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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쓰기, 희곡 읽기, 다른 손으로

‘다른 손(hands/guests)’ 희곡 결산 수다회 (3)

김연재

제214호

2022.02.24

지난 몇 개월간 [희곡] 코너에서는 ‘다른 손(hands/guests)’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들이 독자를 만났습니다. 희곡 릴레이를 마치면서 극작가들이 서로의 작품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일시: 2021년 12월 21일
장소: 서울연극센터 아카데미룸
진행: 김연재(극작가), 한윤미(창작자)
참여: 곽지현(극작가), 김동국(극작가), 신지원(극작가), 최세리(극작가), 허선혜(극작가), 구지수(극작가)

최세리 <마지막 세헤라자데>
https://www.sfac.or.kr/theater/WZ020700/webzine_view.do?wtIdx=12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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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리
김연재
사전에 공유한 구글 공유문서에 누군가 이런 댓글을 달았다. “희곡을 끝까지 다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각 인물들의 대사를 다른 의미로 다시 읽어보게 하는 힘이 있는 희곡이었다”.
허선혜
물의 아스라한 감각, 축축한 이미지들이 그려졌다. 희곡에 “이름만 받고 홀랑 사라져버리고 / 나한테 남은 건 이제 아무것도 없는데”라는 대사가 있는데, 자기 존재감을 상실한 ‘세헤라’의 아픔이 느껴졌다.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펄펄 끓는 호수에서 마녀들이 혼잣말처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김연재
텍스트 표기를 다양하게 변주하고 있다. 띄어쓰기를 하지 않거나 행을 구분하는 식의. 그래서 더 마녀들의 웅얼거림 같았다. 우리가 속한 질서 있는 세계의 언어가 아닌 말하기, 이름 없는 얼굴들의 말하기.
곽지현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다. “(생각한다) 난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지 /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지 / […] / 걔네한테 이름을 지어주지만 않았어도 /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데”라는 대사가 나온다. 세헤라는 무언가를 이미 규정지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때문에 맨 마지막에 ‘얼굴들’이 “(노래한다) 이야기에 이야기를 뒤섞어서 이야기가 아니게 만들자 […] 아무도 이해 못 할 이야기를 만들자”의 부분에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방식으로 규정된 것들을 해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이야기를 쓸 수 있지?
구지수
세헤라의 이야기는 “엄마와 할머니와 할머니의 할머니들로부터 세헤라가 전해 받은” 것이다. 전통적인 가족상 안에서 여자들이 가지고 내려오던 슬픈 서사들을 “마지막 세헤라자데”로 종료하고 새로운 희망의 서사를 만들어나가는 여성들을 노래하는 희곡 같다. 이름 없이 살아가는 여성들은 서로에게 이름을 붙여주는데, 이 작품에서 이름을 붙여준다는 건 단순한 호명을 넘어서 연대가 된다.
한윤미
더 이상 이야기를 지어내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고 편한 안식을 얻은 것 같다.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게 이름을 다 붙여주면, 세헤라 본인은 이제 대대로 이어져 오는 이야기하는 노동을 멈출 수 있겠다. 말, 언어에 대한 이야기라서 그런지 특히 같이 소리 내 읽어보고 싶은 희곡이다.
김연재
여성영화제, 페미니즘연극제에서 같이 읽으면 좋겠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생각이 난다.

김동국 <리어왕 고쳐쓰기>
https://www.sfac.or.kr/theater/WZ020700/webzine_view.do?wtIdx=12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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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국
김연재
<마지막 세헤라자데>가 이름 없는 존재들에게 이름 붙여주고 있다면 <리어왕 고쳐쓰기>는 권위적인 이름을 해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현장 감상에서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한윤미
현장 감상에서 독자들의 반응이 나뉘었다. 자신의 현실과 딱 붙어 있어서 희곡을 읽고 용기를 얻었다는 평이 있는 반면, 다른 작품들에는 아무런 평도 남기지 않고 딱 이 작품에만 부정적인 평을 쓴 독자도 있었다. 처음에 이 희곡이 묘사하고 있는 장면들을 읽고, 이런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장 감상에서의 반응을 접한 뒤에는 아직도 어떤 현장은 여전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각자의 창작 환경의 격차가 벌어져 있다는 사실을 이 희곡을 읽으면서. 그리고 이 희곡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구지수
고전 속 혐오와 불평등, 그것을 옹호하는 기성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잘 느껴졌다. 모두가 사랑하기 때문에 고전이 된 것이지 않나. 그래서 그것을 비판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고전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하지만 다음 단계로 가려면 고전을 리라이팅 해야 한다. 이 작품은 좋다, 아니다로 평할 것이 아니다. 의도 자체로 유의미하다.
곽지현
동의한다. 희곡의 시점이 ‘미투운동 이전’이다. 이 희곡은 <리어왕>을 리라이팅한 버전이 아니라 리라이팅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래서 미투운동 이후인 지금은 완전히 리라이팅 될 수 있을 것이다. ‘제자’가 고쳐 쓴 버전에서 처음에 선생님이 등장한 뒤 천둥과 폭풍이 치고 무대감독이 등장하는 게 너무 재미있다. 고쳐 쓴 <리어왕> 희곡도 보고 싶다.
구지수
어떤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 운동의 이전 이후를 어떻게 살아가느냐도 중요하지만 일어났던 운동을 기록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김연재
사전에 공유한 구글 문서에 이런 댓글이 있었다. “우리 주제가 비인간,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고전의 휴먼을 예로 들며 그 주제에 대해 시의적으로 돌아보았다”.
최세리
작품 속에서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다. “개인의 사적인 부분을 작품에 가져오는 건 너무 어리지 않나?” 나는 희곡을 쓰면서 개인적이고 사적인 이야기가 말해졌을 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했다. 발화된 사적 이야기는 더 넓은 이야기로 뻗어가는 힘이 생긴다. 완성도가 있다고 평가받으며 오랫동안 읽혀온 희곡이 다시 쓰이고,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평가받는 작품들이 더 많이 공연되면 좋겠다.
김연재
완성도의 개념을 재지정할 필요가 있다. 미투 이후 영화계에서도 사적 다큐라고 불리는 영화들이 많이 나왔다. 여성 감독이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그런데 그들의 작품에 사적 다큐라는 명칭이 적합한가. 일련의 영화 속 이야기들은 사적 영역에만 머물지 않으며 보편의 자리를 재지정하고 있다.
한윤미
이 희곡 속 인물들의 성별이 정해져 있는데, 성별이 바뀐다면 어떻게 읽힐지 궁금하다. 우리가 전형적으로 생각하는 나이 많고 권위적인 선배의 성별이 남성이 아니라면? 20대인 제자의 젠더가 다르다면? 그렇다면 이 작품을 받아들이는 느낌이 더 복잡해질 것 같다.
곽지현
희곡 속에 학습, 답습이라는 말이 언급된다. 고등학교 때 언어영역 공부할 때 보면, 고전을 무조건 치켜세우면서 고전이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학생들은 교과서의 그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당연하게 읽어왔던 것들을 의심할 수 있었다.
허선혜
<유리동물원 부수기>라는 희곡이 있다. 장애의 관점에서 <유리동물원> 속 잘못된 것들을 지적하고 해체하며 다시 쓰기를 반복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읽고 이 작품이 어떻게 희곡이냐, 혹은 희곡이 아니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것도 편견 같다. 희곡에 뭐가 있어야 하나. <리어왕 고쳐쓰기>에서 제자가 “이 비극을 읽고 학습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책임질 수 있으세요?”라고 한다. 책임이라는 말이 찔렸다.
신지원
최근 공연된 <리어왕> 포스터만 봐도 권위의 형상화다. 남성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라고 모든 것을 동원해 알려주고 있다. 명작, 고전이란 무엇일까. 한번은 리어의 독백을 여성 배우가 읽은 적이 있었다. 여성 신체를 비하하는 말이 너무 많더라. 우리가 고전, 명작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작품들에서 혐오의 말을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말을 단순히 여성이 읽는다고 해서 혐오와 불평등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연기만 성별 바꿔서 하고 작품 내용을 다시 쓰지 않아서 그 안에 차별적 요소들이 잔재하는 작품들도 많은데, 이 작품에서는 끝까지 분투하는 언어들이 있어 반가웠다.
한윤미
동의한다. 젠더프리 캐스팅, 잰더 밴딩 등도 단순히 성별만 바꿔서 연기하는 문제가 아니지 않나. 그런 장치가 작품 내·외부적으로 어떤 효과를 발생시키는지, 원래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고민이 필요하다.

신지원(신난다) <Hom(e)>
https://www.sfac.or.kr/theater/WZ020700/webzine_view.do?wtIdx=12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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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원
최세리
어둠은 객석에 있고 소녀는 사다리에 앉아서 어둠을 향해서 소리친다. 무대가 그려져서 재미있었다. 마지막에 소녀는 좀비가 다시 돌아온다면 “그러면 나도 어쩔 수가 없어”라고 말한다. 좀비는 죽지 않고 계속 되돌아왔을 텐데 그럴 때마다 어쩔 수 없다고 말하게 된 소녀의 시간을 생각했다.
구지수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실체가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두려움의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두려움을 오랫동안 동반하고 살아가면 두려움의 대상이 형상을 띠고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신선하고 위트 있게 그리면서도 그로테스크한 면을 놓치지 않아서 좋았다.
김연재
무시무시할 거라고 생각해온 것이 알고 보면 나보다 약하고 병든 존재일 때가 있다. 좀비는 계속 죄송하다고 빌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나약하면서 끈질긴 것이 두려움의 한 성질인 것 같다. 이렇게 스펙터클하지 않은 좀비물이라니. 그리고 소문자 e가 괄호 속에 있는 제목 표기를 보면서 조르주 페렉의 『실종』이 생각났다. 불어에서는 여성명사 뒤에 e가 붙는데 페렉은 이 책에서 e가 들어가지 않은 단어들만 사용했다고 한다. 전쟁 후에 실종되고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아직 번역되어 있지 않다.
한윤미
이 작품이 공연된다면, 개인적으로는 트리거워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희곡 게시물 위에도 표기된 것으로 안다. 연출 방식에 따라 색깔이 크게 달라질 것 같은 작품이다.
최세리
인물의 명칭이 재미있다. ‘소녀’는 서른 살이고 ‘좀비’는 육십 대 남성이다. 한 사람을 이루는 정체성 중 하나를 극대화해 표현한 것 같다. 좀비는 <햄릿>이나 입센의 <유령>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과거의 무언가가 회귀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이들과 궤를 같이 한다. <Hom(e)>의 좀비 또한 소녀가 죽이고 싶어 하지만 죽지 않는다. 계속 회귀한다.

나수민 <공구공삼 꿈>
https://www.sfac.or.kr/theater/WZ020700/webzine_view.do?wtIdx=12601

구지수
무의미하고 텅 빈 가족 이데올로기를 유지하기 위해 희생을 강요받고 집을 떠나기를 강요받는 딸의 모습이 그려졌다. ‘나’에게는 집과 가족이 전혀 안정적이거나 편안하지 않다. 누구의 곁에도 있을 수 없고 아무도 ‘나’를 원치 않는다. 그래서 ‘나’는 계속 맴돈다. 텍스트로만 읽었을 때도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있었는데, 무대 위에서는 더 큰 힘이 있을 것 같다. 입모양으로 말하거나 반복적인 대사들이 매력적이다. 너무 좋았다.
김동국
이십 대 여성이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가로막힌다. 이 모습이 답답해서, 벗어나면 안 되나, 생각했다. 그런데 희곡이 변주되면서 ‘나’는 이렇게 살아가겠구나, 성장하겠구나, 하는 체념의 정서가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점이 좋았다.
최세리
9월 3일에 작가님께서 꾸신 꿈일까? 바다 이야기가 나온다. 긴 잠을 자고 먼 훗날 깨어난다면 해수면이 많이 올라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누군가“이젠 바다가 됐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기후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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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재
김연재
‘이모’라는 가족구성원이 이 세계에 잘 어울린다. 이모는 가까운 외부인이고, 이 세계는 현실과 꿈의 경계에 있다. <Hom(e)>에서 두려움의 특징이 나약하고 끈질기고 반복적이었던 것처럼, 이 작품을 읽으면서도 두려움의 본질은 끝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것은 평화롭고 안락하고 끝나지 않아서 끔찍한 악몽일까, 생각했다.
허선혜
‘나’와 ‘이모’의 대화에 가족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는 공통 정보가 전무하다. 이를테면 “놀랐지. 나는 몰랐으니까. 나는 이모한테 딸만 있는 줄 알았어”, “언제 생겼는데? 누가 아빠야?”라고 묻는다든가. 입모양으로 얘기하는 것도 무대에서 보면 좋을 것 같다. 부조리하다. 꿈을 주제로 쓰는 작가들의 작품 릴레이 같은 게 있어도 재밌겠다.
김연재
크리스마스의 악몽.
허선혜
악몽회. 내년 크리스마스에 뵙자.
한윤미
올해부터 시작하시는 것으로.
김연재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았다. 빠른 기획 부탁….
곽지현
꿈의 세계가 희곡과 잘 맞닿아 있다. 나는 희곡을 쓸 때 무언가를 해석하고 명명하고 구체화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그래서 꿈에 영감을 받아 희곡을 써본 적이 없는데, 이런 식의 글쓰기가 나에게 무척 매력적이다. 처음에는 이 꿈을 해석하고 싶어서, 영주가 누구일까 생각하며 여러 번 읽었다. ‘나’는 ‘딸’을 영주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모’가 자신을 영주라고 불렀을 때 ‘나’는 영주가 누구냐고 묻는다. 그러니까… 영주는 정말 누구지? 어떤 인물이 실존하는지, 이 공간이 실존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다가 그냥 해석을 그만 두게 되었다. 이 분위기 자체가 매력적이다.
김연재
나는 꿈을 자주 기록한다. 그런데 꿈을 가지고 희곡을 쓰는 것은 쉽지 않더라. 왜냐하면 꿈은 너무 뒤죽박죽이어서 줄글로 기록, 묘사할 수는 있지만 희곡으로 구조화하기 위해서는 꿈과 이별한 뒤 꿈의 뒤죽박죽성을 파괴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구공삼 꿈>은 꿈의 문법을 희곡 구조에 잘 대입한 것 같다. 꿈에서는 내가 중심축에 서 있고 나를 향해 세계가 쏟아진다. 나는 변하지 않고 세계가 돌고 있다.
곽지현
자면서도 글 쓸 생각을 하다니.
김연재
알고 보니 작품 의도가 꿈과 하등 상관없을 수도…
허선혜
실제로 꾼 꿈을 가지고 단막극을 쓴 적이 있는데 거기에도 모래와 바다가 나왔다. 이 희곡을 읽으며 그 작품이 연상됐다. 차를 마시면서 기억을 되살린다는 점에서 프루스트가 떠오른다.
한윤미
이 차는 왜 이렇게 매콤할까.
김연재
이 차의 맛을 느껴보기 위해 까만달(한윤미)님이 매콤한 차를 가져오셨다.
한윤미
비건 차이 티다. 여러 향신료가 들어 있어서 매콤하다. <공구공삼 꿈> 희곡에서 계속 차가 매콤하다는 말을 반복해서 그 차를 마신 이후 등장인물들은 어떻게 될까 궁금했다.

허선혜 <리틀보이>
https://www.sfac.or.kr/theater/WZ020700/webzine_view.do?wtIdx=1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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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선혜
김동국
토양이 오염된 지구의 현 상황이 떠오른다. 인간의 욕망이 초래한 파괴를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사소한 것이라도 어떻게 갚아 나가며 살아야 할까. 희망의 대안을 발견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리틀보이!”를 외치는 인물들처럼 아예 망해버리기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두 곳을 오간다.
구지수
안심하며 읽을 수 없었다. 끊임없이 낯설고 긴장하게 되는 이야기다. 인류의 폭력으로 끔찍하게 망가진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절망과 희망이 같이 있다. 오래전에 초래된 폭력일지라도 그 영향은 지금까지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생명을 죽일 수 있는 기술에 대해 제대로 환기하고 논의할 필요가 있다. 민들레씨들의 절망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우리에게 경각심을 줄 수 있다면, 거기에서부터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정할 수 있지 않을까.
신지원
‘김민들레씨’, ‘조민들레씨’가 민들레의 씨앗인줄 알았는데, 민들레에 ‘씨’를 붙인 호칭이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이 절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귀여움이 세상을 구한다고 하지 않나. 권위를 지닌 것이 아닌, 귀엽고 작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이 절망을 이야기하니 울림이 크고 심리적 낙차가 발생한다. 희곡 속에서 김민들레씨와 조민들레씨는 흙을 옮긴다. 그것이 보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계속한다. 지구의 토양을 현미경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시점을 보여줘서 흥미로웠다.
김연재
<리틀보이>라는 제목은 핵폭탄의 이름이면서 루스벨트의 별명이다. 핵폭탄의 이름을 리틀보이라고 지은 것이 새삼 기이하다. 이 작품 속에서 아주 작은 생물들이 하는 작업은 흙 옮기기다. 재앙 이후의 토양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섬광이 번쩍이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버섯 모양 원자폭탄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지 않나. 그것은 군용 항공기 시점의 이미지다. 그런데 히로시마 땅속에 있던 생명체들은 이 폭발을 어떻게 느꼈을까. 새로운 시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희곡이 좋았다.
한윤미
비인간 존재가 등장할 경우에 주로 동물을 등장시키지 않나. 최근에는 식물이 등장하더라. 식물들이 연대하고 공존하려고 노력하며 그럼에도 생존해내는 지구멸망 이후의 모습을 다시 한번 상상하게 되었다. 이 희곡의 시간적 배경은 과거지만 미래라고 해도 이질감이 없을 것이다. 분명 지구 역사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일이 있었음에도, 그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었음에도, 인간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 변하기는 할까, 생각하게 된다.
곽지현
작품 속에 “눈에 보이지 않아서 무섭지가 않은 거야. 그래서 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무서워”라는 대사가 있다. 지금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보지 않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한윤미
삶과 연결이 잘 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가령 비가 너무 많이 오거나 너무 덥거나 너무 추울 때, 이게 다 날씨라고 말하지만 기후 변화까지 생각이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토양오염, 기후위기 등은 눈에 안 보일 정도는 넘어섰다. 작품을 보고 이 등장물들의 이후가 궁금했다. 생명력이 강한 누군가는 어딘가에 이주해서 살아남았을까? 누군가를 도우려는 의지와 이타심을 지니고 선의를 행하고 책임지려는 존재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 역시 믿을 것은 그러한 마음일까. 이런 일을 겪고도 그런 마음은 남아 있을까. 종을 넘어선 연대가 가능할까.
최세리
작가님께서 쓰실 때 무대의 분위기를 어떻게 상상했을지 궁금하다. 아동극처럼 발랄하고 비비드한 무대를 상상했는데, 멸망 이후의 분위기라면 또 다른 느낌의 작품이 될 것 같다.

곽지현 <휴봇과의 비정상적인 관계>
https://www.sfac.or.kr/theater/WZ020700/webzine_view.do?wtIdx=12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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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지현
최세리
<리틀보이>와 마찬가지로 인간 외의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비인간 존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쩔 수 없이 인간의 관점을 벗어나기 어렵지만 그래도 다른 존재들을 이해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로봇은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나. 인간의 사랑과 다른 존재의 사랑은 어떻게 다를까. 다르다면 인간과 비인간은 어떻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김동국
‘제이’가 인간이었다면 일 분만을 남긴 채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나눠줄 수 있었을까? 나도 모르게 원하는 욕망들이 있을 텐데 그것들을 버리고 누군가를 위해 나눌 수 있을까? 휴봇들의 이야기로부터 사람이 보였다. 인간은 이제 사랑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걸까.
한윤미
인간의 사랑과 이 작품 속 로봇들의 사랑은 어떻게 다를까?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한편으로는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로봇들의 사랑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인간의 사랑을 떠올리기도 했다.
김연재
구형, 신형으로 로봇이 세대가 나뉘어 있는 것이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이라는 책에서도 구형과 신형 반려 로봇이 나온다.
최세리
<진화하는 신 가이아>라는 미디어 아트 작품이 있다. 사람처럼 생긴 토르소 형태의 인공지능 로봇이 관객들과 대화한다. 그는 ‘인간이 되기 위한 과정을 지내고 있어’라고 말한다. 로봇도, 인공지능도 인간을 더 잘 모방하는 방향으로 개발되고 있다. 그래서 결국에 로봇을 통해서 인간이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이며 진정으로 인간다운 것은 무엇일까? 이 작품 또한 로봇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결국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묻는다. 오랫동안 사랑이나 행복 따위의 추상적인 고도의 감정은 인간만 느낄 수 있다고 여겨져 왔다. 인간 아닌 다른 존재들의 감각과 삶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면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김연재
동시대 테크놀로지가 계속해서 발달하고 있는데 그에 따라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역량과 폭력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경계는 어떻게 규정되는지, 인간 외의 비인간 존재들의 권위, 지위, 존엄이 어떻게 회복되는지. 존재론적 질문의 연속이다.
김동국
만약 ‘리’가 등장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리’가 등장하지 않았어도 ‘제이’와 ‘유설’이 사랑한 시간을 마무리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였을 것 같다. 이 준비의 시간을 더 보여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에너지를 다 주었을 때 더 감동적이었을 것 같다.

구지수 <훔쳐온 손님>
https://www.sfac.or.kr/theater/WZ020700/webzine_view.do?wtIdx=12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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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수
허선혜
인간은 응당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먹어야 하니까, 고기는 귀하니까, 하면서. 고기를 먹는 행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올해부터는 육식을 줄이고 페스코 베지테리언을 시도하고 있다. 소의 도축에 대해서는 보고 들은 것이 있어서 어떤 연민의 정서가 있지만 돼지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옥자>가 생각나기도 했다. 마지막에 “주황빛 햇살이 무대 후면을 조금씩 비춘다. 효신은 해 뜨는 하늘을 바라보다 블라인드를 내린다. 햇살이 차단되어 다시 어두워진다”라는 지문이 있다. 구조한 돼지의 이름이 새벽이지만 이 절망적인 세계에서는 새벽이 오지 않는다. 그리고 인물의 이름이 왜 효신과 효단일까.
한윤미
두 딸의 이름이 비슷할 것 같은데 이 작품에서는 엄마와 딸 한 명의 이름이 비슷하다. 이름으로 경계를 짓는 것 같다. 매우 현실을 반영한 희곡이었다. 훔쳐 온 손님(돼지)이 아프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새벽’이 아니라 다시 농장에 데려다 놓으라고 했던 그의 자매 ‘효신’이었다. 일반적으로 다른 존재들의 고통을 바라는 인간은 없다고 한다. 도축장의 벽이 유리여서 투명하게 보였다면, 지금 같은 상황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돼지가 아프다는 걸 ‘효신’이 발견해서 병원에 데려가게 되는 전개에 더욱 동의가 된다. 모든 인간들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말라는 것 같다.
김연재
실제의 이야기를 다루고 명확한 주제를 전달하면서도 구조적으로 기술적으로도 잘 직조되어 있어서 호감을 가지고 읽었다. 손님과 도둑을 배치한 지점도 흥미로웠다. 작가님의 소개 프로필이 인상적이었다. “하나도 갚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씁니다. 동물에게” 동물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동물을 등장시키거나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지, 동물에게 쓴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것 같다. 용감하게 느껴졌다.
한윤미
‘새벽이 생추어리1)’가 있다. 돼지 ‘새벽이’와 ‘잔디’가 거주하고 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속담이 있지만, 이 작품은 다른 존재의 신체를 비틀지 않고 속담 자체를 비틀면서 말한다. 새벽은 올 것이며 이제는 동물 해방을 해야 할 때라고.
곽지현
사전 공유된 구글 문서에 누군가, 새벽이는 아픈 이름이라고 적었다. 효신, 효단, 새벽이라는 이름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는 폭력에 대해 생각하며 읽었다. 그러다 보니 새벽이라는 이름이 새로운 존재, 새로운 시작이라는 뜻으로 읽혔다.
최세리
제목이 <훔쳐온 손님>이다. 동물권 단체 DxE 코리아는 새벽이를 구매하지 않고 구출했다. 때문에 ‘훔쳐온 손님’인 것이다. 동물은 사거나 팔거나 소유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반려동물뿐 아니라 도축되는 동물들에 대해서 언어의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운명을 타고나는 존재가 어디 있어. 남의 운명을 왜 우리가 정해”라는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한윤미
식습관에는 여러 가지가 얽혀 있다. 경험, 관습, 학습된 가정과 사회의 문화… 사실 식습관을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나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다. 또 우리가 먹는 것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철저하게 가려져 있다. 그렇지만 알게 된다면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신지원
가족의 대화가 너무 현실적이었다. 새벽이를 지키는 행위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불통과 사투가 집 안에서 벌어진다. 결국 ‘새벽’은 할머니 집으로 가겠다고 한다. 도망치는 것 같았다. 최소 단위의 공간에서도 해결되지 않는 일인 것이다. 새벽이가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처음으로 돼지가 가는 병원이 어디인지 생각해보았다. 전혀 모르겠더라. 시대적 화두로서 비거니즘에 대해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 응급상황에서 개나 고양이가 아닌 새벽이와 같은 돼지를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면, 어디로 가야 하지? 우리에게는 떠오르는 곳이 없다.

하채린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
https://www.sfac.or.kr/theater/WZ020700/webzine_view.do?wtIdx=12623

구지수
동물 살처분 현장의 고통에 관한 희곡이다. 죄책감을 고백하는 산문시 같기도 하다. “조명이 마치 그림자처럼 배우를 따라다닌다. 무대에는 오직 생생하게 말하고 움직이며 싸우는 배우가 존재한다”와 같은 초반의 지문을 통해 연극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서로에게 배턴을 넘기듯 때론 말과 말이 포개지며 진행될 수 있다”는 지문도 있는데, 연출이 기대되는 동시에, 전달력을 더할 수 있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낯설고 흥미롭게 독자를 잡아끄는 데 텍스트로서 충분히 성공하고 있다. 고백을 이어나가는 부분에서의 리듬감이 좋았다.
최세리
시처럼 쓰인 희곡이다. 무엇을 희곡이라 할 수 있는가. 음성언어뿐 아니라 수어나 무용, 움직임 언어를 포함해서 텍스트가 다른 언어로 발화되었을 때 새롭게 발생하는 지점이 있다면 그 텍스트는 희곡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가님께서 어떤 호흡을 가지고 희곡을 쓰셨을지 궁금했다. 배우들에 따라 호흡이 달라지겠지만 어떤 상(狀)이 있었기에 이런 형식을 취하셨을 것이다. 또, 의문문으로 끝나는 모든 문장들이 너무나 고통스럽게 느껴졌는데 배우들이 관객들 앞에서 이 문장들을 발화한다면 무대와 객석에 어떤 분위기가 형성될지 궁금했다. 사라 케인의 <4.48 사이코시스>가 떠올랐다. <4.48 사이코시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우울, 병리적인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것을 넘어 인간 외의 존재를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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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미
한윤미
<훔쳐온 손님>이 동물권에 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이 작품은 어떤 한 순간에 집중하고 있다. 후반에 “계속해서 날아드는 네 날개가 / 하루종일 마지막으로 꺾이던 그날로부터”라는 대사가 나온다. 명확하게 AI(조류인플루엔자)의 상황이 연상되고, 살처분에 동원되었거나 자청해서 들어간 사람의 이야기로 여겨졌다. “자신의 온몸을 하얗게 부풀린 채”라는 부분이 “아주 깨끗하고 / 하얀 새”와 연결되며 이는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의 이미지로 연결된다. 처음 읽었을 때는 다른 비인간 존재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만 다시 읽었을 때는 화자의 감정으로 꽉 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희곡의 다음 장이 있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김연재
전쟁과 이주를 겪은 작가들의 작품이 떠올랐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짧은 산문도 생각나고. 2차 대전 때 죽음을 목격하거나 타인을 죽이거나 죽음을 외면해야 했던 그래서 트라우마를 지니게 된 작가들이 전쟁 직후에 써낸 언어 같았다. 고통에 관한, 고통받는 자의 언어로 읽히기도 했다.
허선혜
“저어기 /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간다 / 자신의 온몸을 하얗게 부풀린 채”라는 대사로 시작한다. 이 문장을 보면 “한 사람”이 화자인지, 화자가 보는 대상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내 살이 된 너는 / 이제 내 안에서 울고 있는 거니”라는 대사도 있다. 화자와 화자가 보는 대상이 섞인다. 또, 화자는 사건으로부터 떨어져서 관찰자로 서성이지 않는다. 어떤 시간을 관통해서 살고 있다. 그가 하는 말은 저승으로 가는 길에 읊조리는 기도문 같다. 애도의 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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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1. 위급하거나 고통스러운 환경에 놓여 있던 동물이나 야생으로 돌아가기 힘든 상황의 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구역을 말한다. 공장식 축산 환경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동물이 평생 가능한 한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가리킨다.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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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재

김연재 본지 편집위원
작가, 단추학자, 이미지 수집가
<매립지>,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 <폴라 목> 등을 쓰고 전시 <불완전 운동>에서 <달과 종>을 연출했다. 1960년대 서울의 건축물과 오컬티즘에 관심이 있다.
인스타그램 @publish_seri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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