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의 자기비판, 혹은 무대 밖의 무대
서이레 글, 나몬 그림 『정년이』
박종주
제180호
2020.06.04
만화적 클리셰
이렇다 할 교육을 받은 적도 없으면서 무서운 재능을 가진 주인공. 별난 성격 탓에 제 재능을 진지하게 대해 본 적도 없으므로 아직은 거칠지만 좋은 스승을 만나 한층 더 무섭게, 성장을 시작한다. 투박하지만 순수한 그의 열정은 주변 사람들까지 변화시킨다. 이 재능에는 비밀이 있다. 바로 혈통이다. 부모가 온전히 펴지 못한 그 능력을 물려받았음을 미처 모르는 채, 주인공은 이른 비상을 시작한다. 상대역은 당대 최고의 가문에서 태어나 엘리트 교육을 받은 인물이다. 실력은 주인공을 능가하지만 정작 열등감을 갖는 것 또한 이 인물이다. 스스로가 다듬어진 만큼, 주인공이 다듬어진다면 얼마나 뛰어난 존재가 될지를 남들보다 빨리 알아채기 때문이다. 다소 뻣뻣한 성격 탓이기도 하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인공인 이 인물을 보고 배운다.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이 인물이 평생 익힌 것을 금세 따라잡고 자기 것으로 만든다.
『드래곤볼』 쯤 되는 ‘소년만화’를 본 적이 있다면 익숙한 구도일 것이다. 세세한 설정을 조금씩 바꾸면 『나루토』가 되고 『원피스』가 된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또한 이것은, 지난해부터 네이버만화에서 연재되고 있으며 최근 단행본 1권(문학동네, 2020)이 나온 웹툰 『정년이』에도 들어맞는 그림이다. 이 작품은 그러나 격투만화는 아니다. 예술가가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역사로 기록된 그럴싸한 분야가 배경인 것도 아니다. 사회가 흔들리고 전통이 틀어지던 시기에 등장해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는 진동이 잦아들고 전통이―아마도, 예술의 전통이 아닌 성별의 전통이―다시 허리를 펴자 자리를 잃고만, 1950년대의 여성국극이 바로 『정년이』가 펼쳐지는 장이다.
제 실력 하나만 믿고 집을 나와 목포의 장바닥에서 서울의 국극단으로 배경을 바꾼 정년은 연기는 물론 소리조차 제대로 배운 적이 없고 엄격한 규율 아래 굴러가는 단체 생활을 해 본 적도 없으므로 드높은 장벽을 마주한다. (이 시점쯤까지가 단행본 1권의 이야기다.) 하지만 설익었을 뿐 재능은 넘치고 거리의 예인藝人을 붙잡고든 자신을 경계하는 라이벌을 보면서든 가리지 않고 배우므로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시간문제다. 몇 가지 고초와 일탈을 겪으며 이내 단단해지고 진지해진다. 차근차근 익히고 만들기 시작한다. (웹툰 연재분은 이쯤까지 진행되어 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곧 더 빠르게, 더 놀랍게 변할 것이다. 클리셰를 그야말로 성실하게 따르는 진행이지만 뻔한 이야기가 될 수는 없다.
제 실력 하나만 믿고 집을 나와 목포의 장바닥에서 서울의 국극단으로 배경을 바꾼 정년은 연기는 물론 소리조차 제대로 배운 적이 없고 엄격한 규율 아래 굴러가는 단체 생활을 해 본 적도 없으므로 드높은 장벽을 마주한다. (이 시점쯤까지가 단행본 1권의 이야기다.) 하지만 설익었을 뿐 재능은 넘치고 거리의 예인藝人을 붙잡고든 자신을 경계하는 라이벌을 보면서든 가리지 않고 배우므로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시간문제다. 몇 가지 고초와 일탈을 겪으며 이내 단단해지고 진지해진다. 차근차근 익히고 만들기 시작한다. (웹툰 연재분은 이쯤까지 진행되어 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곧 더 빠르게, 더 놀랍게 변할 것이다. 클리셰를 그야말로 성실하게 따르는 진행이지만 뻔한 이야기가 될 수는 없다.
클리셰 너머, 삶의 클리셰
여성국극단, 그러니까 주연부터 조연까지가 모두 여성인 공간이 배경이니 말이다. 게다가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는 당대 최고의 국극단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같은 꿈을 가진 동료들이자 같은 처지에서 동병상련을 느끼는 벗들이며 동시에 몇 안 되는 주인공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프로’들이기도 하다. 쉽사리 이상화되거나 낭만화될 수 없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섣부른 낭만화일 것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실재했다고는 해도―미술가 정은영의 여성국극 프로젝트(2008~)나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김혜정 감독, 2011) 등 몇 가지 사례를 제외하면―국극단이란 대중적으로 알려질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한 공간이므로 현실적인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단순한 판타지에 그치기는 사실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무예든 예술이든 기예art와 경쟁을 다루는 이야기들의 클리셰를 끌어오는 것은 “여성서사”를 표방하는 작품으로서는 어쩌면 위험한 시도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성별이 바뀌었을 뿐 여전히 뻔한 이야기가 되고 말 위험, 혹은 그마저도 잊힌 채 남성의 목소리로 읽힐 위험을 안고 있는 시도다. 국극단 무대에서나 하는 줄 알았던 남장을 일상에서 하고 있는 인물을 만난다거나 군인의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만난 여성들―이들은 군인들을 대접하는 자리에서 “식사 수발”을 하고 있다―이 알고 보니 참전 장교들이었다거나 하는 장치들이 적절히 배치되지 않았다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성별이 바뀌어도 여전히 뻔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애초에 그 이야기가 어느 한 성별에만 허락되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남성의 이야기와 다른 방식으로 읽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야기를 읽는 이에게도 만드는 이 만큼이나 상상력이 요구됨을 뜻할 것이다. (그러한 상상력의 부재를 나는 언젠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으며 절감했다. 오로지 문자를 통해서만 말 그대로의 성별이 반전된 세계, 여성우위 사회를 묘사하는 소설이다. 여러 차례 반복해 주인공의 대사를 머릿속에서 흔한 남성의 목소리로 재생하는 스스로를 마주하며 나는 매번 당황해야 했다.) 클리셰라는 것이 “여성서사”의 힘을 앗아갈 수 있다면 아마도 그처럼 일상 자체에 깃들어 있는 클리셰를 통해서일 것이다. 작품의 진행에 이용되는 클리셰는 그에 비하면 아주 사소할 뿐이거나 어쩌면 아예, 그 클리셰를 폭로하기에 가장 적절한 도구일 테다.
그러므로 무예든 예술이든 기예art와 경쟁을 다루는 이야기들의 클리셰를 끌어오는 것은 “여성서사”를 표방하는 작품으로서는 어쩌면 위험한 시도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성별이 바뀌었을 뿐 여전히 뻔한 이야기가 되고 말 위험, 혹은 그마저도 잊힌 채 남성의 목소리로 읽힐 위험을 안고 있는 시도다. 국극단 무대에서나 하는 줄 알았던 남장을 일상에서 하고 있는 인물을 만난다거나 군인의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만난 여성들―이들은 군인들을 대접하는 자리에서 “식사 수발”을 하고 있다―이 알고 보니 참전 장교들이었다거나 하는 장치들이 적절히 배치되지 않았다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성별이 바뀌어도 여전히 뻔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애초에 그 이야기가 어느 한 성별에만 허락되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남성의 이야기와 다른 방식으로 읽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야기를 읽는 이에게도 만드는 이 만큼이나 상상력이 요구됨을 뜻할 것이다. (그러한 상상력의 부재를 나는 언젠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으며 절감했다. 오로지 문자를 통해서만 말 그대로의 성별이 반전된 세계, 여성우위 사회를 묘사하는 소설이다. 여러 차례 반복해 주인공의 대사를 머릿속에서 흔한 남성의 목소리로 재생하는 스스로를 마주하며 나는 매번 당황해야 했다.) 클리셰라는 것이 “여성서사”의 힘을 앗아갈 수 있다면 아마도 그처럼 일상 자체에 깃들어 있는 클리셰를 통해서일 것이다. 작품의 진행에 이용되는 클리셰는 그에 비하면 아주 사소할 뿐이거나 어쩌면 아예, 그 클리셰를 폭로하기에 가장 적절한 도구일 테다.
남성은 이러하고 여성은 저러하며 그러므로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이러이러하다는 것. 이미 오래전에 폭로된, 그러나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가진 클리셰다. 여성국극은 춘향전 같은 익숙한 이야기로 이 클리셰를 재상연한다. 기껏 무대에 오른 여성국극이 택한 이야기, 새시대의 관객들이 택한 이야기는 거창한 야망을 품은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춘향이나 낙랑공주같은 익숙한 멜로물이다. 남성의 힘과 지위만이 약속해 줄 수 있어 보였던 것이 실은 여성에게서도 문제없이 실현될 수 있음이 다시 한번 폭로된다. 몽룡의 소리를 편 남성들이 얻지 못했던 인기를 여성국극 배우들이 얻음으로써 애초에 그것은 남성중심의 사회는 지킬 수 없었던 약속이었음이 폭로된다. 클리셰를 끌어안은 만화와 무대가 공조해 이 세계의 클리셰를 비웃는다.
무대 밖의 무대
폭로는 무대 위에서 혹은 극장 안에서 그치지 않는다. 정년의 극장 밖 스승, 차별에 진저리가 나 남성으로 살기로 한 고 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난 내가 본 대로 했는걸? 이렇게 거드름피우면 부잣집 놈팽이 같지 않아? 이렇게 걸으면… 어때. 종로 형님들 같지. 고작 어깨를 떡 벌리고 목소리를 깔았을 뿐인데 말이야. 남자됨과 여자됨이 참 가소로워. 처음엔 연기였을지도 모르지만 이젠 나 자신이나 다름없지”(웹툰 17화). 작가가 마음대로 그릴 수 있고 소리는 나지 않는, 들킬 리 없는 만화라서 부릴 수 있는 허세는 결코 아니다. 남역을 오래 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 목소리를 내어 평소에 종종 남성으로 인식된다는 국극 배우가 있다. 수십 년 세월을 남장을 한 채 살아 죽고 난 후 주변인들을 놀라게 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얼마든지 있다. 남역으로 무대에 오르고 이를 연습하는 것이 매일의 일과였던 당시에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월경이 멎었고 가슴이 작아졌다는 이가 있다.
무대 위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그 자유가 실은 일상에서도 가능하리라는, 또한 가능해야 한다는, 안타깝게도 널리 확인된 바 없는 자명한 진실. 당대인들의 기억 속에 묻혔다가는 짧게 잡아도 지난 십 년여의 시간 동안 조금씩, 조금씩 다시 이름을 되찾아 온 여성국극의 역사, 그리고 거기에 상상력을 덧대어 무대 뒤를 그려내는 《정년이》는 아마도 저 진실을 확인할 자그마한 자리를 만들었고 만드는 중일 것이다. 무대 위의 자유가 무대 밖으로 번지는 것이 무대에 올랐던 배우들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정년이, 도앵이, 혹은 영서나 주란이 우리가 살고 있는 거리에 나타날 일 없는 그림 속 인물임을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웹툰이 51화까지 연재되는 동안 수만 개의 주책맞은―만화 속 판타지와 자신의 일상을 구분할 생각이 도무지 없어 보이는―댓글을1) 달아 둔 독자들이 있으므로.
- 여성에게 삶이 가능한 공간을 상상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그를 통해 스스로의 편견을 성찰하는 / 작중에 재현되는 1950년대 한국의 성차별, 그와 공명하는 현재의 성차별을 검토하는 / 여성국극의 팬들이 그랬듯 작중 인물들에 대한 흠모를 숨김없이 늘어놓는 / 이성애규범적인 로맨스 서사에서는 구석구석을 뒤져 겨우 찾아내야 했던, 그러나 여기서는 전면에서 펼쳐지는 대안적이거나 다양한 관계를 즐기고 만들고 기대하는 댓글들을.