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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만난 배우] 황순미 X 김신록

내가 나를 놀래키는 의외의 순간을 찾아

김신록_배우

188호

2020.10.08

이 글을 읽으시려는 독자 여러분, 내가 나를 놀래키는 순간을 경험한 적 있으신가요? ‘어? 나한테 이런 표정이? 이런 감정이? 이런 면이?’ 자신에게 익숙한 사고와 감정의 패턴을 벗어나 모르는 길을 찾고 싶다는 황순미 배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황순미 X 김신록
연기에 대해 어떤 화두를 가지고 있나.
20대 때 어떤 배역이든 다 해보고 싶으니까 혼자서 이런저런 희곡을 소리 내서 읽고 그랬는데, 문득 ‘난 왜 뭘 읽어도 똑같이 읽는 것 같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한테 어떤 패턴이 있구나.’ 얼마 전에는 내 사고 과정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라는 사람의 사고 과정, 내가 감정을 느끼는 방식에도 어떤 패턴이 있을지 몰라.’
공연 연습을 할 때도 대본을 분석하다 보면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나 패턴, 찾아가는 과정이 매번 유사하게 느껴지거나 좀 지겨워질 때가 있다. 그래서 연습 때 작품 주제나 내용과 관련 있는 책이나 영화를 보기도 하지만, 일부러 작품과 전혀 관련 없는 글, 그림, 영화 같은 걸 보기도 한다. 스스로 패턴을 바꾸는 게 어려우니까 ‘외부에서 오는 예상치 못한 자극을 받아보자’ 하는 거다.
어느 날 뜬금없이 어떤 영화가 떠오르면 그냥 보려고 노력한다. ‘그 길로 가보자. 전혀 연결이 없다고 생각되는 길로도 가보자. 감각으로 오는 것들을 더 믿어보자.’ 그러다 보면 즉흥적으로, 감각적으로, 여러 가지가 합쳐지면서 내가 나를 놀래키는 순간이 생기지 않을까.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나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나를 놀래키는 순간’이라는 말이 좋다. 내가 으레 가는 길 대신 다른 길, 가보지 않았던 길을 찾아보려는 노력인 것 같다. 내가 한 말인지 남이 한 말인지도 잊어버렸는데, 연기는 ‘내 안의 오솔길을 찾는 일’인 것 같다.
몰랐던 길... 무대에서도 일상에서도 ‘내가 이런 웃음을 처음 웃었네!’ 이럴 때가 있는 것 같다. 몰랐던 나를 발견하는 거다. 한 인물을 만들어갈 때 ‘이 사람은 이럴 것 같다’고 규정 하거나 결정해버리면 새로운 가능성이 닫혀 버리는 것 같다. ‘어떤 표현을 할지 모르는 순간’이 안 열리는 거다. 모든 사람은 다 자기도 모르는 의외의 모습을 갖고 있지 않나. 그런데 내가 ‘이 인물은 이래’라고 연기하다 보면, 내가 나한테 안 놀란다. 내가 나한테 놀라고 싶다. ‘아! 그 사람이 이렇게 웃을 거라는 건가!’ 이런 의외의 순간, 생경한 것들이 합쳐졌을 때 리얼하다고 느낀다. 리얼하면 폭 빠져든다.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내겐 <이게 마지막이야>를 같이 했던 이지현 배우가 그렇다. 상대 배우로서 혹은 관객으로서 무대에 선 이지현 배우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인지 궁금하다.’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
웹진 연극in 독자분들이 ‘객석’ 코너에 황순미 배우님이 궁금하다고 적었던데^^
그건 내가 이전에 다른 인터뷰를 한 적이 없어서...^^
어쨌든 ‘리얼하다’는 게 어떤 원본을 재현하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고, 어떤 실제가 내 감각으로 확 만나지는 느낌인가보다. 그래서 궁금하고 알고 싶고 나하고 관련 있다고 느끼고.
그럴 때 무대에 있는 배우가 사람 같다, 사람. 배우가 아니라. 난 배우가 무대에서 환상적으로 보이는 것 보다, 무대가 객석에 앉은 나와 분리되는 것보다, 나한테 다가와 닿을 때 더 이입이 된다. 그래서 인물을 큰 틀 안에서 더 열어놓고 이렇게 저렇게 찾아보려고 한다, 어떤 의외의 순간을, 내가 나를 놀라게 하는 순간을.
작년에 극단 907의 <9월>이라는 작품을 재공연할 때, 무대가 ‘공론장’이라는 설정으로 배우와 관객이 함께 둥그렇게 의자를 놓고 앉아서 공연했다. 그때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고개를 이렇게 꺾어서 옆으로 삐딱하게 하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되더라. 비뚤어진 채로 앉아있게 되는 나와, 삐뚤어진 기울기로 보이는 세상과... 그 순간이 좋았다. 이유도 모르고 의미도 모르지만 그 어떤 것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인물의 시선을 만났다’고 느꼈다. 그런 순간이 좋다.
황순미
황순미
텍스트 전체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그 텍스트를 횡단하고 종단하는 몸짓이나 표현 방식들을 찾아낼 수 있는 것 같다. 혹은 반대로 감각으로 즉흥으로 발견되는 원인불명의 몸짓들을 통해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확장되고 전체를 관통하는 감각이 발견되기도 하고. 그런 의외의 순간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본인만의 방식이 있나.
연기할 때, 인물이 하는 말뿐만 아니라 하지 않고 있는 말, 하고 싶은데 못하고 있는 말, 대본에 없는 말이 뭘까 생각한다. 나만 해도 마음속에는 생각과 말들이 끝없이 돌아다니니까.
이번에 <쉬지 스톨크>라는 작품을 할 때도 많이 생각했다. ‘쉬지 스톨크’라는 인물이 말을 되게 많이 하는데, 자기 마음을 직접 표현한 말이 아닌 게 많다. 그런데 말의 양이 너무 많으니까 상대는 이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다. 진짜 자기 말,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안 한 것일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인물이 희곡에 나와 있지 않은 순간에, 혹은 말을 하고 있는 순간에, 혹은 침묵하는 순간에, 마음속에서 정말 하고 있을 진짜 말이 뭘까 생각해 보는 거다.
대사가 징검다리라면 그 돌멩이 사이사이로 흐르는 마음들 말들을 따라가 보는 건가.
같은 목적지여도 구석진 골목길 후미진 곳을 거쳐 거기로 갈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그 길목에서 의외의 순간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
보르헤스 소설에 나오는 ‘퇼른’ 이라는 도시가 떠오른다. 퇼른 언어에는 명사가 없고 모든 것이 형용사나 부사, 동사의 형태로 표현된다고 한다. 명사는 존재를 규정하고 이름 붙이고 그 이외의 상상이나 가능성을 배제해 버리지 않나. 예를 들면, 여기 이 ‘조명’은 퇼른 언어로는 ‘가늘고... 듬성듬성하고 라운디한 바깥을 한... 밑이 뚫린... 위에 매달린... 빛이 난다.’ 정도가 될 수 있을까?
‘얇게 내려오는... 되게 많은 애들이... 빛나는 투명한 애를 둘러싸고 있는데 가운데로 그 투명한 애가... 떨어질 수도 있다.’
‘애들’은 어떻게 할 건가.
...하하하
황순미, 김신록
뷰포인트 훈련에서 공간을 바라볼 때도 의자, 커텐, 조명, 자몽 등과 같은 사물의 이름 대신 색깔, 질감, 선, 명암, 부피, 깊이, 배치 등 사물의 형태와 디테일, 구성을 보는 훈련을 하기도 한다.
재밌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말하고 생각하는 방식을 듣는 것도 도움이 된다. 사람마다 소통하는 방식이 다 다르지 않나. 다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든 소통해내려는, 그 어려움, 그걸 딛고 결국 소통해 내는 데 아름다움이 있는 것 같다. 어떨 때는 구체적으로 파고들지만 어떨 때는 그냥 모든 게 한순간에 해결되기도 한다.
<너에게>라는 작품을 연습할 때, 문화적인 차이로 감각적으로 바로 와 닿지 않는 단어나 문장 등을 적절하게 바꾸는 과정을 신중하고 섬세하게 거쳐서 공연 대본을 만들어 갔었다. 텍스트 하나를 놓고 연출자나 배우 번역자까지 다 같이 달려들어서 치열하게 소통해 가는 과정이 너무 좋았다. 반대로 마지막까지 잘 안 풀리던 장면이 있었는데, 리허설 때 연출가가 ‘그냥 언니가 어떨 때 나를 위하는데, 속상해서 툭 말할 때 있잖아요. 그런 거 같아요.’ 그 순간, ‘아~ 알았어. 뭔지 알 것 같아.’하고는 그 장면이 다 해결된 적도 있다. 소통을 꼭 대본 놓고 분석해가며 하지 않아도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을 만나기만 하면, 큰 이야기로 만나 배우가 디테일을 만들기도 하고, 연출이 아주 작은 이야기를 해줘도 배우가 큰 우주를 만들어 오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에 대해 소통이 되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그것에 대한 이해와 합의가 충분치 않은 상태로, ‘더 빨리, 더 크게’ 같은 디렉션만 받다 보면 배우는 결국 ‘표현 끼워 맞추기’만 하게 된다.
작품을 통해 정말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뭔지, 그 이야기를 구현하기 위해 각 장면에서 일어나는 핵심적인 일이 뭔지에 대한 논의가 치열하지 않으면 사실 배우, 연출, 스태프, 관객 모두 헛힘을 쓰게 되는 것 같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알고 정하고 갈 수는 없어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무대에 오를 때까지, 공연이 올라가고 나서도, 하고자 하는 말이 계속 발견되고 변하더라도, 그것을 놓치지 않고 추적하고 추구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맞다. 그게 너무 중요하다. 그것이 초석이 되지 않으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그런데 사실 치열하기가 쉽지 않다. 각자 다른 생각들을 다 듣고, 다시 생각하고, 나눠야 하고, 그 시간을 견뎌야 하고... 가끔은 내가 연습을 자꾸 지연시키고 방해하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눈치도 보이고 할 말도 안 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고. 하지만 우리가 서로 이해시키지 못한 것들은 관객 역시 이해시키지 못한다.
연출과 배우가 서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이해를 하든 양보해서 합의하든 소통이 이루어졌을 때, 무대와 관객도 소통이 되는 것 같다. 소통이 덜 된 채로 무대에 오르면 관객들에게도 물음표가 뜬다. 그러니 서로에게 어려운 방식의 소통이어도 도전해서 해 내봐야한다. 그 과정을 배제하고 갈 수는 없다. 그 소통의 시간을 잘 견디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 곳으로 같이 가게 된다고, 헛힘이 아니라 좋은 힘을 쓰게 된다고.
황순미, 김신록
이 글을 다 읽으신 독자 여러분, 모르는 길로 들어설 때의 두려움과 설렘, 불안함과 두근거림을 기억하시나요? 저는 길치라서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더 크지만, 새로 발견한 오솔길에서 얻은 값진 감각과 경험 역시 기억하고 있습니다. 더듬더듬 더듬어가며 내가 남을 놀래키고, 내가 나를 놀래킬 수 있는, 나도 모르는 의외의 순간을 찾아나서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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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록

김신록 배우, 창작자, 워크숍 리더
rock2d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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