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물고 뜯고 싸우고 갈등하고 연극하라

배우 박정복

오세혁_작가·연출가·배우

제93호

2016.06.09

나는 박정복입니다
나는 배우입니다.
아니,
나는 연극배우입니다.
나는 5년간 연극만 하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거든요.

나는 박정복입니다
나는 배우입니다.
아니,
나는 연극배우입니다.
나는 5년간 연극만 하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거든요.

고등학교 때 방송반을 했었어요. 카메라 파트였죠.
가수 조성모의 ‘투 헤븐’ 뮤직비디오를 보고 엄청난 감동을 받았어요.
와, 저렇게, 드라마가 있는 뮤직비디오가 등장했구나.
그때부터 뮤직비디오 감독의 꿈을 꿨어요.
생각을 해보니까 드라마를 익히려면 연기를 배워야 할 것 같았어요.
고3이 되었을 때 입시학원을 등록했죠.
그 곳이 바로 위대한 배우 손병호 선생님이 계시는 곳이었어요.

선생님은 정말로 연극배우 그 자체셨어요.
선생님을 보면서 연극배우들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죠.
선생님이 출연하신 <에비대왕>을 보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죠.
사모님이신 최지연 선생님도 엄청난 무용가셨어요.
어느 날 선생님이 출강하시는 학교의 공개수업을 보러 오라고 하셨어요.
또 한 번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요.
학생들의 열정과 공기에 압도당해버렸죠.

여긴 어디야? 이런 곳이 있었어?
난 여길 올 거야! 여기가 어딘지 모르지만 난 여길 반드시 올거야!
그 곳이 바로 한예종 연극원 연기과였어요.
내 꿈이 뮤직비디오 감독에서 연극배우로 바뀌는 순간이었죠.

제가 그때 집안이 어려웠어요.
가뜩이나 부모님도 반대하셔서 수업료를 다 내기가 힘든 상황이었죠.
부모님의 심정도 이해는 가요.
어렸을 때부터 낯가림이 심해서 큰 길을 못 다녔거든요.
얼굴 마주치는 게 부끄러워서.

“뭐? 네가 연기를 한다고? 네가 연기를 어떻게 하냐? 큰 길도 못 다니는 놈이!“

손병호 선생님께 솔직하게 말씀 드렸어요.

“선생님, 연기를 너무 배우고 싶습니다. 하지만 돈이 조금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꼭 배우고 싶습니다.”

“정복아, 괜찮아. 네가 정말 연기를 하고 싶으면 나한테는 내지 않아도 돼. 다만, 네가 좋은 배우가 되려면 재즈댄스도 꼭 배웠으면 좋겠어. 네가 가진 돈은 재즈댄스 수업료로 쓰면 좋겠다.”

두 분은 정말로 최고의 선생님들이에요.
제 인생을 바꿔준 분들이에요.



그렇게 한예종 연극원 연기과에 들어갔어요.
들어갈 때부터 무조건 연극만 하겠다고 결심을 했죠.
학교 안에서 계속 연극만 하고, 군대를 다녀와서도 연극만 하고
가끔 외부작업이 들어올 때도 계속 연극만 했어요.

계속 연극만 하다보니까
연극의 현실이라는 것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이렇게 연극만 계속 하면 나중에 나이가 먹었을 때 하고 싶은 작품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어쩌면 인지도가 더 필요한게 아닐까?

불안감이 계속 찾아왔어요.
연극을 계속 하기 위해서라도 인지도를 쌓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날 이후로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어요.
단편영화, 독립영화, 저예산 영화에
기회가 생기는 대로 무조건 닥치는 대로 계속 계속 출연했죠.

그런데 영화라는 것이 기다리는 경우가 많잖아요.
내가 나오는 장면을 찍기 위해 계속 기다리고 그렇게 기다리다가
내가 나오는 장면 그 장면만 딱 찍고 그리고 나는 끝이죠.
박정복이라는 배우가 영화라는 작업 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완결된 숨으로 존재하기가 힘들었어요.

배우로서 완성된 선배님들에게는 이런 작업이 어렵지 않겠지만 저는 아직 힘들었어요.
이 작품이 왜 이렇게 시작을 해서 이렇게 흘러가서 이렇게 마무리가 되는지
끊임없이 이야기하면서 물고 뜯고 싸우고 갈등하고 싶었는데
영화라는 작업의 특성상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았어요.
영화의 문제가 아니라 저의 문제였어요.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영화를 하니까 자꾸만 제 연기가 퇴보하는 것 같았어요.

어떻게든 연기의 끈을 잡고 싶었죠.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조교도 하고, 예고에도 출강하고, 학원도 나가고.
그래도 자꾸만 어떤 갈증이 채워지지 않더라고요.
아, 나한테 배우가 안 맞는 직업인가.
나는 어쩌면 배우를 포기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마음을 먹고 정말로 포기 직전까지 갔어요.
그런데 또 한 번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 찾아왔어요.

<고스트>라는 뮤지컬에서 ‘리더’ 알바를 했었어요. 주연배우의 상대역을 해주는 역할이죠.
연기에 관계된 일은 뭐든 좋으니까 정말로 열심히 했어요.
외국 스태프분들이 그런 저를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어느 날 제안을 하시더라고요.

“당신에게 작은 역할을 하나 맡기고 싶다. 그 역할은 원래 앙상블을 같이 해야 하지만 아예 앙상블을 따로 뽑아줄 테니 당신은 연기만 해라.”

그렇게 <고스트>에 배우로 출연하게 되었고
그 작품을 통해서 제작사 ‘신시컴퍼니’의 대표님과 직원 분들을 만나게 되고
그 분들을 통해서 <레드>의 출연기회가 생겼어요.
또 하나의 기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죠.



<고스트>가 끝나고 <레드>를 하려면 1년 정도의 시간을 기다려야 되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마음을 먹었어요. 5년, 앞으로 5년을 연극배우로 살아보자.
5년이 지나고 배우로서 조금이라도 앞이 보이면 계속 가자.
하지만 조금이라도 앞이 보이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 깨끗하게 포기하자.

그래서 그 5년 동안은 절대로 도망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살기 시작했어요.
연극만으로는 아직 생활이 안 되니까 알바를 하면서 계속 버티고, 그렇게 버텨서
마침내 <레드>를 하게 되고 <레드>를 공연하면서 또 다시 계속 버티고
그렇게 버티니까 김수로 선배님을 만나게 되고
선배님의 제안으로 <올드 위키드 송>까지 하게 되었죠.
버티면 버틸수록 버틸 수 있는 기적이 생겨난 거죠.
수로 선배님의 이 한마디가 계속 생각나요.

“정복아, 내가 너한테 줄 수 있는 선물은 5개월이라는 시간이야. 연습기간과 공연기간 5개월. 이 5개월 동안에 네가 최선을 다 한다면 너한테는 분명 또 한 번의 행복한 시간이 찾아오게 될 거야.”

정말로 또 한 번의 행복한 시간이 찾아왔어요.

서울시극단의 <헨리 4세>에서 왕자 역할을 맡아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어요.
처음에는 당황했어요.
내가 셰익스피어를? 헨리 4세를? 서울시극단에서?
선뜻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무심결에 물었죠.

“연출님은 누구시죠?”
“김광보 연출님입니다.”
“무조건 하겠습니다.”

하하하. 어떻게 안 할 수가 있겠어요.
김광보 연출님인데.
아무 설명이 없어도 김광보 세 글자로 모든 설명이 끝나는 분인데.

연출님께서 일단 밥을 먹으면서 얘기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떨리는 마음으로 밥을 먹으러 갔어요.
앉자마자 말씀하시더라고요.
어렵다. 쉽지 않을 거다.
그리고 나는 아직 당신에 대해 모른다.

저는 그때 너무 간절했어요.
광보 연출님을 꼭 만나고 싶었으니까요.
필사적으로 말씀드렸죠.
연출님, 정말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연습 기간 동안 제가 가진 모든 시간을 쏟겠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꼭 하고 싶습니다.
연출님이 가만히 생각하시더니
좋다. 하자.
대신에 본격적으로 연습이 들어가기 전에
나랑 미리 만나서 리딩을 하자.

정말로 눈물 나던 순간이었어요.
연출님을 만나면서 연극에 대한 새로운 행복을 알게 됐죠.
알고 있었지만 등한시 했던 것들.
연극의 참뜻.
왜 연극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몇 달이라는 시간동안 똑같은 장면과 똑같은 대사를 연습하는 과정을 왜 거쳐야 하는지.

사실 육체적으로는 너무 힘들었죠.
매일 삼계탕을 먹을 정도였어요.
몸에 좋다는 건 찾아다니면서 다 먹었어요.
지치면 안 되니까.

그 기간에
연기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정말로 힘들었는데
그런데 너무나도 행복했어요.

평가가 어떻든 두렵지 않았어요. 정말로 올인을 했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
서른네 살의 박정복이 해낼 수 있는 최대치를 해냈다고 생각해요.
연기를 잘했다는 게 아니에요.
제 자신에게 떳떳할 만큼 정말로 제 모든 걸 쏟았어요.
그 이상은 아마 못 했을 거예요.

나중에 세월이 지나면 더 잘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헨리 4세>를 했던 순간처럼
제 모든 걸 또다시 쏟아 부을 수 있는 순간이 다시 올까요.

<헨리 4세>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인간의 진가는 죽을 때 정해진다.”

가장 좋아하는 대사예요.

내 진가도 죽을 때 정해지니까
일단은 죽을 때까지 계속 달려가면 되지 않을까요.



왜 연극을 하고 싶냐고요?
연극을 안 하면 연기가 퇴보되니까요.

저는 아직 젊고
많은 공부를 하고 싶고
많은 얘기를 하고 싶고
많은 토론을 하고 싶고
많은 갈등을 겪고 싶으니까요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 최고의 장르가 바로 연극이니까요.

배우로서 연극은 최고의 학교예요.
연극만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연극을 할 때만큼은 다른데 눈 돌리지 않을 거예요.

똑같은 연습실에서
똑같은 사람들과
똑같은 대본을 들고
똑같은 연습을 하면서
몇 달 동안 물고 뜯고 싸우고 갈등하면서
행복하게 연극을 할 거예요.



연극은 참 묘하죠.
다 알 것 같지만 죽을 때까지 모를 것 같아요.
무대에 오르기 전 까지도 계속 모르다가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면 또 알 것 같고
그 날의 공연이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오면
또 모를 것 같고.

그렇게 매일매일
무대의 시간이 지나가면서
하루는 알게 되고
하루는 모르게 되고
제가 과연 죽을 때까지 알 수 있을까요?
괜찮아요.
<헨리 4세>의 대사처럼
인간의 진가는 죽을 때 정해지니까요.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릴 거예요.

[사진: 장우제 woojejang@gmail.com]

박정복(배우)
주요작품
<레드> <헨리 4세-왕자와 폴스타프> <올드 위키드 송> <고스트> 외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오세혁

오세혁 작가, 연출, 배우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에서 작가 연출 배우로 활동중.
트위터 @gulpanart
홈페이지 www.gulpan.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