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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인이 만난 사람] 전중환x임영욱

오래된 연장통 그리고 '아하!'의 연극

임영욱, 전중환

186호

2020.09.10

세상 모든 것들은 왜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언젠가 어느 분께서 ‘스스로 보시기에 좋게끔’ 만든 것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어떤 ‘목소리’가 들어가면 그만 김이 새고 만다. 곧장 무한 소급의 수렁에 빠지고 마니까.
그런 점에서 진화론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자연 선택은 말이 없다. 자연은 무심하여 바라는 것이 없으니까. 대신 자연은 쉬지 않고 그 선택의 결과물들로 이 세상을 가득 채울 뿐이다. 우리는 우리 이웃들과 더불어, 진화에 의한 ‘지상 최대의 쇼’(리처드 도킨스, <지상 최대의 쇼>)에 출연하는 주인공이다.
진화론은 우리가 왜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해준다. 김수영 시인은 ‘나는 왜 사소한 일에만 분개하는가’(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며 괴로워했다. 만일 시인이 진화론, 특히 진화심리학을 접했더라면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대신에 세상은 위대한 시 한 편을 잃었을 것이다. 이것은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진화심리학은 우리의 심리가 어떠한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러한지에 대해 궁극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연극은 연극 나름대로 사건과 행동을 통해 인간 본성과 세계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한다. 하나는 과학이고 하나는 예술이다. 매력적이기로는 둘 다 이루 말하기 어려울 만큼이다. 혹시 두 영역이 주고받을 수 있는 값진 것들이 있을까? 혹은 둘 간의 대화는 평행선들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치게 될 것인가? 어느 쪽이라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진화심리학자 전중환 선생님을 만나봤다.
임영욱
진화심리학이란 무엇입니까?
전중환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을 진화의 관점에서 연구하는 건데요. 우리의 마음이 왜 하필이면 이러한 식으로 (따옴표 처리를 요청하시며) ‘설계’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이 핵심 목표입니다. ‘설계’라는 말에 따옴표를 붙인 이유는 이것이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은유적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설계에 의한 진화가 사실은 의도와 목적이 있는 행위자에 의한 것이 아니거든요. 그저 ‘다음 세대에 복제본을 많이 남기는 유전자가 그렇지 않은 유전자를 제치고 더 흔해진다’라는 대단히 맹목적이고 기계적이고 단순한 과정이 바로 진화의 핵심이고, 우리의 마음 또한 이러한 과정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설명하는 것이 진화심리학입니다.
전중환
이후 소똥을 역겨워하는 심리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소똥이 역겨운 것은 당연하다. 역겨운 냄새가 나니까. 하지만 이것은 알다시피 동어반복이다. 진화심리학은 소똥에 대한 논리적으로 가능한 반응을 모두 전제로 한 뒤, 왜 하필이면 역겨운 반응이 우리 마음에 남게 됐는지를 설명한다. 이러한 마음 또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임영욱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곧 우리 자신이며 인간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라고 믿는 사람한테는 진화심리학이 말하는 내용이 아주 도발적으로 느껴질 것 같습니다.
전중환
항상 옳은 판단을 내리려 애쓰는, 일관된 사고와 행동을 하는 자아, 2019년의 나와 2020년의 나를 동일하게 유지하는 자아, 즉 ‘셀프’가 있다는 것은 말하자면 허상입니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자아는 최고결정권자가 아니라 홍보대변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임영욱
방금 말씀하신, ‘일관된 자아나 영혼은 없다’라는 말씀을 소위 대중을 향해 얼마나 많이 하셨는지 궁금해집니다. (웃음)
전중환
하긴 하는데 많은 분이 이해하기 어려워하시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고, 우리 마음은 최고결정권자가 지휘하는 조직이 아니라 서로 동등한, 각각의 일을 잘 담당하게끔 발달한 모듈들이 모여 있는 이사회 같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임영욱
인간의 마음을 ‘오래된 연장통’(전중환, <오래된 연장통>)에 비유하신 것도 참 절묘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중환
인류가 침팬지와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것이 500만 년 전인데요.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1년으로 압축해본다면 인간이 농업을 시작한 때는 그 1년 중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오전 6시 정도가 됩니다. 그리고 산업혁명은 그날 밤 10시에나 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밤 12시 00분이 지금이고요. 이렇게 보면 인간은 1년 중 364일을 수렵채집생활을 하며 마음을 적응시켜온 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최근에 마주한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 맞는 새로운 마음을 디자인할 시간은 갖지를 못한 거지요.
같은 맥락에서 ‘현대인의 두개골 안에는 석기시대의 마음이 들어 있다.’(전중환, <진화한 마음>)는 표현도 있다.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지금 여기’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 본성은 석기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니... 이제 연극과 진화심리학의 접점을 찾아보자.
임영욱
임영욱
임영욱
진화심리학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왜 연극을 좋아하는 걸까요?
전중환
우선 스토리텔링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가 스토리텔링을 좋아하는 까닭은 그 캐릭터가 힘들게 장애물을 극복하고 결과적으로 과거에 우리의 번식적 성공에 도움이 됐던 진화적인 목표들, 즉 매력적인 배우자를 얻거나,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거나, 사회적 지위를 높이거나, 동료들과 한 패거리를 잘 이루는 등의 목표 등을 수행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교훈과 지침을 얻기 위한 일종의 ‘모의 시뮬레이션’기능을 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을 연극을 통해 수행하려는 성향이 진화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는 ‘동물들의 놀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연극은 ‘play’잖아요? 진화심리학에서는 연극이 말 그대로 동물들의 놀이 즉 ‘animal play’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임영욱
동물들의 놀이요.
전중환
네. 그런데 동물들의 놀이는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맞닥뜨리게 될 상황에 대한 모의훈련이라는 명확한 진화적 기능이 있습니다. 쫓고 쫓기기, 공격과 방어, 사회적 관계 내에서의 편먹기나 왕따 등이 놀이를 통해 훈련되기 때문에 놀이 행동을 하면 선천적으로 강한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도록 진화된 것이지요.
임영욱
그리고 이러한 진화과정이 인간에게도 해당하고, 거기에서 연극이 발생했을 거라고 보시는 거지요?
전중환
인간도 마찬가지라고 보는 겁니다. 두세 살짜리 아이도 역할 놀이를 기가 막히게 합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파트너를 때리는 역할을 할 때, 얼굴로는 웃는 표정을 지음으로써 상대에게 이것이 놀이상황임을 알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엄마와 같이 지켜보는 사람이 생기면 그 관객의 존재를 의식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밥이 끓는 상황을 보는 이들이 알 수 있게 모래가 담긴 장난감 밥솥의 뚜껑을 손으로 달싹거리게 만든다든지요. 이렇게 보면 인간의 놀이에서 연극의 본질을 찾을 수가 있지요.
‘연극은 놀이’라는 사유는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서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그럼에도 관찰과 실험을 통해 발견된 사실을 접하는 일은 여전히 흥미로웠다.
임영욱
아이의 소꿉놀이에도 이미 상대 배우나 관객과의 약속이 전제되어 있네요.
전중환
관객이, 다른 설명이 없는 데도 기가 막히게 연극적 상황을 잘 알아차리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소꿉놀이에서 어린아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그를 지켜보는 엄마가 직관적으로 알아차리는 것도 그렇고, 예컨대 신민아가 심청이 역할을 한다고 할 때 관객이 신민아의 정체성과 심청의 정체성을 직관적으로 구분해내는 것도 그렇습니다. 연극적 상황을 잘 알아차리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연극을 보는 데서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도록 진화한 것은 물론이고요.
임영욱
연극이 이렇듯이 뿌리 깊은 놀이본성에 근거하고 있기에 저희와 같은 ‘일부 인간 개체들’은 속수무책으로 그것에 몰두하는 거였군요.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나’하는 만성적인 회의에 시달리면서도 다시금 작업에 뛰어들고 있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전중환
어떤 의미에서는 남들보다 더 행복한 위치에 계신 거지요. 더 근원적인 기쁨과 만족감을 맛보고 계시니까요.
임영욱
과연 그렇습니다. (웃음)
전중환 임영욱
영상 매체와 비교할 때 연극이 갖는 고유함 중 대표적인 것이 현장성과 동시성이다. 영상 매체의 편리성과 스펙태클에도 불구, 우리가 무대 위 실시간에 여전히 매료되는 것 또한 이렇듯 오래전 형성된 인간의 본성 때문일 것이다. 영상‧통신 기술은 무대 위 실재를 얼마나 대체할 수 있을까?
임영욱
요즘 비대면 문화가 생기면서 연극을 비롯한 무대예술을 적극적으로 영상화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인간의 인지적 특성에 근거할 때, 매체에 의한 가상과 실제 공연 간의 인지적 간극이 어디까지 좁혀질 수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전중환
누군가 VR로 모나리자를 보고 ‘나 어제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를 봤어’라고 하면 사람들은 ‘장난해?’라고 반응할 것입니다. 관객들은 여전히 연극의 현장성이 주는 엄청난 만족감을 찾아, 즉 배우가 자신의 눈앞에서 공연을 하고 내 반응에 의해 상태가 달라지는 기쁨을 맛보기 위해 공연장을 갈 거라고 봅니다.
임영욱
인간은 1년 중 364일을 스크린 앞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자신의 놀이본성을 정교화해온 종이니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연극이 소꿉장난‧사냥놀이‧제의에서 쓰이는 것과 동일한 ‘오래된 연장’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하게 됩니다.
바야흐로 과학의 시대다. 과학이 주는 앎과 예술이 주는 감동은 과연 양립할 수 있을까?
임영욱
브레히트는 이미 자신의 시대를 과학시대로 규정했습니다. 물론 그가 말한 것은 사회과학이었지만, 이 세계가 너무나 복잡하고 그것의 참모습을 밝히기 위해서는 정교한 방법론에 근거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브레히트 또한 과학 일반의 정신과 가치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브레히트가 놀라 넘어질 만큼 과학의 영향력과 존재감 모두 커진 시대입니다. 저는 그렇다면 이런 시대의 예술은 과연 어떠해야 하나를 고민하곤 합니다. 과학이 건네는 귀중한 앎과 예술이 본디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어떻게 결부시킬 수 있을까요.
전중환
‘아하’라는 감탄사가 있잖아요? 과학 영역에서는 어떤 앎이 자신의 직관을 유쾌하게 배반할 때 느끼는 쾌감을 표현할 때 이 감탄사를 씁니다.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잡다한 것들을 단순한 원리에 의해 깔끔하게 설명해냈을 때 느끼는 쾌감, 그러한 쾌감을 작품에 담아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임영욱
‘직관을 유쾌하게 배반한다.’ 멋진 말입니다. 그 유쾌함이 과학시대의 예술, 연극이 추구하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봅니다.
전중환
그렇지요. 인간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 과학이니까요.
임영욱
혹시 그 유쾌함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있다면 추천해주시겠습니까?
전중환
리처드 도킨스의 <무지개를 풀며>가 좋고요.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도 좋습니다.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인간이 어떻게 악한 본성을 억누르고 점차 덜 폭력적인 세계를 만들어 왔는가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임영욱
진화심리학은 한동안 쓰이지 않았던 ‘본성’이란 말을 다시 모든 담론의 근간에 불러들였다. 그러면서 과학 이외의 분야, 특히 사회‧정치 영역으로부터 안타까운 오해와 비난을 사기도 했다. 그렇다고 진화심리학이 자신의 입장을 번복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
임영욱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 중에는 ‘인간의 정체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다’는 입장이 있지 않습니까. 최근 들어 인권, 차별에 대한 담론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이런 관점을 취하는 경우를 더 자주, 더 많이 볼 수 있는데요. 이들 담론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일은 무척 바람직하고 저 또한 장애, 여성, 동성애 등의 이슈에 대한 나름의 확고한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자질에 관한 구성주의적인 관점이 일상화 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과연 그래도 좋은지 고민입니다.
전중환
일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회과학 영역에서 ‘정체성은 전적으로 구성된다’는 관점을 취하지요. 예컨대 지금 남자와 여자가 보이는 특징들은 양육방식이 달라서 그런 것뿐이고, 공격성, 성적 욕망 등에서 남성과 여성들은 얼마든지 그 특징을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다고 하지요.
임영욱
네. 저는 이러한 관점이 지금은 정치적 기능을 효과적으로 해내기에 유용할지 모르지만, 만일 이것이 실제 인간의 본성과 거리가 있는 설명 방식이라면 앞으로 우리는 또 다른 공동체적 비용을 치르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돼 염려됩니다.
전중환
저도 우려합니다. 사실을 반영하지 않는, 과학적이지 않은 이런 잘못된 지식에 근거해서 남성과 여성은 신체 외형만 다를 뿐 심리적 차이는 없다고 주장하거나 거기에 기반해 정책적인 차원에서도 이런 극단적인 환경 결정론적 관점이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술계에도 이런 경향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임영욱
그런 것 같습니다. 예술은 인간에 대해 자유롭게 탐구하고 발언하는 것이 주된 미덕이라는 생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깊고 정확하게 공부하지 않더라도 어떤 예술적 직관과 통찰에 의해 그것이 보완될 수 있다는 통념도 있는 것 같고요. 스스로 반성하게 됩니다.
전중환
임영욱
요즘은 무엇에 관해 연구하고 계신지요?
전중환
혐오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실은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의 행동을 혐오하고 도덕적으로 비난하는가를 연구합니다. 동성애 혐오가 좋은 사례지요.
임영욱
지금과 같이 혐오와 반목이 팽배한 사회를 설명해낼 수 있겠네요.
전중환
맞습니다. 타 집단에 대한 혐오와 질시는 진화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알고, 현대에는 그들을 혐오할 이유가 없다는 것 또한 명백히 함으로써 그러한 감정을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영욱
정말 진화심리학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군요.
대화 중 ‘근접설명’과 ‘궁극설명’의 차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근접설명은 ‘어떻게’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고 궁극설명은 ‘왜’에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두 설명은 서로 층위가 다른 것일 뿐 서로 배타적인 관계는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예술과 과학 사이에는 메우지 못할 간극이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둘은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엄밀하게 소통하고자 할수록 다른 두 언어의 차이는 더욱 도드라진다는 사실을 이번 대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화심리학과 연극이라는, ‘인간’이라는 같은 현상을 탐구대상으로 삼고 있는 이 두 영역이 서로 배타적인 관계가 아님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대화를 통해 두 영역은 벽을 사이에 두고 소통하고 있다기보다는 각자 다른 층에서 천장과 바닥을 통해 소통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서로 귀 기울이기를 원치 않는다면 서로가 내는 소리는 층간소음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직관을 유쾌하게 배반하는 데서 오는 ’아하!‘의 쾌감을 통해서라면 우리는 다른 층에서 들리는 소리를 통해 거기서만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을 전해들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서로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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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욱X전중환

임영욱X전중환
임영욱_연출가, 작가, 창작집단 희비쌍곡선 대표.
동시대 창작 매체로서의 판소리를 ‘입장과 태도의 예술’로 규정하고 있으며, 판소리의 ‘심층문법’이라 부를 수 있는 주요한 자질들이 포스트서사극의 새로운 한 가능성을 열어주리라 기대하며 꾸준히 탐구, 시도하고 있다. 작업으로는 <필경사 바틀비> <판소리 오셀로> <어이하리 이내 마음은 오뉴월 버들마냥 swing, swing> 등이 있다.

전중환_진화심리학자
사람들은 왜 역겨운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믿는지 연구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행동생태학 석사를, 텍사스대학교(오스틴) 대학원에서 진화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오래된 연장통』, 『본성이 답이다』, 옮긴 책으로는 『욕망의 진화』(데이비드 버스), 『적응과 자연선택』(조지 윌리엄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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