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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리뷰] 운명과 자유와 연극과

극단 성북동비둘기 <천기누설 킹교인>

박종주_평론가

제155호

2019.03.14

연극in은 지난 공연을 기억하고, 다시 보고, 발견하는 즐거움을 공유하고자 다양한 형태의 리뷰를 제안합니다. [작품리뷰]는 최근 공연된 작품들을 다양한 필자가 리뷰하는 코너입니다. - 연극in 편집부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의 아들이 라이오스를 죽일 것이다. 라이오스에게 전해진 이 신탁으로 오이디푸스의 여정이 시작된다. 운명을 바꾸기 위해 부부는 오이디푸스를 버리고, 오이디푸스는 이웃나라의 왕자가 된다. 그곳에서 또 다른 예언으로 알게 된 자신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길을 떠난 오이디푸스는 아무것도 모른 채 라이오스를 살해하고 이오카스테의 새 남편이 된다. 예정된 운명을 피하기 위해 이들이 나름대로 행한 일들이 얽히고설킨 끝에 드러나는 전모는, 모두가 예언된 그대로이다. 끔찍한 운명과 맞서 싸우는 데에 실패하고 만 이들의 이 이야기를 소포클레스는 희곡으로 썼다. 적어도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 대해 배운 바가 있다면 알 수밖에 없는, 〈오이디푸스 왕〉이다.
2019년 한국의 무대에 공연을 올리고 있는 이 사람들 또한 오이디푸스를 알고 있다. 이들이 연극을 하는 이곳의 역사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럼에도 또한 갑골문과 주역, 사주명리학이나 토정비결 같은 것들과 밀접한 곳에 있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위대한 신의 예언 같은 것에는 익숙지 않지만 점집에서, 철학관에서, 사찰에서, 혹은 웹사이트에서 자신의 앞날을 짚어 보려는 이들이 여전히 많은 곳이기도 하다.
델포이 신전의 신탁과 피할 길 없는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배웠지만 가까이에서는 사주를 읽는 역술가를 만난 이들은 아마도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사주란 주어진 섭리이지만 그것은 신이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오랜 세월 체득한 것이므로 조금은 더 해석에 열려 있으며 어떤 사주를 가진 이들끼리 만나는지에 따라 그들의 삶은 홀로 읽힌 팔자와는 달라지는 것이라고들 하므로, 그러니 우리가 아는 운명이란 그저 피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니므로. (물론 이런 사정이 아니더라도 운명이 무엇인지 말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어쨌든) 이들로서는 운명이 무엇인지 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일 테다. 운명이 무엇인지, 그 아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역설하는 대신 운명을 마주하는 여러 사람을 관찰하는 공연을 하게 된 것은 말이다.
실제로 사주 상담을 업으로 삼고 있는 역술인이 무대에서 직접 관객들의 팔자를 읽어준다는 간략한 설명이 공연 소개의 거의 전부다. 역술인을 제외한 배우들은 한껏 격앙된 연극적 어조로 그의 능력을 칭송하지만 또한 한껏 격앙된 연극적 어조로 관객들의 웃음을 끌어내므로, 무대 가운데 앉은 지초거사의 주위에는 묘한 분위기가 감돈다. 그의 앞에 앉은 관객을 바라보며 배우들은 이것을 믿고 따르라고, 그러면 만사형통이리라고 외치지만 어쩐지 너무 진지하게 듣는 티를 내면 그들이 웃어버릴 것만 같다. 갖가지 점복의 말들이 늘 그러하듯, 지초거사는 무언가를 말했다가 관객이 아니라고 하면 조금씩 말을 돌리는 것 같다. 사주팔자의 섭리가 원래 그러한 것인지, 이 사람이 말을 지어내고 있는 것인지, 혹은 기분 탓인지, 나로서는 알기 어렵다.
무대 위에서 그들은 많은 말을 하지만 결국 운명이란 무엇인지 분명히 말해주지 않으므로, 관객은 관찰하고 고민해야 한다. 다른 이들이 자신의 운명에 대한 예언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는지, 그들 앞에서 스스로는 어떤 태도를 내어 보일 것인지, 그리고 속으로는 또 어떤 생각을 할 것인지를 말이다. 굴지의 대기업에서 회사의 앞날을 위해 선대 회장 묏자리의 풍수를 살핀다는 소식을 여전히 전해 듣지만, 신점이나 사주를 보러 다니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지만, 현대인이라면 너무 진지하게 고민해서는 안 될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수많은 운명론에, 그것도 이를테면 과학화된 운명론에 둘러싸여 있다. 누군가의 선택에 그의 어린 시절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혹은 그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것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것도 아니면 이 사회구조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진지한 연구 결과 앞에서 우리는 신의 뜻이나 음양오행의 섭리를 믿지 않는다 해도 여전히 어떤 운명 지어진 일들에 대해 생각해야 하므로, 이런 고민이 쓸모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애써도 바뀌는 일 없어 보이는 이 세상에서, 의연하게 살아보려면 말이다.
이런 고민이 필요한 것은 아마도 운명과 자유가 서로 닮은 탓이다. 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무언가를 믿자니 우리는 매 순간 자유로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스스로를 마주하므로, 그러나 또한 전적인 자유의지를 믿자니 우리는 매 순간 여러 이유로 무언가를 포기하는 스스로를 마주하므로, 운명도 자유도 결국은 온전히 체험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전혀 달라 보이는 이 둘은 어쩌면 거의 같은 형태를 취한다. 지금 이것이 내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 말하려다 말고 어쩌면 이쯤에 선을 정하는 것이 나의 타고난 천성은 아닐까 의심하게 되고, 이 모든 것이 타고난 천성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하려다 어쩌면 이것이 나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르는 책임을 덜기 위한 핑계는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그런 의심들을 오가며 삶에 대한 태도 - 자유와 운명에 대한 태도 - 를 가늠해 보기에, 연극무대는 어쩌면 썩 좋은 장소다. 여기서 내가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떤 태도를 보이든 그것은 막이 내리면 끝나는 것이므로, 혹은 그것을 무대 위에 남겨 두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므로, 따라서 이것은 그저 안전한 연습에 불과한 것이라는 이유에서 만은 아닐 것이다. 무대란 미리 약속된 일들이 수행되는 곳이라는 사실, 관객으로서의 나에게 또한 어떤 역할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역할을 따를 의무가 사실은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떤 관객이 와서 어떤 말과 행동을 할지 알 수 없다는 불확정성을 기꺼이 안고 가는 참여연극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아마 이만큼의 관객이 올 테니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 들 시간은 대략 이 정도로 잡자고, 일반적으로는 이 정도로 반응할 테니 기본적인 흐름은 이렇게 하되 어쩌면 이런 돌발 상황은 있을지도 모르니 이를 대비한 상황 정도는 연습해 두자고, 그런 준비들 속에서 공연이 준비될 것이다. 나 또한 상식이라는 것에 대해 아는 바가 있으므로, 이 정도 선 안에서 반응하자고 스스로에게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한 어쩌면 나는, 배우들을 ― 그리고 다른 관객들을 ― 당황하게 만들지도 모를 어떤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걸로 공연이 중단되지 않는다면, 어쩌면 배우들에게 놀아난 것은 아닐지, 모든 것이 예상된 대로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지, 다시 의심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글쎄, 내게는 핑계가 하나 있었다. 이 무대를 관찰하고 이 글을 써야 한다는 핑계가, 그러므로 무대를 부러 망치는 것은 안 된다는 핑계가 말이다. 하지만 고백건대, 그런 핑계가 없었더라도 나는 이렇다 할 눈에 띄는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나의 천성인 탓일 테고 어쩌면 그것이 내가 어떤 구속도 없이 그리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의심들 사이를 오가며 적당한 곳에 자리 잡는 법은 아직 배우지 못했지만, 하나만은 확실하다. 내가 거기서 무슨 짓을 할지를, 적어도 나는,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는 사실 하나만은.

[사진제공: 극단 성북동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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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주

박종주
대학에서 문학과 미학을 공부했고 같은 기간 동안 몇몇 사회단체와 진보정당 등에서 활동했다. 지금은 몇 개의 창작집단과 사회단체를 통해 창작자나 연구자, 활동가들과 교류하고 있으며 주로 예술과 정치에 관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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