좋아할 만하네.
여1, 고개를 끄덕인다.
남1
저속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섹스 뭐.
여1, 펄쩍 뛴다. 무게중심이 여자에게로 바뀐다.
여1
이렇게 허리가 아파서 앞으로 평생토록 격렬한 섹스는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도 살면서 섹스를 어떻게 안 하겠어? 그럼 위로 갈까, 아래로 갈까, 어디가 덜 아플까 그런 생각이 든 거지. 그래도 이왕 하는 거 좋긴 좋아야 하니까?
남1
미친! 미친! 너 진짜 미친 사람이구나?
남1, 펄쩍 뛴다. 무게중심이 남1에게로 바뀌려는데 여1, 한 번 더 펄쩍 뛰고 결국 무게중심은 여1에게로 쏠린다.
여1
격한 관객일세.
남1
(관심을 거두는 척하며) 뭐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긴 하네.
여1
(조소하며) 그래?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인데?
남1
(방백) 하여간 쟤는 저 웃음. 저게 포인트였어요. 저 웃음만 나오면 저는 그 이야기에 빨려들 수밖에 없었거든요. 여러분 이건 정말 비밀이에요. (여1을 가리키며) 얘한테만요.
여1
그래서 내가 상상을 해봤지.
남1
상상은 이야기의 좋은 출발점이지. 이제부터가 시작이구나?
여1
응. 허리 디스크로부터 끄집어낸 허구의 이야기. (사이) 이 이야기를 하려면 도구가 필요해. 우리의 상상을 부풀려줄.
여1, 시소에서 내려 흙을 한 움큼 집어 든다. 그리고 남1을 쳐다본다. 남1에게 무게중심이 쏠린다.
남1
엥?
여1
거, 참. 센스!
남1
어? 진짜 모르겠어.
여1
갈비뼈! 니 갈비뼈를 꺼내!
남1
어? 이걸 어떻게 꺼내?
여1
이건 상상이야!
남1
어?
여1
아직도 이해를 못 했어? 그럼 내가 할게.
여1, 남자의 손에 흙을 한 움큼 쥐여준다. 그리고 여1, 남1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갈비뼈를 꺼낸다. 흙이 남1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여1
(갈비뼈를 손에 들고) 자, 이제 태초로 돌아가는 거야.
남1
아니 근데 이거를
여1
하나!
남1
(마지못해) 둘…
여1
(갈비뼈를 집어던지며) 셋!
동시에 여2 등장. 살구색 옷을 입고 있다.
여1
엥? 발가벗어야 하는데.
여1, 다시 남1의 옷 속에 손을 넣으려고 하는데 남1, 다급하게 시소에서 일어나 뛰어간다.
여1
왜 이래, 이리 와봐.
남1
새로 만들게? 그런다고 발가벗고 나오겠냐. 그리고 그럼 배우가 진짜 벗고 나오냐? 미쳤다고? (여2를 향해 고갯짓을 하며) 배우가 원했어? 서로 얘기가 된 거야?
여1
(남1을 신경질적으로 쳐다보며) 야, 지금 이 장면에서 배우는 우리야.
남1
우리? 그럼 이분은 그냥 오로지 니 상상만을 위해서 등장하신 거야? 너무 등장인물을 소모적으로 쓰는 거 아니야?
여1
소모적으로 쓰지 않기 위해 한번 대놓고 소모적인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는 게 어떨까 생각한 거지.
남1, 여1을 빤히 바라본다.
남1
보자, 그게 되나.
여1
(방백) 여러분, 이건 태초의 이야기라고요. 그러니까 얘는 발가벗어야 해요!
여2, 귀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파는 시늉을 하며 여1을 본다.
여1
엥? 자아가 생겨버렸네. 안되겠어. 아무래도 다시 만들어야 할까 봐.
여1, 남1의 옷 속에 손을 집어넣어 갈비뼈를 하나 더 꺼내 던지려한다. 그때, 남1과 여2 동시에 외친다.
남1
(여1의 손에 든 갈비뼈를 뺏어 살포시 무대 뒤에 내려놓으며) 야! 이미 등장했잖아!
여2
미친! 이미 나왔는데! 탄생에 번복은 없어!
여1
오… 말투가 나랑 좀 비슷한데?
남1
당연하지. 니 상상인데.
여2
난 상상이 아닌데?
남1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여2를 보며) 오.
여1
저 미친.
여1, 여2에게 달려들려 한다.
남1
(여1을 막아서며) 야, 야, 야! 지 상상이랑 싸우는 애가 어디 있냐!
여1, 잠시 멈춰서 골똘히 생각한다.
여1
근데… 남잔 왜 없어? (남1의 손목을 잡아채 훑어보며) 너 아까 그 흙 어쨌어!
남1
아까 분명… 나도 던졌는데? 흙이 다 빠져나갔나 보네.
여1 한심하게 남1을 쳐다본다. 여2도 남1을 쳐다본다.
여1
뭐야, 이게. 이러면 이야기 전개를 할 수가 없잖아. 빨리
여2, 한심하게 여1을 바라보고는 남1과 여1에게 다가온다.
여2
자급자족.
여2가 흙을 한 줌 잡고 던진다.

지잉 – 파열음. 뭔가 튕겨 나오는 소리.

여2, 놀라며 뒤로 물러선다.
여1
(여2를 원래 있던 자리로 밀며) 에헤이, 너는 안 되지. 우리만 가능하지.
여1, 남1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낸다.
여1
얼른.
남1
야, 인간이 만들어졌을 땐 흙만 필요했던 게 아니야.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알아?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힘. 제일 중요한 게 없잖아.
여1, 2가 남1을 빤히 본다.
여1
여기선 우리가 하나님이야.
남1
아. 여기선 되는구나.
남1, 흙 한 줌을 집어 들고 바로 던진다.

남2 등장. 그 역시 살구색 옷을 입고 있다. 여2가 천천히 걸어가 남2 옆에 서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본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정자세로 서는 여2와 남2.
여1
(손뼉을 친다) 좋아!
여2, 남2, 남1
이제 제발 시작해.
여1
그래! 그러니까 허리 디스크가 걸린 내가
여1, 남1에게 손짓을 하고 둘은 시소로 가서 앉는다. 여1이 앉고 남1이 앉아 무게중심이 남1에게 쏠린다. 여2가 바닥에 눕고 남2가 그 위에 앉으려고 하는데,
여1
바닥에 깔릴 수는 없겠는 거야.
여2와 남2가 자리를 바꾼다.
남1
오… 근데 어떤 게 더 잘 느끼는데?
여1
(눈을 감고) 기다려봐. 그 질문을 지금 나도 나한테 하고 있으니까… 만약 내가 올라타면… (남1에게 위로 올리라는 듯 손짓하며)
남1이 펄쩍 뛰어 시소의 무게중심이 남1에게로 바뀐다. 여2와 남2, 다시 자리를 바꾼다.
남1
(일어서며) 그냥 쟤네한테 이걸 타라고 할까?
여1
야! 무슨 소리야!
남1
없는 걸 만들어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너는. 쟤네한테 이거 타라고 하자. 우리는 말만 하면 되는데.
여1
우리가 현실이야.
남1, 앉는다. 무게중심이 남1에게 쏠린다.
여1
어쨌든 바닥에 있으면서 반동을 느끼면 더 허리가 아프니까 위에 있자 했지. 올라타기로 한 거지.
남1
남자도 허리 디스크가 있으면 어떻게 해?
여1
그건… 뭐 애무만 하든가 플라토닉러브를…. (남2를 빤히 보며) 그 시점은 니가 써 봐.
남1
아.
여1
그래, 왜 냉정과 열정 사이처럼. 난 에쿠니 가오리, 넌 츠지 히토나리.
남1
야, 거긴 이야기 베이스가 같잖아. 남자가 허리 디스크가 있는 거면 완전 다른 얘기지.
여1
뭐 어때, 비트는 거지. 니가 열정을 맡아. 내가 냉정을 맡을게.
남1
그건 조금 비튼 게 아니야.
여1
안 내켜? 그래. 그럼 니가 냉정을 맡아 내가 열정을 맡을게.
남1
그게 아니라! 본질은 비트는 데 있는 게 아니라고!
여2, 남2 자세를 풀고 정자세로 서 있다.
여2
본질을 비틀어야 시간이 바뀌지.
남2
그럼. 본질을 비틀어야 빠르고 효율적이게 변하지.
여2, 남2
그리고 그래서 지금 뭐 어떻게 하라고?
여1, 조용히 시소로 가서 발이 땅에 닿은 채 앉는다. 남1, 조용히 시소로 가서 발이 땅에 닿은 채 앉는다. 여1, 발을 떼고 무게중심이 남1 쪽으로 쏠린다.
여1
올라타기로 한 거지.
여2, 한숨을 쉬며 올라탈 준비를 한다. 남2, 누워서 무릎을 모아 상체로 끌어온다. 그 위에 여2가 무릎을 꿇은 채 올라선다.
여1
근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여2, 남2, 남1
어떤 생각?
여1
여자는 배, 남자는 바다. 그런 거.
여2, 올라탄 곳에서 내려서 여1을 째려본다.
남1
그럴 수 있…지.
남2
(정자세로 돌아오며) 뭐가 그럴 수 있지야?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구먼.
남1
근데 그 반대 아닌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이거 아니야?
순간 무대 위에 정적이 흐른다. 여2, 남2, 남1 동시에 여1만 보고 있다.
여1
(공간이 떠나갈 듯 소리친다) 아, 진짜!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배가 뭐고 바다가 뭐고 뭐가 더 위대하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고!
남1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했어. 너 혼자 그렇게 생각한 거야. 이건 니 상상이잖아.
여1
당연히 그렇겠지! 자, 다시 움직여.
여2와 남2, 다시 아까 했던 자세로 돌아간다.
여1
바다가 있어.
여2
바다가 있어.
여1과 여2, 동시에 일어서 옆으로 살짝 비켜선다.
남1
바다가 있어.
남2
바다가 있어.
남1은 시소를 왔다갔다 거리고 남2는 엎드려 누운 채로 몸 전체를 파도 타듯 움직인다.
여1
바다는 요동쳐.
여2
바다는 잔잔해.
여1
(여2에게) 야!
남1은 시소를 멈추고 남2는 계속 엎드려 누운 채로 파도 타듯 움직이고 있다.
남1
바다가 잔잔해?
남2
바다는 요동쳐.
여1
스톱! 내 말 들어! 너! (여2를 가리키며) 멋대로 말하지 마! (남2를 가리키며) 그래, 너! 아주 잘하고 있어. 바다가 요동쳐. 그리고 아주 고요해.
남1
(손가락을 입으로 갖다 대며) 쉿!
모두 고요해진다.
여1
바다는 아주 외로웠어.
여2
바다가 아주 외롭다.
여1
왜냐면 지금까지 찾아온 손님이 아무도 없었거든.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여2
(남2에게 손짓하며) 적당히 움직여.
여1
야!
여2
아직 안 끝났어? 난 또 끝난 줄 알았지.
여1
(여2를 째려보며) 아주아주 외로웠어. 그때 배가 나타난 거야.
남1
배? 오. 그러면 이제
여2, 엎드려 누워있는 남2의 위로 엎드려 반원을 그리듯 몸을 둥글게 말아 눕는다.
여1
그러자 물결이 생겨났어.
남1
물결? 아… 내가 가서 물결이 돼야 되나? (움직인다)
여1
아니! 너 가만히 있어. 쟤네 봐. 이미 물결이 생겼잖아.
남1이 여2와 남2를 쳐다보자 둘은 그 자세 그대로 눈을 맞춘다.
여1
그 다음부터 바다와 배는 외롭지 않았대.
남1
최초의 물결.
여1
응. 최초의 물결이자 태초의 물결 그리고 사랑.
남1
오… 사랑까지?
여1
아, 근데 생각해 보니까
남1
생각해 보니까 뭐?
여1
(손뼉을 치며) 굳이 남자 여자가 아니어도 되겠네!
여2와 남2, 펄쩍 뛰어 다시 무대 위에 똑같은 자세로 선다.
여2, 남2
뭐야?
여1
어머, 미안. 근데 그렇잖아. 바다니 배니 누가 하든 뭐야. 그리고 너네도 뭐야.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어.
여2, 남2
아니 근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여1, 여2와 남2에게 다가가 손을 맞잡게 하고 그들을 한 방향으로 돌린다.
여1
인간. 사람이지 뭐, 그뿐. 이야기 끝.
여2, 남2 퇴장한다.
사이
남1
아니 근데 이 귀한 이야기들을 내가 공짜로 들어도 되나? 뭐라도 사줘? 밥이라도 먹으러 갈래, 지금이라도? (남자 시소에서 일어난다)
여1
(남자를 다시 앉히며) 에이. 그냥 퉁 쳐.
남1
뭐로 퉁 쳐?
여1
들어줬잖아.
남1
에이, 그건…
여1
역시. 혼자라는 건 없어.
남1
뭐가 없어. 글 쓸 때 혼자잖아.
여1
(웃으며) 알지, 알지. 근데 결국 이야기라는 건 이렇게 들려주게 되어 있어. 누군가에게. 그니까 혼자 써도 혼자인 이야기는 아니지. 혼자일 수 없는 이야기의 운명을 필연적으로 타고난달까? 그 이야기가 만들어지면서부터 말이야. 태초부터. 또 듣는 사람, 같이 쓰는 사람을 생각하면 (남자를 본다)
남1
든든하지, 같이 쓰는 거. 그런 거 있지.
여1
든든하다가도 외로워 문득. 결국 타인이 필요하다는 게. 내가 세상을 오로지 관찰하기만 할 순 없다는 게. 나도 이 세상에 속해있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게. 문득 너무 외로워져.
남1, 시소에서 내려와 여1의 코앞까지 달려와 선다.
남1
너 이거 나한테 팔아. 지금 니가 혼잣말처럼 한 이 모든 이야기까지.
여1
뭐? (무대 위의 시소를 밀어 없앤다) 싫어.
남1
아, 팔아. 제발 팔아라. 나 이 이야기 마음에 들어.
여1
이게 어디가 마음에 들어.
남1
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허구의 이야기건, 현실이건 뭐건 이런 이야기는 사라지면 안 돼.
여1
넌 이 이야기가 무슨 얘기인 것 같은데?
남1
이건 그러니까 탄생! 그리고 사랑에 대한 엄청난
여1
(고개를 저으며) 아니, 틀렸어.
남1
그럼 무슨 이야긴데?
여1
묻힐 이야기.
남1
뭐?
여1
다신 말하지 않을 거니까.
남1
나한테 말했잖아, 지금.
여1
생각한 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지. 재미없잖아.
남1
나 같으면 이걸 선생님한테 가지고 가겠다.
여1
상상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나는 그걸 모르겠어. 그래서 숨긴 거지, 뭐. 비겁한 거지. 선생님한테 혼나기 싫었거든. 적당한 안정성을 추구하는 거야. 내 나름대로.
남1
너도 너구나. 나도 나고. (허공을 쳐다보며) 난 가끔 이 모든 이야기들이 다 말장난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여1
맞아, 나도 그런 생각 한 적 있어. 상상에선 난 너무 완전해. 그래서 자유롭고. 현실의 난 불완전해서 덜 자유롭나 봐.
남1
넌 계속 써야겠다.
여1
그런 소리 하지도 마. 그랬다간 나보다 내 이야기가 더 위대해질지도 모르잖아. 난 그건 싫어.
남1
나한텐 왜 이야기했어? 내가 들은 순간 이미 이야기는 여기 있어 버리는 건데.
여1
내가 널 선택했거든. 이 이야기의 시작이자 마지막 관객으로. 니가 행운아인 걸로 하자. 그리고 이 순간은 잊어버리는 거야. 이제 이 이야기는 영원히 우리 안에 묻혀. 우리가 늘 그래왔듯이.
암전
남1에게 핀 조명
남1
이 이야기는 이미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바로 지금. 그러니까 (관객석을 가리키며) 덕분에. 여러분이 바로 행운아죠. 이야기꾼의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 이야기를 묻으려 해도 묻을 수 없는 비운 같은 게 있는 거 아니겠어요?
남1, 퇴장하려다가 무대 위에 떨어져 있는 갈비뼈 하나를 가지고 다시 핀 조명 안으로 들어간다.
남1
그리고 이야기가 탄생하던 그 순간에 저만 있었던 건 아니더라고요. (갈비뼈를 얼굴 앞으로 들며) 얘가 있었으니까. 우린 이야기의 후손이니까요.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준 그대들의 머릿속에서 영원히 재생될 이야기. (아주 느리게) 이로써 ‘결국 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우리는 행복하게 오래 오래 살았습니다’라는 이야기.
막.

채윤

채윤
글을 쓰고 연기하면서 제가 사랑하는 것들을 평생토록 찾고 모아 보려고요. 그래서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사랑하기만해도 이번 생은 너무 모자라요. 사랑하는 것들을 미워하지 않고 계속 사랑하기 위해서 이번 생을 다 쓸 예정입니다. 우리 이 글로 잠시나마 연결된다면, 당신의 길과 내 길 사이 어딘가 골목에서 만납시다.
cy9232@naver.com / 인스타그램 @geulinght_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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